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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등소평)

등소평 일생의 세 부인

by 중은우시 2008. 6. 4.

장석원

 

 

김유영

 

등소평, 탁림의 결혼사진 

 

등소평의 개인생활측면을 얘기하자면, 세번째로 연안에 돌아왔을 때가 가장 큰 수확을 거두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는 평생의 반려자인 탁림(卓琳)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후 두 사람은 58년간의 비바람을 함께 헤쳐나갔고, 함께 정치상의 제2차, 제3차 '추락'과 '재기'의 거센 파도를 견뎌냈다. 등소평은 지난 일을 얘기하지 않으려 했고, 자기의 과거를 말하지 않으려 했으며, 자기의 처에 대하여도 많이 얘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58년간에 이르는 공동생활과정에서 등소평은 탁림에 대하여 상당히 깊은 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강서몽난(江西蒙難)시절 등소평은 탁림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탁림을 세심하게 보살폈다. 힘을 요하는 집안일을 자신이 하는 외에, 매일 탁림의 병이 발작하여 침대에 누워있을 때면, 등소평은 식사와 물을 가지고 가서 그녀를 세심하게 보살폈다. 탁림의 공로에 대하여도 그는 경의를 표시했고, 이런 습관은 그가 국가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습관적으로 지속되었다. 명절때면 요리는 탁림이나 딸의 임무였다. 식사때 등소평은 탁림과 딸에게 포도주를 따라주는 것을 잊지 않았고, "고생했습니다. 명절의 요리사에게 내가 한잔 올립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 속에 이 위인의 자기의 처에 대한 깊은 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1939년 8월, 등소평이 막 연안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직 원래 포경영(蒲瓊英)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나중에 탁림으로 개명하여 그의 평생 반려자가 되는 아가씨를 몰랐다. 장문천(張聞天)의 부인인 홍군전사 유영(劉英)의 회고에 의하면, "등발(鄧發) 등의 동지가 그를 위해서 부인을 찾아주려고 했죠. 거기는 여성동지들이 적지 않았어요. 항전시기이니 많은 여성들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연안으로 왔지요. 섬북공학, 여자대학이 모두 있었어요. 그래서 부인을 찾으려 했고, 탁림이 마음에 들었했지요. 탁림도 아주 젊었고, 괜찮았어요. 섬북공학을 이미 졸업했구요. 그래서 그에게 소개했지요" 당시 등발이 등소평을 데리고 갔다.

 

일부 책이나 극에서는 등소평과 탁림의 만남과 연애를 허구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작자는 좋은 뜻에서 가급적 낭만적으로 썼다. 그러나, 현재의 남녀간의 연애방식을 기준으로 당시의 혁명가들의 마음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유영의 말에 따르면, 등소평은 전방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서둘러 결혼했고, 결혼하자마자 바로 데리고 떠났다. 그래서 중앙에서는 그들을 위하여 결혼식을 준비했다. 이 의식은 아주 간단했다. 바로 양가령의 모주석의 요동 바깥에 있는 언덕에 탁자를 좀 늘어놓았다. 그 곳은 아주 시끄러웠다. 소평 동지와 탁림, 그리고 공원(孔原)과 허명(許明), 두 쌍은 아주 즐거워했다. 비록 의식은 간단했지만, 참석자는 모두 고위층이었다. 모택동과 강청, 유소기, 장문천과 유영, 박고(博古), 이부춘(李富春)과 채창(蔡暢), 왕수도(王首道)등이 모두 참석했다. 주은래는 당시 소련에 병치료하러 갔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들 고위지도자들이 어렵게 전방의 항일전사를 위하여 혼례를 거행해 주었다. 그리하여 간단한 의식과 간소한 술과 요리로는 즐거운 분위기를 맞출 수가 없었다. 유영에 따르면, 술을 많이 권해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공원은 기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취해버렸다. 허명이 그를 원망했다. 그런데, 등소평은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왜 취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많은 술을 그는 한잔, 한잔 다 받아 마셨다.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장문천이 나중에 말해준 바에 따르면 속임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신 것이 모두 맹물이었다는 것이다. 원래 등발과 이부춘이 맹물을 술 삼아 따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랜 친구인 등소평이 결혼식에 술취해 쓰러지지않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결혼때 등소평은 35세이고, 탁림은 23세였다. 며칠후 그들은 함께 전선으로 갔다. 이외에 이들 두 쌍의 신혼부부는 요동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등소평의 두번째 처는 김유영(金維映)이다. 사람들은 아김(阿金)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등소평과 같은 나이로, 1931년 상해에서 알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중순에 그들은 함께 강서의 중앙소비에트구로 파견되어 일하게 된다. 함께 길을 갔고, 나중에 부부로 맺어졌따. 김유영은 일찌기 학생운동, 부녀운동, 노동운동에 종사했다. 그녀는 등소평과 함께 중앙소비에트구로 간 후, 중공 우도현(于都縣)과 승리현(勝利縣)의 현위서기를 맡았다. 두 개 현의 당정군민을 이끌고 경제건설, 홍군확대와 전선지원을 맡았다. 아주 능력있는 홍군여간부였다. 1934년, 홍군의 2만5천리장정에 참가하는데, 홍1군 방면에서 장정에 참가한 수십명의 여전사중 한 명이었다. 1938년 조직에서 그녀를 소련에 보내어 병을 치료받게 한다. 몇년후 그녀는 모스크바 교외의 한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에, 불행히도 사망한다.

