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등소평)

덩샤오핑(鄧小平)과 화궈펑(華國鋒)의 대결

중은우시 2011. 12. 28. 00:39

글: 촉인삼지안(蜀人三只眼)

 

1978년의 가을, 덩샤오핑이 원직에 복직한지 이미 14개월이 되었다. 이 날을 위하여, 그는 인욕부중(忍辱負重)하고 구심역혈(嘔心瀝血)하여왔다. 미국의 저명한 기자인 솔즈베리(Salisbury)가 말한 것처럼, "덩샤오핑은 중국정치생활에서의 모든 계모, 책략을 사용하여, 싸우고 투쟁하고 협상하며 격렬하게 논쟁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은 중국이라는 방대한 국가의 역사적 관성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이 때, 중국의 방향을 장악한 사람은 여전히 화궈펑이었다. 대권은 아직 실질적으로 바뀐 것이 없었다. 계급투쟁이 여전히 '기본'이었다. "양개범시(兩個凡是, 무릇 모주석이 결정한 정책은 견결히 옹호한다. 무릇 모주석의 지시는 우리가 그대로 따른다)"가 비록 큰 도전을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류사조였다.

 

그 당시, 널리 알려진 화궈펑의 말은 이런 것이다: "대대손손 영원히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받들자" 등소평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대하여 뭔가 얘기를 해야만 했다. 그는 중국을 미래로 끌고 가면서 무거운 과거의 짐을 지고 갈 수는 없었다. 과거에 대하여 명확히 얘기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도 있고, 권력귀속의 문제도 있다. 앞의 문제는 모택동이 중국인의 정신적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의 것이다. 만일 가능하다면, 그 덩샤오핑은 모주석이 여러번 비판했고 두번이나 타도당한 사람이다. 무슨 이유로 다시 세상에 나타날 수 있는가? 만일 가능하지 않다면, 정신적인 지주가 없는 중국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역량이 있는가 없는가? 뒤의 문제는 '문화대혁명'의 유산이 지금의 권력체계에 미치고 있는데, 절대로 이후 중국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화궈펑과 관련이 된다.

 

"양개범시"에 대한 비판을 화궈펑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는 없을까? 만일 화궈펑과 연결시켜야 한다면, 그의 동의를 받을 수는 없을까? 이런 것은 중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기에,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1990년대 중국사회의 가치관념으로 평가하자면, 역시 오늘 날의 사람들에게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당시에 즉 1978년 가을, 이 문제는 확실히 중국대국의 핵심관건이었다.

 

북경에서 나타난 첫번째 대결은 1977년 봄에 시작되었다.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양개범시"의 보루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마치 계속하여 패퇴하는 것같았다. 반역자의 대오는 날로 강해져갔다. 마치 큰 물이 밀려오는 것처럼. 1978년 여름, 이 큰 물은 중남해의 높은 붉은 담장을 넘어 전중국을 석권했다.

 

얘기하자면 이상하지만, 가장 먼저 그 움직임을 느낀 것은 상당히 머나먼 곳이었다. 대서북(大西北). 6월 25일, 감숙성위 제1서기인 송핑(宋平)은 일군의 이론학자들에게 말한다: "용기를 내서 진리를 추구하라" "이것은 금역이고, 저것도 금역이다라고 하지 말라." 2주가 지난 후, 이 '역류'는 또 다른 머나먼 지방으로 퍼져간다. 동북(東北). 흑룡강성위 제1서기인 양이천(楊易辰)은 그의 부하들에게 "사상해방"을 요구했고, 거의 선동적인 말투로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무슨 말이든지 해라. 머리를 잡지도 않겠고, 모자를 씌우지도 않겠으며, 몽둥이로 때리지도 않겠다. 다시 2주가 지나서, 요녕성위 제1서기인 런중이(任仲夷)는 더욱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는 말했다.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이것은 현재 최대의 "발란반정(拔亂反正)"이다.

 

그후, 서북지역에서 다시 반응이 나왔다. 신강자치구당위 제1서기인 왕펑(汪鋒)이 말했다. "진리의 표준은 단지 사회실천이다." 또한 말하기를, 이 문제를 승인하느냐 마느냐는 것은 "이론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당과 국가의 사상노선, 정치노선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이어서 이 '역류'는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9월상순, 복건성위 서기인 료즈까오(廖志高)가 말했다. 과학이론은 논리로 증면하는 논거이지만, 진리를 검증하는 표준은 아니다. 또 말했다. "당과 국가의 전도와 운명이 관련된 대문제이다."

 

이 말은 놀랄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덩샤오핑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몇몇 성지역의 서기들이 나와서 말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나중에 말했듯이, "논쟁의 상황으로 볼 때, 보면 볼수록 중요했다. 하나의 당,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 만일 본본(本本, 책에 쓰여있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사상이 경직되고, 미신이 성행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생기도 없어진다. 결국 당도 망하고 나라도 망한다." 그는 심시도세(審時度勢)에 능했다. 이때 더더욱 인식했을 것이다. 이 논쟁을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논쟁이 철저할 수록, '범시파'는 더더욱 갈 곳이 없어진다고, 그리고 자신의 이론이 철저하게 새로운 시대의 주료가 될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추가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곳곳에 불을 질렀다."

