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가 경산(景山)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고, 그 유적지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석비(石碑)까지 세워져 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숭정제가 그 곳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는 것을 상식으로 여긴다. 그러나, 사실상,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1644년,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성 아래까지 쳐들어왔다. 돌발적인 전염병으로 북경성을 수비하는 명나라군대의 전투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20만대군중에서 성위로 올라갈 수 있는 자가 겨우 6천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들마저도 몸이 쇠약한 상태였다. 명나라의 북경성은 내성의 성벽이 12킬로미터 외성의 성벽이 14킬로미터이다. 황성에는 배치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 병사가 평균 50미터 가량을 수비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버티기가 힘들다.
3월 18일 밤, 농민군이 외성을 돌파한다. 숭정제는 십여명의 태감을 데리고 황궁을 떠나, 제화문(齊化門)으로 간다. 수비군사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가짜라고 생각하여 화살을 쏘아 쫓아버린다. 다시 안정문(安定門)으로 갔는데, 생각외로 문빗장이 무거워서 태감들이 들어올리지 못했다. 바로 이 무거운 문빗장이 영나라역사를 철저히 바꾸어 버린다.
3월 19일, 농민군이 성안으로 진입하고 황궁을 모조리 수색했지만 숭정제를 찾아내지 못한다. 3월 22일이 되어서야 매산(煤山, 즉 景山)에서 시신을 하나 발견하는데, 왼손에 "천자(天子)"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태감에게 확인을 시켜보니 숭정제가 맞다고 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하여 사학자들은 이견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황운미(黃雲眉) 선생은 숭정이 북해공원에서 자결했다고 보고, 유평백(兪平伯) 선생은 숭정이 관원인(管園人) 즉 관리인의 작은 집에서 죽었다고 본다.
"외외만세산(巍巍萬歲山), 밀밀접연수(密密接煙樹), 중유망제혼(中有望帝魂), 비제부지처(悲啼不知處)" 이것은 청나라때 숭정을 애도하는 시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 북해공원 경도에는 '만세산'이라는 산이 확실히 있다. 둘째, 자결한 유적지는 당시인들도 이미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한다(不知處)'는 점이다.
자결한 장소를 찾아내고, 도대체 어느 나무에 목을 매었는지를 지목해서, 그 나무에 "죄괴(罪槐)'라고 이름붙인 것은 청나라정부가 인심을 회유하기 위하여 한 일이다. 청나라군대는 '숭정제의 복수를 위하여' 산해관을 넘었다고 했기 때문에,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석비를 세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1931년 고궁박물원에서 '명사종순국처(明思宗殉國處)'라는 비를 세운다. 심윤묵 선생이 비문을 썼는데, 당시는 대일항전 전야이므로 "명(明)"이라는 글자의 왼쪽에 있는 "일(日)"자를 일부러 "목(目)"자로 바꾸어 적었다. 그 이유는 '일본'을 무시하겠다는 것이다. 이 비석은 문혁때 두 조각으로 부숴져서, 북경소년궁으로 보내어져 우물덮개로 쓰인다. 북경소년궁은 경산 수황전(壽皇殿)이다. 어떤 사람은 이 곳이 바로 숭정이 자결한 곳이라고 한다. 2003년, 이 비석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진다.
1931년에 "죄괴"는 이미 원래의 그 나무가 아니었다. 이때는 이미 숭정이 자결한 때로부터 280여년이 흘렀다. 사진으로 보면 그 홰나무는 직경이 1척도 되지 않았다. 어찌 이렇게 더디게 자란단 말인가? 1960년대중반, "죄괴"는 고사하고, 1971년에 잘라낸다. 1981년 자그마한 홰나무를 심었다. 1996년, 분위기를 살리기 위하여 공원에서는 수령이 150년된 나이든 나무를 찾아내어 이 곳으로 옮겨심는다. 원래 건국문 일대의 가로수로 있던 나무인데, 이때부터 "죄괴"가 된 것이다.
1944년, 갑신삼백년때, 이 곳에는 도 하나의 비석이 세워진다. 부증상(傅增湘)이 글을 썼다. 부정상은 저명한 교육가, 장서가이며, 북양정부에서 교육총장을 맡았다. 그의 옹호하에 채원배는 '겸용병포'의 교학이념을 펼칠 수 있었다. 채원배가 사직한 후 그도 사직한다. 1938년,부증상은 일본인이 조종하는 동아문화협의회에 참가하고 회장등의 직을 맡아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1949년 신중국성립전에 주은래는 진의에게 친필서신을 주면서 부증상을 예방하도록 한다. 그러나 진의가 도착하기도 전에 부증상은 세상을 떠난다. 부증상이 쓴 비문은 1955년에 옮겨진 적이 있으나, 그후에 다시 원래의 장소에 세워진다.
결론적으로 숭정자결처는 상징에 불과하다. 후세인들에게 역사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일 그것을 진실로 생각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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