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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국민당의 곡씨(谷氏) 삼형제

by 중은우시 2014. 2. 18.

글: 유계흥(劉繼興)

 

국민당의 "5대", "6대", "7대"회의에서 곡씨삼형제 - 곡정륜(谷正倫), 곡정강(谷正綱), 곡정정(谷正鼎)은 모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삼형제가 동시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된 것은 국민당 역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당시에 이런 말이 유행했다: "국문삼중위(谷門三中委), 송가삼자매(宋家三姉妹)". 장개석은 곡씨삼형제에 이런 대련을 써준 바 있다. "일문삼중위(一門三中委),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

 

곡정륜,곡정강, 곡정정의 삼형제는 귀주 안순대전도 사람이다. 곡씨는 검중(黔中)의 명문집안이고 현지의 유명한 대지주였다. 부친 곡용천(谷用遷)은 청나라때의 거인(擧人)이다. 곡씨삼형제는 장개석의 '문생(門生)', '고리(故吏)'도 아니고, 장개석의 고향사람이거나 좋은 친구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장개석으로부터 중용되고 모두 요직을 맡는다. 곡정륜은 국민당 헌병사령부 사령관으로 10년이나 있었을 뿐아니라, 국민당내에 '헌병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는다. 또한, 감숙성과 귀주성 주석도 지낸다. 장씨왕조의 '봉강대리'를 지낸 것이다. 곡정륜의 동생인 곡정강은 일찌기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부장, 행정원 사회부 부장등의 직위를 지낸다. 곡정륜의 또 다른 동생인 곡정정은 국민당 중앙당정군연석회의 비서장,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장등의 직위를 지낸다.

 

곡씨삼형제는 모두 요직에 있으면서 국민당집권시기에 일세를 풍미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피차간에 왕래는 아주 적었다. 이것은 국민당내의 복잡한 계파투쟁에서, 삼형제가 처한 위치와 직위의 계파가 같지 않았을 뿐아니라, 서로 지나치게 자주 왕래하는 경우 의심을 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곡정륜은 1889년에 태어났고, 자는 기상(紀常)이다. 1905년 귀주육군소학을 졸업하고, 나중에 보정 무차육군중학에서 3년간 공부한다. 이때는 청왕조가 일군의 청년을 선발하여 해외유학을 보낼 때였다. 그는 이를 통하여 일본에 유학을 떠난다. 그는 먼저 동경진무학교에서 기초학업을 마치고, 다시 육군사관학교 포병학교에서 학습한다. 그리고 동맹회에 가입한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한다. 곡정륜은 황흥을 아주 존경했기 때문에, 귀국하여 황흥을 따라 혁명에 참가하여 한양총지휘부 소교부관을 지낸다. 1926년, 국민혁명군 독립이사 겸 1여여단장을 맡아 부대를 이끌고 북벌하여 구강을 함락시킨다. 1927년 3월, 국민혁명군 독립제2사는 남경 우화대고저점령전투에 참가한다. 포병이 여퍼번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한다. 곡정륜은 포병지식이 있으므로 친히 나서서 포를 쏘아 목표를 모두 명중시킨다. 그리하여 남경을 점령하는데 공을 세운다. 남경성을 함락시킨 그날 저녁, 중국과 외국을 뒤흔든 "영안(寧案)"이 발생한다. 일시에 남경의 질서는 혼란에 빠진다. 장개석은 급히 곡정륜에게 제40군 사단장을 맡으라고 명한다. 북벌군이 남경을 점령한 후, 곡정륜은 명을 받아 남경위수사령관이 된다. 1929년, 곡정륜은 남경위수사령부의 명의로 헌병교련소를 설립하여 교장이 된다. 다음 해, 그는 장개석에게 헌병사령부의 성립하고, 헌병교련소를 확충하고, 헌병부대를 확대할 것을 건의한다. 장개석은 그의 제안을 금방 승인한다. 장개석은 곡정륜을 헌병사령관으로 보낸다. 1939년 악상천검수정(鄂湘川黔綏靖) 주임겸 제6전구부사령관이 된다. 호구를 조사하고, 항전후방을 공고히 한다. 1940년, 감숙성 주석 겸 보안사령관이 된다.

 

1946년말, 장개석은 전면내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다시 곡정륜을 남경국민정부 양식부 부장에 임명한다. 1948년, 곡정륜은 귀주성정부 주석으로 옮겨간다. 곡정륜이 귀주성정부의 주석으로 있는 기간동안, 세상에 나온 시간이 가장 늦고 유통기간이 가장 짧은 귀주성이 만든 갑수루은원(甲秀樓銀元)을 발행한다. 이 화폐의 설계는 아주 새롭고 특이했다. 주조는 아주 정교했으며 정면의 중앙에는 귀양의 유명한 갑수루풍경도가 있고, 상환(上環)에는 '중화민국삼삽팔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고, 하환에는 '귀주성조'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누각의 기둥 오른쪽에는 특별히 아주 작은 글자로 '곡(谷)'자를 새겼다. 이 글자는 숨겨져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찾을 수 있다. 이 '곡'자는 곡정륜이 고심하여 넣은 것이다. 그 목적은 자신의 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검중 심지어 중화대지에 이 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이다. 이 은원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아주 적어서 진귀한 유물이 되었다. 현재는 대형 은화경매회에서나 나오고 있다.

