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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숭정제)

숭정제 황자들의 행방

by 중은우시 2008. 12. 23.

글: 하억(何憶)

 

<<명사. 제왕전>>의 기록에 따르면, 숭정제는 모두 7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주황후(周皇后)가 셋을 낳았는데, 황장자 태자 주자랑(朱慈), 황이자 회은왕(懷隱王) 주자훤(朱慈烜),황삼자 정왕(定王) 주자형(朱慈炯)이다; 그리고 전귀비(田貴妃)가 넷을 낳았는데, 바로 황사자 영왕 주자소(朱慈炤), 황오자 도령왕(悼靈王) 주자환(朱慈煥), 황육자 도회왕(悼懷王) 이름없음, 황칠자 이름없음. 숭정17년(1644년) 이자성이 북경성을 함락시킬 때, 황태자 주자랑은 16세이고, 황삼자 정왕 주자형이 14세, 황사자 주자소가 겨우 10살이었다. 이들 세아들을 제외하고 숭정제의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다.

 

이자성의 대군이 북경성을 함락시킬 때, 숭정제는 국면을 만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피살될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자식을 아끼는 마음에서 숭정제는 여전히 대명을 위하여 혈맥을 남기고자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들을 모두 자기 앞에 부른 다음, 그들에게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게 하고, 태감을 시켜 궁밖으로 도망치게 했다. 아이들은 전란중에 북경성을 도망쳐 나가서, 남방으로 가서 다시 나라를 세우는 대업을 이루길 바랬다. 그리하여, 어둡고 혼란한 밤에 세 소년은 몰래 자금성을 빠져나온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숭정제는 수성태감이 반란군에 투항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숭정제는 혼란중에 몇몇 태감을 데리고 포위돌파를 시도해 보지만 모두 반란군에 막혀서 되돌아 온다. 그리고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고 깨달은 숭정제는 후비와 공주를 칼로 베어 죽이고, 자신은 노태감을 데리고 자금성의 뒤에 있는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죽을 때, 그는 유언을 남겼는데, 각지의 관리들이 태자를 돕고 보좌하여, 대명을 다시 일으키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자신은 비록 죽지만, 태자가 도망쳐나가면 한줄기 희망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죽기 전에 마음 속으로 잊지 않고 있던 일이었다. 숭정제는 고심을 다하였찌만, 아쉽게도 하늘은 명나라를 도우지 않았다. 대명강산의 운수가 다한 것이다. 그들 황자들이 도망친 후 나라를 되찾고 치욕을 설욕한 날이 오지 않았을 뿐아니라, 이후로는 소식이 없게 된다.

 

도망친 태자와 그의 두 동생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떤 사람은 태자 삼형제는 이자성의 겹겹이 포위한 북경성을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도망치던 날에 솟아오르는 불길을 보고 세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상의한 후에 먼저 주황후의 부친, 즉 그들의 외할아버지인 주규(周奎)의 집에 숨기로 한다. 바깥이 잠잠해지면 다시 방법을 강구해서 남쪽으로 도망치고자 한다. 다만, 바깥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태자와 정왕 및 영왕의 형제는 헤어진다. 그저 정왕과 영왕만이 주규의 집에 도착했다. 이자성이 북경성에 진입한 후, 숭정의 황자들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주규는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정왕, 영왕을 이자성에게 내놓는다. 나중에 황태자도 이자성의 군대의 수색에 붙잡혀버린다. 이로써 태자와 대순황제 이자성간의 대화가 나타난다. 태자는 이자성에게 "왜 나를 죽이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이자성은 말한다: "너는 죄가 없다. 내가 어찌 함부로 너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러자, 태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내 말을 한마디 들어달라. 첫째, 나의 조상의 능묘는 건드리지 말라. 둘째, 하루속히 나의 부황모후를 묻어달라,셋째, 나의 백성을 죽이지말아달라." 전해지는 바로는 이자성이 이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뿐아니라, 황태자를 송왕(宋王)에 봉하고, 다른 두 황자에게도 작위를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모조리 유종민에게 넘겨서 돌보게 한다. 나중에, 이자성은 오삼계가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부대를 이끌고 오삼계를 토벌하러 갈 때, 숭정제의 세 아들을 곁에 둔다. 이들을 이용하여 오삼계를 설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가서 이자성은 대패한다. 이자성이 북경으로 패퇴하여 도망치는 길에서, 유종민도 중상을 입고, 태자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게 된다. 태자는 기회를 틈타서 이자성의 부대에서 도망친다. 그를 따른 사람은 이전에 그의 스승이었던 이사순(李士淳)이었다. 이사순은 명나라의 한림원 편수로 태자강관을 지냈으며, 명나라가 망한 후에 이자성이 내린 관직을 받았다. 이사순의 원적은 광동 가응주였으므로, 그들은 바로 이사순의 고향까지 도망친다. 가응주의 음나산에서 출가하여 화상이 된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에 "성수사(聖壽寺)"라는 절을 짓고, 대전은 "자극전(紫極殿)"이라고 이름붙인다. 곳곳에서 절에 있는 중의 신비한 출신을 드러냈다. 전해지는 바로는 태자가 죽은 후에 절에는 "태자보살(太子菩薩)"이라는 신위를 모셨다고 한다. 이 신위는 계속 보류되고 있었는데, 신해혁명후에 청왕조가 망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이 불상이 바로 명나라의 도망친 태자라는 것을 알았다. 이사순의 후손도 그들의 선조가 확실히 전란중에 태자를 구해서, 태자를 자기의 고향으로 데려왔으며, 그들 두 사람은 같이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고 말한다.