 

'불을 지른다"는 것을 보자면, 사실상, 덩샤오핑은 17개월전에 이미 시작했다. 1977년 4월 10일, 그는 "완전하고 정확하게 모택동사상을 이해해야한다"고 말한다. 1977년 5월 24일, 그는 다시 말한다. "양개범시"는 안된다. 1978년 5월 30일, 그는 다시 말한다: "현재,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표준이라는 것마저도 문제가 된다. 이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1978년 6월 2일, 그는 말했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가 실사구시를 견지하고, 실제에서 출발하여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려고 하면, 그가 무슨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위반하고, 중앙정신에 위반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제출한 이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이다." 그는 또 말한다: "발란반정은 정신적인 족쇄를 타파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상을 크게 해방시키는 것이다." 1978년 7월 22일, 그는 말한다. 논쟁은 불가피하다. 사람들이 나와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 근원이 바로 '양개범시'이다. 덩샤오핑의 모든 말은 북경의 높은 담장 안에서 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중남해를 나가는 것이다. 이 오래된 도시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는 전용열차를 타고, 황금빛 가을하늘 속에 북방으로 간다.

 

9월 14일, 덩샤오핑 일행은 담담한 아침 속에 길림성 타오라이자오(陶賴昭) 기차역에 도착한다. 흑룡강성위 서기 리리안(李力安)은 이미 기차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행차는 국사의 정해진 절차에 따라 조선을 방문한 후 귀국하는 길에 동북삼성을 시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실 이는 덩샤오핑의 마음 속에 오래 전부터 생각한 행동이었다. 기차는 잠시 멈추었는데, 그는 다시 출발하도록 요구해서, 동북의 흑룡강성 다칭(大慶) 유전으로 갔다. 이어 쉬지도 않고 하르빈으로 갔다. 그의 마음 속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입으로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 많은 좋은 생각이 없다. 그저 되는대로 말해보겠다." 그는 리리안과 물질장려에 대하여 얘기했고, 다칭시위서기인 천례민(陳烈民)과는 외국설비도입에 대하여 얘기했다.

 

9월 16일, 그는 길림성 장춘시에 도착한다. 남호빈관에 들어간 후, 길림성위 서기 왕언마오(王恩茂)가 그에게 말씀을 해달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그가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말을 해버린다. 그는 말했다: "현재 우리의 앞에는 두 가지 문제가 놓여 있다. 첫번째 문제는 이론과 실제의 연계이다. 모든 것은 실제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현재 사람들의 사상이 경직되었다. 뭐든지 위에서 얘기하면 끝난다. 화주석, 어느 부주석이 얘기하면 끝이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소화시키지 않는다..." 이 말은 노골적이면서 날카로웠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덩샤오핑은 더욱 날카롭게 말한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어떻게 모주석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받들 것이냐는 것이다. 이것은 큰 문제이다. 모두 알고 있지만, 과거에 한가지 논의가 있었다. '양개범시'가 아주 유명하지 않으냐? 무른 모주석이 정한 것, 말한 것은 절대 건드릴 수 없다. 무릇 모주석이 한 것이나 언급한 것은 건드릴 수 없다. 이것이 모주석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받드는 것인가? 아니다. 잘못하는 것이고, 모주석을 해하는 것이다. 모주석의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실사구시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당시 세계에서도 없었다. 모주석의 위대한 점이 무엇인가? 바로 중국의 구체적인 조건에 근거하여 혁명의 구체적인 도로를 가르킨 것이다. 만일 실사구시의 기본사상이 없었다면, 이런 도로를 가리킬 수 있었을 것인가? 중국의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는가?"

 

이 말을 마친 후, 덩샤오핑은 장춘을 떠나 심양으로 간다. 이번에 그는 '양개범시'가 진정한 모택동사상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아니라, '양개범시'가 이미 중국의 백성을 못살게 하고 있다고 암시했다. 그는 말했다: "모주석이 우리에게 수립해준 실사구시의 우량한 전통과 기풍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우리의 4개현대화는 희망이 없다" 또한 말했다. "우리는 너무 가난하다. 너무 낙후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인민에게 미안하다. 우리의 인민들은 너무 좋다. 외국인들이 말한다. 중국인들이 도대체 얼마나 더 참을 것인가. 이 말을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인민은 좋은 인민이다. 인내성도 충분하다. 우리는 현재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인민생활조건을 개선시켜야 한다. 그의 이 말은 눈앞의 이들 고관들에게 한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백성들이 들었을 때 더욱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사실상, 덩샤오핑은 확실히 전국이 모두 그에 호응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는 심양군구 사령원 리더셩(李德生)에게 말한다: 나는 곳곳에 불을 붙였다. 여기에소 불을 하나 질렀고, 광주에도 불을 하나 질렀다. 성도에도 불을 하나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