 

1949년 년초, 장개석은 운남성주석 노한(盧漢)이 반기를 들려 한다는 조짐을 알게 된다. 그리서 중경에서 급히 곡정륜을 만나고, 그를 "천검원진군총사령"에 임명한다. 곡정륜이 나광문(羅光文)의 16병단과 19병단을 이끌고 노한을 공격하라는 것이다. 곡정륜은 이 임무를 맏고는 황공하여 귀양으로 돌아간다. 그는 갑수루에서 풍성한 주연을 베푼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그는 말한다. "나는 이 일생에 세 가지 자랑할만한 일이 있다. 하나는 내가 중학졸업때 성적이 1등이었다는 것이고, 둘은 남경우화대에서 손전방, 장종창을 칠 때, 내가 크게 실력을 보였다는 것이고. 셋은 이번에 위원장의 명으로 운남을 지원하러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상 운남인은 우리 귀주인을 쳐왔다(신해혁명때 운남군벌이 3번이나 귀주로 침범해 들어간 일을 가리킴). 이번에는 내가 그들을 잘 수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노한이 교묘하게 응대하는 바람에, 운남의거는 성공을 거두고, 곡정륜의 운남을 치려는 꿈은 성공하지 못한다.

 

1949년 11월, 중국인민해방군이 귀양에 다가간다. 곡정륜은 혼자서 곤명을 거쳐 홍콩으로 가고, 다시 대만으로 간다. 1950년에 대만총통부 국책고문이 된다. 1953년 11월, 곡정륜은 위암으로 대만에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총재를 따른지 삼십여년이다. 큰 신임을 받았지만, 대륙을 반공하지 못하였으니 죽어도 유감이다." 장개석은 그에게 깊이 세번 허리를 숙이고, 그가 '충성애당(忠誠愛黨)'했다고 칭찬한다.

 

둘째동생 곡정강은 1902년에 태어나고 자는 숙상(叔常)이다. 1921년에 베를린공업대학에 입학하여 기계공학을 공부한다. 다음 해 2월 베를린대학 철학과에 들어갔다가 다시 정치경제를 전공한다. 1924년 국민당에 가입하고, 다음 해 베를린대학을 졸업한다. 15년(1926년) 국민당 중앙의 명을 받아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쑨얏센대학에서 교육을 받는다. 1931년 국민당 4대 중앙위원에 당선되고, 중앙조직부 부부장이 된다. 1938년, 실업부 상무차장이 된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군사위원회 제5부 부부장이 되어 사회업무를 책임진다. 1938년 국민당 절강성당부주임위원 겸 제3전구 정치부 주임이 된다. 같은 해 3월 다시 중앙조직부 부부장으로 돌아온다. 1939년 행정원 사회부 부장이 되고, 같은 해 6월 사회부 부장의 신분으로 배도(陪都, 중경)구호위원회 부위원장이 된다. 중경에 있는 동안, 일본비행기가 미친 듯이 중경을 공습한다. 그는 친히 공습복무총대 대장이 된다. 일본이 투항한 후, 접수위원회 부주임을 겸임한다. 1945년 9월 9일, 남경에서 하응흠이 장개석을 대표하여 주재한 일본군항복의식에 참가하여, 일본의 '중국파견군' 총사령관 강촌녕차(岡村寧次)가 바친 '투항서'를 접수한다.

 

1948년, 곡정강은 행정원 정무위원 겸 사회부장이 된다. 1949년 3월 경호항총사령부 정무위원회 상무위원이 된다. 5월, 해방군이 상해를 함락시킬 때, 곡정강은 국민당군을 따라 주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만 까오슝으로 간다. 1950년 1월 타이페이에서 내정부 부장이 되고, 같은 해 3월, 사임하고 대만 '총통부 국책고문'이 된다. 1952년 10월 국민당 7대에 중앙상무위원이 되고, 13대이후 중앙평의위원회 주석단 주석으로 옮긴다. 1966년 헌정연토위원회 부주임이 되어 타이페이에서 개최된 세계반공연맹대회에서 이사회 주석이 된다. 그후에 종신명예주석을 맡는다. 1993년 12월 곡정강은 타이페이에서 별세한다. 그는 곡씨삼형제중 가장 늦게 사망한 사람이다.

 

셋째 동생 곡정정은 1903년에 태여난다. 자는 명추(銘樞)이다. 일찌기 귀양성립초급사범학교에 들어가고, 5.4운동때, 귀주학생연합회 주석이 된다. 1924년 국민당에 가입하여 독일학생총회 집행위원, 국민당 주독지부집행위원, 상무위원, 감위회 주석이 된다. 1925년 독일 베를린대학을 졸업하고,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으로 가서 공부한다. 1927년 귀국후 국민혁명군 제16군정치부 주임, 당대표를 맡는다. 나중에 국민당 중앙선전부 비서, 중앙위원회 설계위원, 국민당 북평특별시당부위원 겸 상임위원등이 된다. 1945년후, 국민당 중앙당정군연석회의 비서장,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장등의 직위를 지낸다. 1949년 대만으로 간다. 1952년 국민당 중앙평의위원회 위원이 된다. 1974년 11월 곡정정은 병으로 대만에서 사망한다.

 

그외에, 국민당 역사상 또 한명의 "활염왕(活閻王)"이라는 별명을 얻고 평생 특무활동을 한 곡정문(谷正文)이 있다. 이름만 보면 곡씨삼형제와 혼동하기 쉽다. 곡정문의 본명은 곽동진(郭同震)이다. 산서 분양 노가장 사람이다. 곡정문은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한 후, 장개석의 중용을 받는다. 그는 중국대륙에 침투, 전복시키는 업무를 맡는다. 주은래를 암살하기 위하여, 그는 저명한 '케시미르공주호'사건을 기획하기도 한다. 그외에 그는 이등휘와도 악연이 있다. 1995년 곡정문은 회고록 <백색공포비밀당안>을 출판하여 여러 역사적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그는 4번 결혼했고, 자녀가 적지 않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떠난 후 2997년 1월 25일 타이페이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