 

태자의 운명에 관하여, 또 다른 주장도 있다. 그가 궁을 도망친 후, 가난한 할머니가 기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할머니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할 수 없이 그를 국장(國丈, 임금의 장인)인 주규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장평공주(長平公主, 숭정제의 큰 딸)도 주규의 집에 있었다. 오누이 두 사람은 만난 후에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주규는 온 집안 사람들을 불러 태자에게 군신의 예를 행하고, 태자에게 묻는다: "너는 계속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 태자가 대답해서 말했다: "성이 함락되는 날, 나는 단독으로 동광문 밖에 숨어 있었다. 하루는 밤에 나가 몰래 동화문까지 갔는데, 한 가난한 할머니가 돌봐주었다. 나중에 다시 나는 숭문문밖의 여승암자에 보내어졌다. 그곳에서 빈곤하고 의지할 데없는 고아로 행세하며 반달을 지냈다. 그러나, 주규는 너무 간담이 작았다. 오랫동안 태자를 머물게 할 수 없었다. 황태자는 할 수 없이 다시 길거리를 유랑한다. 나중에 순라를 돌던 청나라병사에게 통금위반(犯夜)으로 체포된다. 그리하여 형부에서 조사를 한다. 황태자는 조사하는 관리에게 자신이 명나라의 황태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형부의 주사관원은 황태자라면 자신이 스스로 황태자라고 대담하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가짜황태자라고 단정한다. 다만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형부주사 전봉람은 원 사례감태감인 왕덕화등을 불러서 확인하게 한다. 결과는 진짜 황태자였다. 그래서 전봉람은 일이 중대하다고 생각하여, 즉시 도르곤에게 보고한다. 도르곤은 황태자가 만일 세상에 살아있으면, 명나라의 유신들이 반란을 일어키는데 앞장세울 수 있다고 보고, 명을 내려 황태자를 처결하게 한다.

 

이상의 두 가지 주장이외에 또 다른 설도 있다. 황태자는 성공적으로 북경을 도망친 후, 순조롭게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나중에 남명(南明) 소조정의 이계주(李繼周)가 그를 모시고 남경으로 갔다. 가기 전에 태자가 이계주에게 묻는다: "나를 맞이해서 남경에 들어가는 것은 나보고 황제를 하라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이계주는 답한다: "그 일은 신이 모릅니다." 사실 이때의 남명은 복왕(福王) 주유송(朱由)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는 숭정제의 태자가 온다는 말을 듣고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만일 이 소년이 정말 태자라면, 그는 당연히 황제자리를 태자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황제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황태자가 남경에 도착한 후, 그는 직접 만나지를 않고, 황태자를 입궁하지도 못하게 하며, 흥선사(興善寺)에 잠시 거주하도록 한다. 그리고 두 명의 태감을 보내어 태자를 만나서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아보게 한다. 두 사람은 만난 후에 진짜 황태자라고 말한다. 복왕은 대노하여 두 태감을 죽여버린다. 나중에 다시 원래의 총독경영태감인 노구덕(盧九德)에게 가서 확인해보라고 한다. 노구덕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하여 닮기는 하였는데, 진짜는 아니라고 말한다. 황태자가 남경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조정은 정치위기를 맞이한다. 조정신하들은 양파로 나뉜다. 장강중류의 좌량옥(左良玉)등은 황태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남경으로 들어온다. 강북의 황득공(黃得功), 유량좌(劉良佐)등의 총병도 상소를 올려 태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복왕은 자기의 황제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써서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명하지 않은 황태자를 제거하고자 한다. 그는 일찌기 태자강관을 맡았던 왕탁(王鐸)을 핍박하여 태자는 가짜라고 말하게 한다. 그리고 태자를 붙잡아와서 심문하게 해서, 가짜태자의 이름은 왕지명(王之明)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감옥에 수감시킨 후 처리도 하기 전에, 남명소조정은 청나라군대의 공격에 무너진다. 남경의 백성들은 감옥에 뛰어들어가 황태자를 구출해낸다. 그러나 아쉽게도 며칠 후에 태자는 청나라군데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도도(多鐸)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세월이 흘러가도, 숭정의 황자들에 대한 전설은 사라지지 않는다. 강희연간에 이르러, "주삼태자(朱三太子)"를 내세워 반청복명의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것이 유명한 "주삼태자사건"이다. 강희12년 겨울(1674년 1월), 북경에 양기륭(楊起隆)이라는 자가 스스로가 주삼태자라고 말하면서, 노비, 소작농등을 규합하여 거사를 밀모한다. 나중에 사전에 일이 누설되어, 청나라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는다. 양기륭은 도망친다. 강희19년, 섬서의 한중에 스스로 주삼태자라고 칭하는 자가 나타나 반청활동을 한다. 청나라조정은 이 자를 가짜라고 하면서 북경으로 붙잡아와서 죽여버린다. 삼번의 난때, 복건의 채인에도 어떤 사람이 주삼태자라고 나서서, 수만의 무리를 끌어모아 대만의 정경과 내통하여 반청복명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청나라군에 천보산에서 격패당한다. 47년 정월, 절강 대람산에서 청나라에 항거하여 거병한 장념일을 붙잡는다. 4월에는 청나라조정이 장념일의 공술에 따라 산동 문상현에서 장씨성의 부자를 붙잡아서 이들이 반란군이 옹립했던 주삼(朱三)이라고 하며 붙잡아서 절강으로 데려다 심문한다. 장은 스스로의 본명이 주자환이며 숭정제의 황삼자라고 함란다. 오랫동안 하남, 절강 등지를 유랑했고, 선후로 왕, 장으로 성씨를 바꾸었다고 하였다. 당시 나이가 75세라고 하였으며, 강남 절강 등지의 반청세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그를 가짜라고 하면서 "통적"죄로 주씨부자를 북경으로 압송해와서 죽여버린다. 주삼태자안은 이로써 비로소 끝이 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