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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숭정제)

숭정제(崇政帝) 최후의 날

by 중은우시 2014. 5. 30.

글: 학원출판사

 

숭정13년 강남은 큰홍수가 난다. 숭정14년 가뭄과 메뚜기떼의 피해가 있었다. 숭정15년 가뭄이 연이어 나타나고 전염병이 돌았다. 지방사회는 아주 취약한 상태에 놓였고, 도적과 유민이 일어나고, 각지에서 백성들의 반란이 계속 일어난다. 명사종(明思宗) 숭정제는 먼저 양학(楊鶴)을 기용하여 이를 진압,위무하게 하고, 이어서 홍승주(洪承疇)를, 다시 조문조(曹文詔)를, 다시 진기유(陳奇瑜)를, 다시 홍승주를, 다시 노상승(盧象昇)을, 다시 양사창(楊嗣昌)을, 다시 웅문찬(熊文燦)을, 다시 양사창을 기용한다. 13년동안 빈번하게 이자성의 농민군의 반란을 진압하는 장수를 교체하는데, 웅문찬을 제외하고는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공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자성은 여러번의 대난에도 죽지 않았고, 나중에 하남으로 가서 무리를 모아 발전한다.

 

이때 북방의 홍타이시(청태종)은 계속 변경을 침입하여 교란시켰다. 명나라조정은 전선 2곳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매년의 군비 '삼향'비용지출은 이천만냥이상에 달한다. 국가재정은 이미 지출이 수입을 초과한다. 군수물자가 부족한 상황이 보편적이 되고, 그리하여 명군내부에서는 자주 사태와 변고가 일어난다. 여기에 명사종은 나라를 다스리려는 마음은 절실하지만, 심성이 의심이 많고, 강퍅자용하여, 조정에서 계속하여 큰 실수를 저지런다; 전반에는 환관권력농단을 없앴으나, 후기에는 다시 환관을 기용하고, <춘명몽여록>에 따르면, "숭정2년 십일월, 사례감 태감 심량주를 제독구문 및 황성문으로 삼고; 사례감 태감 이봉상을 총독충용영으로 한다"; 후금의 반간게에 놀아나서 원숭환을 죽인다.

 

국면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명사종의 남살(濫殺)도 갈수록 심해진다. 총독중 주살된 자가 7명이고, 순무중 살육된 자가 11명이다. 명사종도 양면작전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적으로는 의화(議和)에 동의한다. 다만 명나라의 사대부는 남송의 교훈으로 인하여 모두 만주족과의 평화협상을 수치로 여겼다. 그러므로 명사종은 화의에 대하여, 시종 이것저것 따지게 된다. 그는 암중으로 양사창의 의화주장에 동의하면, 다른 편의 노상승이 즉시 얘기한다: "폐하께서 신에게 명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명하셨으며, 신은 그저 전투만 알 뿐입니다". 명사종은 그저 의화의 일은 근본적으로 없다고 변명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노상승은 결국 전쟁터에서 죽는다. 명나라말기 화전의 양난 가운데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숭정15년(1642년), 송산, 금주를 빼앗긴다. 홍승주는 청나라에 투항한다. 숭정제는 다시 만청과의 의화를 생각하여 병부상서 진신갑(陳新甲)과 암중으로 계획을 상의한다. 나중에 진신갑은 의화 건을 누설한 죄로 숭정제에 의하여 처형당한다. 결국 청나라와의 최종적인 의화기회는 이렇게 물건너간다. 숭정17년(1644년), 명왕조는 멸망의 위기를 맞는다. 명사종은 각신들을 접견할 때 비탄스럽게 말한다: "내가 망국의 군주가 아니라, 너희들이 모두 망국의 신하이다. 나는 선비들에게 박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오늘날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 여러 신하들은 한 사람도 따르지 않는구나." 진연, 광시형등은 반대하거나 책임지고 싶지 않아해서 남경으로 천도하는 일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사후 숭정제는 광시형을 질책한다: "남천을 막았으니, 원래는 참형에 처해야 하지만, 용서를 해주겠다." 나중에 숭정제는 다시 한번 이명예와 좌도어사 이방화와 다시 남천계획을 논의한다. 그리고 대학사 진연으로 하여금 책임을 맡게 한다. 진연은 이를 원하지 아니하여 얼마후 파직된다. 제2차남천계획도 실패로 돌아간 후, 숭정제는 부마 공영고(鞏永固)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경사를 지키게 하고, "성가남순(聖駕南巡), 정병친토(征兵親討)"하겠다고 하면서 북경을 떠나려 한다. 여러 신하들은 황제가 경성에 있지 않으면 농민군들이 들어와서 화풀이할 때 대신 죽을 것을 겁내, 여전히 숭정제가 북경을 떠나는 것에 반대한다.

 

이때, 농민군은 반란을 일으킨지 이미 십여년이 되었다. 북경의 남쪽, 남경의 북쪽에서 수천리를 종횡하며 백골이 온 천지에 널렸고, 사람들이 밥짓는 연기는 보이지 않았으며 행인도 드물었다. 숭정제는 보정순무 서표를 불러서 접견한다. 서표가 말한다: "신이 강회에서 오는데, 수천리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성이 있는 곳도 겨우 사방의 벽만 남아 있을 뿐이고, 쳐다보면 잡초만 가득합니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데 폐하께서 앞으로 어떻게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숭정제는 그의 말을 들은 후,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난민과 전사한 장병 그리고 피살된 각 친왕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숭정제는 궁안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켜 천하태평을 기원한다. 그리고 죄기조(罪己詔)를 내리고, 독사 손전정에게 하루빨리 농민군을 소탕하라고 재촉한다.

