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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등소평)

모택동과 등소평의 모순

by 중은우시 2014. 4. 29.

글: <난망저팔년(難忘這八年)>에서 발췌

 

1975년 정돈(整頓)이 좌절되는 것은, 정돈이 과학기술분야 특히 교육분야에 진입했을 때이다. 이때 모택동은 정돈을 지지하던 태도를 바꾼다. 그와 등소평의 모순은 금방 첨예하게 된다.

 

9월 27일, 모원신은 모택동에게 요녕성의 상황을 보고한다. 담화가운데, 등소평의 주재하에 이루어지는 업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했고, 분명히 '문화대혁명'을 부정하는 차원일 것이라고 언급한다. 9월 28일, 마침 이 담화가 있은 다음 날, 등소평은 수정을 거친 <과학원회보제강>을 모택동에게 보고한다. 모택동은 읽어본 후에 불만을 나타낸다. 그리고 특별히 지적한다. 문건에서 인용한 "과학기술이 생산력이다"라는 문구는 그가 일찌기 얘기한 바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바로 모택동은 등소평이 과학, 교육을 정돈하는 방침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을 때, 10월 15일경, 등소평은 유빙(劉氷)등이 지군(遲群), 사정의(謝靜宜)를 고발하는 서신을 모택동의 책상 위에 가져다 놓는다. 등소평은 이를 통하여 교육의 정돈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결과는 정반대였다. 모택동은 "유빙등이 지군과 소사(小謝, 사정의)를 고발한 것은 동기가 불순하다 지군과 소사를 타도하려는 것이고, 그 창끝은 나를 겨냥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등소평은 유빙을 편든다"고 말한다. 또한 "청화(淸華)와 관련된 문제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고, 현재의 두 갈래 노선투쟁을 반영한다"고 하였다. 바로 모택동이 이런 생각을 형성하고 있을 때, 모원신은 신강에서 경축활동에 참가한 후 북경으로 돌아온다. 11월 2일 오전 모택동의 거처로 가서 당금의 형세를 논하고, 등소평이 주재하는 정돈을 공격하며, 현재는 한 가지 기풍이 형성되고 있는데, '문화대혁명'을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형세는 역전된다. 한바탕 "비등(批鄧),반격경번안풍(反擊右傾飜案風)"이 일어난다. 그러나, 모택동은 등소평을 "여전히 인민내부문제"라고 규정한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지만, 때려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모택동과 "사인방"과의 모순은 이때 약간 완화된다. 다만 모택동은 그들을 다시 중용하지는 않는다. 모택동은 강청에 대하여 여전히 비판적이었고, 왕홍문으로 하여금 다시 정치국의 일상업무를 주재하게 하지도 않았다. 앞에 나서서 "비등,반격우경번안풍"을 주재한 것은 대리총리를 맡고 있던 장춘교가 아니라, 화국봉이었다.

 

1975년, 정돈이 중단되는 운명은 불가피했다. 왜냐하면 '문화대혁명'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문제에서, 계급투쟁을 강(綱)으로 하느냐, 경제건설을 강으로 하느냐의 정치노선문제에서, 무엇이 사회주의이고, 어떻게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이냐는 기본이론에서 등소평은 모택동과 모순과 의견차이가 있었다.

 

첫째, 실천층면에서 '문화대혁명'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등소평이 주재한 75년 정돈은 확실히 총체적으로 '문화대혁명'의 외각을 유지하는 상황하에서, '공업교통, 문예, 과학기술, 군대'등의 방면에서, 부분적으로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반정(反正)을 시도했다. 계속 발전하면 분명히 계통적으로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시정할 것이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것은 모택동이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제출한 평가는 삼칠개(三七開)였다. 70%는 성과이고 30%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11월에 정채국내부에서 등소평을 비판할 때, 모택동은 여전히 등소평이 '문화대혁명'에 대한 결의를 할 것을 희망한다. 그러나 등소평은 원칙문제에서 조그만치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사양하며 말했다. "내가 이 결의를 주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나는 도화원(桃花源)의 사람이다. "부지유한(不知有漢), 하론위진(何論魏晋)"(한나라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데, 하물며 위진에 대하여 논하겠는가?). 이로 인하여 모순은 더 이상 조화될 수 없게 된다.