 

비록 잘못된 '좌경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결국 등소평과 헤어지기는 했지만, 마음이 넓은 등소평은 여전히 과거의 전우를 잊지 못했다. 1972년 12월, 등소평과 부인 탁림은 자신이 일찌기 생활했고 전투했던 강서남부를 참관한다. 몇 시간을 머무르는 도중에 등소평은 여러번 김유영을 언급했다. 그는 현위의 책임자에게 '소비에트구내의 너희 현위서기는 여자였다. 너희는 아느냐?" 현위책임자는 아마도 사료에서나 마을의 노인에게서 이 일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등소평의 첫번째 부인은 장석원(張錫瑗)이었다. 1907년생으로 등소평보다 3살이 어렸다. 젊어서 그녀는 학생운동에 참가한다. 나중에 당조직에 의하여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보내어져 그 곳에서 공부한다. 그 동안 등소평과 알게 된다. 1928년초에 둘은 결혼한다. 당시, 이들 젊은 혁명부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상해 광서중로의 취풍원(聚豊園)이라는 사천음식점에 모여들었다. 모두 30여명이 참석했는데, 주은래, 등영초, 이유한, 왕약비등 중앙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결혼후, 등소평과 장석원은 반년가량 주은래 부부와 함께 생활한다. 윗층에 있던 등영초는 자주 이들 젊은 부부가 아랫층에서 웃고 떠드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다. 등소평은 나중에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모두 젊었다. 당연히 웃고 떠들지!" 그는 깊이 생각한 것처럼 말했다: "장석원은 드물게 예뻤다"

 

그러나, 불행했다. 1930년 1월, 장석원은 난산으로 병을 얻어 죽고 만다. 난산으로 낳은 딸도 며칠 후에 죽어버린다. 처와 딸의 죽음은 등소평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광서쪽의 상황이 긴급했으므로 등소평은 처와 딸을 자기 손으로 묻어주지도 못하고, 황급히 상해를 떠나게 된다. 19년후, 그가 대군을 이끌고 상해를 점령한 후에, 상해로 들어가자마자 장석원의 묘를 찾았다. 유골을 찾아서 작은 관에 넣은 후, 소조징(蘇兆徵)의 관과 함께 당시 머물던 집의 아랫층에 놔두었다. 역시 묻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다시 유백승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서남으로 간다. 1969년, 장석원의 관은 상해열사능원(현재의 용화혁명공묘)에 묻힌다. 1990년대, 만년의 등소평이 상해로 갔을 때, 여전히 자녀들에게 공묘로 가서 장석원의 묘에 절을 하게 한다. 이로써 볼 때 그가 장석원에게 얼마나 깊은 정을 느꼈던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