 

숭정16년 정월, 이자성은 양양, 형주, 덕안, 승천등의 부(府)를 함락시킨다. 장헌충은 기주(蘄州)를 함락시킨다. 명나라장수 좌량옥은 안휘 지주(池州)까지 도망친다. 숭정17년91644년) 삼월 일일, 대동(大同)이 함락된다. 초사일, 숭정제는 오삼계를 평서백으로 삼고, 오삼계에게 비격을 보내 경사를 지키라고 명한다. 그리고 오양(吳襄)을 제독으로 삼아 경성을 지키게 한다. 육일, 이자성이 선부(宣府)를 함락시킨다. 태감 두훈은 투항한다. 십오일, 대학사 이건태가 투항한다. 이자성의 부대는 북경을 포위하기 시작한다. 태감 조화순은 말했다: "충현이 만일 있다면 시절이 여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월십육일, 창평이 함락된다. 십칠일, 북경성을 포위공격한다. 삼월 십팔일, 농민군이 사다리를 가지고 서직, 평칙, 덕승의 여러 문을 공격한다. 수비군은 도망치거나 투항한다. 오후, 조화순은 창의문을 연다(일설에는 십구일 왕상요가 선무문을 열었다고 하고, 그외에 장진언은 정양문을 지키고, 주순신은 조양문을 지켰는데, '일시에 모두 열리고, 두 신하는 문을 열고 나가서 적에게 절을 했고, 적이 서에 올라, 병부시랑 왕가언을 성루에서 죽이고, 형부시랑 맹조상을 성문아래에서 죽인다.'라고 한다)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으로 진입한다. 태감 왕렴은 급히 황제에게 고한다. 명사종은 궁안에서 술을 마시켜 장탄식을 한다: "우리 백성들이 고생하는구나." 태감 장은은 황제에게 투항을 권하나 일검에 찔러죽인다. 명사종은 태자, 영왕, 정왕을 훈척(勛戚) 주규, 전홍우의 집으로 보내고, 주후(周后)를 자결하게 하고, 손에 칼을 들고, 원비(袁妃, 죽지 않음), 장평공주(長平公主_, 죽지 않음), 소인공주(昭仁公主)를 벤다.

 

그후 명사종은 삼안창(三眼槍)을 집어 들고, 수십명의 태감과 함께 말을 타고 동화문을 나선다. 그러나 마구 쏟아지는 화살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제화문(조양문)으로 도망친다. 성국공 주순신은 문을 걸어닫고 받아주지 않는다. 나중에 방향을 돌려 안정문으로 향하나 이곳의 수비군은 이미 흩어졌고,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태감은 날카로운 도끼로 내려찍었으나 열 수가 없었다. 삼월십구일 아침이 밝았다. 큰 불이 사방에서 일어났으며,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다. 성밖에는 이미 불길이 하늘로 솟았다. 이때 하늘은 곧 날이 밝아올 때였다. 숭정제는 전전(前殿)에서 종을 울려 백관을 소집했는데, 한 명도 오지 않는다. 명사종은 말한다: "여러 신하들이 짐을 그르쳤다. 국군이 죽고 사직 이백칠십칠년의 천하는 하루아침에 버려졌다. 모두 간신들이 잘못하여 이에 이르렀다." 마지막에 경산의 나무에 목을 매고 자결한다. 죽었을 때 왼발은 맨발이었고, 오른발에는 붉은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당시 나이 33살이다. 그의 곁에는 제독태감 왕승은만이 함께 했다. 목을 매어 죽기 전에 남색포에 큰 글자로 이렇게 쓴다: "짐이 등극한지 17년, 짐은 비록 덕이 없고 비천한 몸이어서 위로는 하늘의 징벌을 받아 역적이 경사에 침입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이는 여러 신하들이 짐을 그르친 탓이다. 짐이 죽으면 조상을 지하에서 뵐 면목이 없으니 스스로 면류관을 벗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다. 적이 짐의 시신을 마음대로 갈라도 좋지만 백성은 한 사람도 다치지 말라." 삼월 이십일일 시신이 발견되고, 대순군은 명사종과 주황후의 시신을 궁에서 끌어내 동화문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여러 신하들이 곡을하고 절을 하는 자가 서른명에 이르고, 절을 하나 곡을 하지 않는 자가 육십명이었으며 나머지는 그냥 곁눈으로 보고 지나갔다." 관은 잠시 자금성 북쪽의 호성하변에 놓아둔다.

 

명사종이 죽은 후, 자살한 관리로는 호부상서 예원로, 공부상서 범경문, 좌도어사 이방화, 좌부어사 시방요, 대리시경, 능의거, 태상시경 오인정, 좌중윤 유리순, 형부우시랑 맹조상 등이 있다.  부마도위 공영고는 온가족이 자살했고, 태감중 자살한 자가 백명에 이르고, 전사한 자는 천명이상이다. 궁녀중 자살한 자는 삼백여명에 이른다. 신생생원(紳生生員)등 700여가족은 일가족이 자살했다. 사월사일, 창평주리(昌平州吏) 조일계(趙一桂)등은 숭정제와 주황후를 창평현 전귀비의 묘혈에 매장한다. 청왕조는 "숭정제의 유체를 개장하여, 신민들에게 삼일간 상복을 입게 하고, 시호를 장열민황제로 하고, 능의 이름을 사릉(思陵)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