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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숭정제)

숭정제: 강산보다 돈을 중시한 수전노황제

by 중은우시 2008. 12. 31.

글: 유병광(劉秉光)

 

근검절약은 중화민족의 전통미덕이다. 다만, 절약도 지나치면, 변질되고, 경우에 벗어나며, 자잘하게 되고, 인색하게 된다. 그러면, 수전노(守錢奴)가 되는 것이다. 명나라의 숭정제(崇政帝) 주유검(朱由檢)은 역사상 보기 드문 인색한 황제였다. 서예를 연습하면서도, 그는 종이를 앞뒷면 모두 가득 채웠다; 물품을 구입할 때는 사람을 보내어 민간시장에서 가격흥정을 해서 깍도록 했다; 명절때에는 황궁안에 가무연회를 한 적이 없다; 주유검은 즉위한 날로부터 거의 매년 돈없다고 죽는 소리를 했고, 궁중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는 것도 금지시키고, 부녀들이 금관을 쓰는 것도 불허했다. 돈을 쓰라는 것은 숭정제에 있어서 바로 그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았다.

 

천하의 재물을 모두 움켜쥔 황제가 이처럼 소박하고 힘들게 살다니, 성격이 인색한 것 외에도 당시의 상황이 들어올 곳보다 나갈 곳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숭정제가 즉위할 때 경제는 불경기였고, 국력도 쇠퇴하고, 국고도 비어 있었다. 조정의 1년수입은 수백만냥백은에 불과했다. 그러나 매년 지출해야 할 것은 근 천만냥에 이르렀다. 이자성이 북경을 포위할 때, 국고에는 겨우 40만냥이 남아 있었다. 이자성이 태원을 함락시킨 후, 숭정제는 긴급히 오삼계를 북경으로 불러 근왕(勤王, 황제를 보호)하게 하려고 했는데, 호부(戶部)는 100만냥의 군자금조차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오삼계의 근왕은 제대로 이루어지 못하고, 북경성은 위험에 빠진다.

 

조정에 돈이 없었지만, 숭정제가 가진 개인재산인 "내탕(內帑)"은 아주 부유했다.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후, 궁내에서 긁어모은 백은만 3700만냥, 황금이 150만냥, 나머지 보석은 부지기수였다. 이들 개인재산을 숭정제는 자기의 목숨보다 아꼈고, 대명강산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숭정2년, 대신들이 그에게 내탕금을 동원해서 재민구호에 쓰자고 하였다. 그러나 숭정제는 "내탕금이 바닥났다"고 우기면서, 심지어 몇방울의 눈물까지 보였다. 북경이 겹겹이 포위된 후, 그는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배를 굶을지언정, 은자를 꺼내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들이 여러번 그에게 개인재산을 군자금으로 내놓아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대신들에게 자신도 어렵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탕금은 이미 다 써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숭정제는 아이디어를 냈다. 문무백관들에게 무상으로 기부하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국장(國丈, 황후의 부친)인 주규(周奎)에게 국가를 중시하여, 5-10만냥을 내놓아 모범을 보임으로써, 다른 문무관리들이 따르도록 하게 하자고 요구했다. 천하제일부자인 황제조차도 자기의 강산을 지키는데 돈을 내놓지 않는데, 어느 관리들이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돈을 내놓으려 하겠는가? 주규는 집안에 50만냥이나 있었지만, 힘들다고 호소하며 돈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주황후(周皇后)는 할 수 없이 내탕에서 5000냥을 부친에게 건네주었다. 주규는 이 돈에서도 2천냥을 빼고, 3천냥만 내놓았다. 궁안에서 가장 돈이 많은 환관은 자신의 12만냥 재산 중에서 1만냥을 내놓았다. 나머지 부유한 관리들도 모두 돈이 없다고 죽는 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가난한 백성들을 통곡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돈을 내놓았다. 많은 사람은 300냥, 400냥까지 냈다. 북경성의 전체가 모금활동을 벌였지만, 모은 것은 겨우 20만냥이었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북경성이 함락되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필생을 근검절약으로 살아온 숭정제는 자신의 강산을 보위하는데 돈한푼 내놓지 않았다. "사직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황상이 이렇게 신외지물(身外之物)에 인색하는가? 가죽이 없으면 털이 어디에 붙어 있겠는가(皮之不存, 毛將附焉)" 이것은 좌도어사 이방화(李邦華)가 숭정제에게 마지막으로 한 간언이었다. 그의 말은 더 이상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00만냥의 은자를 아끼기 위하여 3700만냥의 은자를 잃어버리고, 자기의 목숨과 가치를 계산조차 할 수 없는 만리강산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쉬울 수 없는 계산법인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공부좋아하기로 이름높은 숭정제는 죽을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