 

둘째, 노선층면에서 '이계급투쟁위강(以階級鬪爭爲綱)"이나 '이경제건설위강(以經濟建設爲綱)'이냐.

 

등소평은 '삼항지시위강(三項指示爲綱)'을 내세워 삼항지시는 하나의 '전체'라고 강조하고, 도한 '국민경제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 '대국(大局)'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하여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모택동은 등소평을 비판한다. "무슨 '삼항지시위강'이냐 안정단결도 계급투쟁이 없어서는 안된다. 계급투쟁이 강(綱)이다. 나머지는 모두 목(目)이다." 이에 기하여, '사인방'은 등소평의 '삼항지시위강'은 "고의로 안정단결과 국민경제발전이라는 이 '목'에 속하는 것을 '강'에 밀어넣음으로써, 이목난강(以目亂綱), 이목대강(以目代綱)하려 했다"고 비난한다. 기실, 등소평은 계급투쟁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1975년 정돈을 주재할 때, 자산계급에 반대하는 파성을 돌출시키면서 각종 경제범죄와 파괴활동을 타격하고, 이를 통하여 안정단결의 실현과 생산을 이루어내고자 했다. 그는 심지어 원래 허용되는 소위 농촌자본주의경향의 일부 표현에 대하여도 비판한다. 모택동도 경제건설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경제를 잘 해야한다는 요구사항을 내놓았고, 이를 위하여 정돈조치를 하는 것을 지지했고, 여러가지 노력을 진행한다. 문제의 촛점은 사회주의제도가 중국에서 기본적으로 건립된 후, 국내의 주요모순이 여전히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조아계급의 모순이냐는 것이다. 모택동은 사회주의사회에서도 일정한 범위내에서 존재하는 계급투쟁을 확대화 절대화했다. '계급투쟁이 강이다'라는 것은 '팔대(八大)'의 노선과도 배치된다. 그리하여 '문화대혁명'이라는 전체적인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등소평은 나중에 모택동을 비판하면서 말한다: "모택동동지는 위대한 영수이다. 중국혁명은 그의 영도하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중대한 결점이 있다. 사회생산력의 발전을 경시했다. 그가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방법이 맞지 않았다." "사회주의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는데 여전히 계급투쟁이 강이다라고 하고 생산력발전을 경시하고, 문화대혁명은 더더욱 극단으로 몰아갔다."

 

셋째, 이론층면에서 무엇이 사회주의인지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있었다.

 

모택동은 사회주의의 순(純)과 공(公)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사회주의의 부(富)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사(私)가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거나 용납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제도하에서의 상품생산, 화폐교환은 당연히 이루어져야할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제한을 강조했다. 노동에 따른 분배도 충분히 실현되거나 완비되지 못했다. 오히려 제한에 촛점을 맞추었다. '사인방'은 그것을 극단으로 몰고 간다. 상층구조분야에서 '전면전정론(全面專政論)'을 들고 나온다. 경제분야에서는 상품경제, 노동에 따른 분배를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토양으로 보아 반대한다. 생산력을 반전시킨다는 것을 '유생산력론(唯生産力論)'으로 몰아서 비판한다. 등소평은 지적한다. 자산계급을 제한하려면 풍부한 물질기초가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시기의 주요임무는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물질이 극히 풍부하면 비로소 하고 싶은대로 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공산주의원칙 실현할 수 있다. 나중에 그는 더 나아가 강조한다. 빈곤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발전이 너무 늦는 것도 사회주의가 아니다. 평균주의를 취하는 것도 안된다. 하나의 공유제가 주체를 점하고, 하나의 공동으로 부유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근본원칙이다. 등소평은 원래 사회주의에 속했던 것 혹은 사회주의사회가 존재를 허용하거나 발전시켜야하는 것을 자본주의로 보아서 반대하거나 제한하지 않았다.

 

개인미신이 성행하고,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시기에, 등소평은 1975년 정돈을 이끄는 것이 비록 '역사의 필연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지만, 동시에 '이 요구는 실제로 실현이 불가능했다'는 운명도 정해져 있었다. 이것은 모택동과 등소평에 대하여,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에 대하여 모두 하나의 발생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회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