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적사(章迪思)
관료사회의 풍운은 예측불허하다. 관료로서 선시선종(善始善終)하기는 실로 쉽지 않은 일이다. 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의 안영은 3명의 국군(國君)을 보좌하며, 비록 기복은 있었지만, 그의 60여년의 정치생애를 개괄하면, 정계 '오뚜기'의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정치 '비결'은 현재에도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
제경공(齊景公)이 즉위한 초기, 안영은 재상에서 쫓겨나 동아(東阿, 지금이 산동성 아성진)를 다스리러 내려간 바 있다. 이 기간동안 제경공은 안영에 대한 나쁜 말을 많이 듣는다. 그리하여 문책절차를 개시하여, 그를 경성으로 소환한다. 안영은 한편으로 반성문을 쓰면서 한편으로 요청한다. "신에게 다시 한번 동아를 다스릴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신은 반드시 전하께서 저를 칭찬하는 말을 듣도록 해보이겠습니다."
제경공이 동의한다. 과연 안영은 약속한 바대로, 2,3년만에 호평이 넘쳐나게 된다. 제경공은 아주 기뻐하며, 다시 안영을 불러서 그를 표창했으나, 안영은 이를 받지 않는다.
안영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말한다: "신이 이전에 동아를 다스릴 때는 백성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습니다. 자연히 평소에 백성들을 착취하던 귀족과 토호들에게 밉보히게 됩니다.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면서 죄인들을 처벌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뒤의 가족들에게 욕을 얻어먹게 됩니다. 이들은 나를 미워했고, 자연히 유언비어를 퍼트려 나를 비방했습니다. 대왕께서 들은 후 자연히 신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이번에 동아를 다스릴 때는 거꾸로 했습니다. 원래 신에 대하여 나쁘게 얘기하던 사람들은 자연히 다시 신을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대왕은 상을 내려야 할 때는 상을 내리지 않으시고, 징벌을 해야할 때 징벌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신은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제경공은 그의 말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바로 국정을 안영에게 맡긴다. 마침내 제나라는 제환공이 칭패한 후 100년만에, 제2차 '중흥'을 실현하게 된다.
안영의 간언은 하나의 예술이다. 그는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을 때 바로 직언으로 항쟁하지 않고, '나는 백성을 위하여 일하다가 억울하게 욕을 먹는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떠들지 않았다. 오히려 행동으로 사리로 보여주면서 교묘한 방식으로 제경공이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간언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관료로서 60여년간 있으면서 선종할 수 있었던 비결일 것이다.
교묘하게 간언하는 외에, 안영은 사람됨이 방정(方正)했다. 그것도 아마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안영의 청렴에 대하여, 태사공은 "식불중육(食不重肉), 첩불의백(妾不衣帛)"이라고 평가했다. 고대에는 그렇게 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사마천은 몰랐을 것이다 지금은 관리가 청렴한지 아닌지를 따질 때 자동차와 주택이 호화스러우냐 아니냐로 따지고 기준을 넘어섰느냐 아니냐로 따진다는 것을.
안영이 세번째로 재상에 임명되었을 때, 이미 나이 70에 가까웠다. 다만 타는 마차는 아주 낡았다. 손잡이에는 난간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마차를 끄는 말은 늙고 말랐다. 그의 저택도 낮고 협소했다. 그의 높은 직위와는 들어맞지 않았다. 제경공이 이를 보고 그냥 넘기지 못한다. 여러번 그에게 주택과 마차의 조건을 개선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안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경공은 공금으로 안영에게 호화마차를 하나 선사한다.
이 마차는 얼마나 호화스러웠을까? 공간이 넓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덮개, 주렴을 모두 귀한 비단으로 했다. 8필의 큰 말이 끌었으니 오늘날로 따지면 "BMW"쯤 되는 셈이다.
이 차는 대부 양구(梁丘)가 제작과 교부를 책임진다. 제조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교부할 때 골치가 아프게 된다. 그는 제경공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승상이 하사품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너는 다시 한번 보내주어라. 그리고 내가 말한 것이니 그가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말해라." 양구는 다시 한번 마차를 끌고 승상부로 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 다시 보고한다: "전하의 말씀만으로는 안되겠습니다. 승상은 그래도 받지 않습니다."
제경공은 화가 났다. 자신의 말도 통하지 않다니.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손으로 문서를 써서 양구에게 다시 가라고 한다. 그러나 안영은 시종 이 호화마차를 받지 않는다.
제경공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안영이 외국에 사신으로 나간 틈을 타서, 사람을 시켜 안영의 저택을 호화주택으로 확장공사한다. 안영이 귀국한 후에 원래의 주택이 보이지 않고, 주택의 옆에 있던 채소시장도 사라진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사람을 시켜 저택 바깥의 추가로 점거한 건물과 담장을 철거하게 하고는 채소시장을 부활시킨다. 그리고 강제철거당한 상인들에게 상응한 보상을 한다.
안영은 일생동안 근검절약하고, 청렴하게 살았다. 이는 그가 완곡하게 제경공에게 한 말과 같다: "만일 제나라에 의복 하나라고 한다면, 전하와 저는 이 의복의 '영(領, 깃)'과 '수(袖, 소매)'입니다. 만일 전하와 제가 위에서 호화주택에 살고, 호화마차를 탄다면, 윗사람이 하는대로 아랫사람이 할 것이고, 분명히 사치의 기풍이 생길 것입니다."
중국역사상 신하가 국군의 뜻에 따라서 그에게 맞추고,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 총애를 받고 승진한 사례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리고 국군의 뜻에 어긋나게 직언하거나 백성을 위하여 나서다가 파직되거나 좌천되거나 심지어 목이 잘려나간 사레도 역시 많다.
그러나, 안영은 평생동안 국군을 보좌하고 국군에게 간언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지만, 관운은 형통했다. 그 이치는 한 마디로 말해서, 군신관계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것이다. 군신은 관점, 개성, 기호등의 발면에서 서로 다르다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소위 '군주는 달지만 신하는 쓰고, 군주는 담백하지만 신하는 짜다"는 것이다.
어떻게 영도와 함께 지낼 것인가는 고금이래로 모든 관리들의 난제이다. 구동존이(求同存異). 같은 점을 추구하고 다른 점은 놔둔다. 이것은 말로는 쉽지만 해내기는 어렵다. 어떤 관리들은 이것때문에 영도에게 밉보여서 배척을 당하고 관운이 날라가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안영을 배워서 '화이부동'의 법을 익히는 것이 낫다. 여러 각도로 여러 층면으로 생각하여 서로 같이 지낼 도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당연히 안영이 관료로서 선종할 수 있었던 것에는 제경공이 상대적으로 개명했던 이유도 있다. 군주는 당연히 언로를 넓히고,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하 및 부하의 말을 모조리 다 들을 수는 없지만, 절대로 막고서 듣지 않으려 해서는 안된다. 즉, "사람이 병에 걸리려면 먼저 고기의 맛이 달게 느껴지지 않고, 나라가 망하려면, 반드시 충신의 말을 듣기 싫어하게 된다"는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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