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관중(管仲)의 양면성

중은우시 2014. 3. 2. 22:25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고, 인생에도 정반 양면 즉 공덕과 죄과가 있다. 예를 들어 진시황의 경우에도 중국을 통일하여 '천고일제'로 불리지만, 그는 분서갱유를 하여 '폭군'의 으뜸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공적과 죄과는 모두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예외이다. 그는 바로 춘추시대의 관중이다. 사람들은 왕왕 그의 인생의 광채만을 얘기하지, 그의 또 다른 일면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관중은 제환공의 상국(相國)이다. 사람들이 열거하는 역대명상에 그는 항상 앞자리를 차지한다. 후세에 공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대신이라면 모두 그를 모범으로 삼는다. 이를 보면 그가 역사에서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은 제환공이 그에 의지하여 패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제환공이 '패주의 신분으로 여러번 제후와 회합하고 천하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 관중의 지헤이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더더욱 이렇게 말한다. 만일 관중이 없다면, 중국문명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제갈량이 자신을 관중에 비유한 것이다. 후세에 관직에 나가는 사람은 모두 그와 같은 정치적 업적을 남기기를 희망했다. 그는 일생동안 군주의 신임을 받았고, 한번도 좌천되거나 유배가거나 시기를 받은 바 없다. 그가 죽을 때까지. 제환공은 죽을 때도 그에게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부탁한다. 신하로서 이런 정도에 이른다는 것은 극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관중은 탐욕스러웠고, 겁이 많았으며, 보수적이고 아주 호화사치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약점에 대하여 언급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은 또한 무슨 이유에서일까?

 

제나라에는 포숙아(鮑叔牙)가 있고 그는 관중과 친구였다. 관중이 이 사업을 성취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포숙아에 의지한 덕분이다. 다만, 이 두 사람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함게 장사를 했고, 번 이윤을 나누는데 있어서, 관중이 항상 더 많이 가져갔다. 누군가 관중의 이런 행태는 탐욕스러운 것이라고 말했으나, 포숙아는 오히려 그를 위하여 변명해준다. 관중은 집안이 가난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기실, 이런 일은 포숙아로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따지지 않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관중으로서는 확실히 탐욕스러운 것이다. 고인들에게는 '안빈낙도'라는 말이 있고 사람들이 재물과 이익을 대할 때, "군자는 재물을 좋아하지만, 그것을 취하는데는 도리가 있다"라고 하였다.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익을 탐하는 것은 어떻게 좋은 말로 감싸더라도 역시 재물을 취하는 고대의 도리에는 맞지 않는다. 더더구나 인생의 미덕도 아니다.

 

관중은 좋은 병사도 아니었다. 그는 일찌기 여러번 전투에서 도망친 바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가 담이 작고 겁이 많다고 비웃었다. 포숙아가 나서서 대신 변명한다. 관중은 집안에 봉양해야할 노모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그가 담이 작고 겁이 많은 것은 아니라고. 부득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이런 일들을 얘기하자면 약간 복잡하다. 고금에 모두 효도를 중시했다. 특히 모친이 나이들면 더더욱 봉양해야 한다. 이것 자체는 무슨 잘못이 아니다. 다만, 관중은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는 없다. 전쟁은 비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결이다. 네가 도망치면, 전체에서 결손이 생기는 것이고, 더 많은 위험을 다른 사람에게 안긴다. 다른 사람은 집에 모친이 없단 말인가? 전쟁의 패배로 인한 재앙은 백성들이 당한다. 손실을 입는 것은 국가이다. 이런 국가와 집안, 충과 효의 관계에 대하여 고대인들은 여러 가지로 논술했다. 여기서 굳이 더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이런 효도는 사람들이 본받거나 존경할만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제양공은 황음무도했고 말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손무지에게 죽임을 당한다. 어떤 사람이 공손무지에 원한을 가지고 있어 군주를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에 올랐다는 죄명으로 그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공자들 가운데 새로운 군주를 뽑아달라고 한다. 제양공이 황음무도하였으므로, 그의 두 동생은 연루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각각 다른 나라로 도망친다. 공자규(公子糾)는 그의 모친의 나라인 노나라로 도망치고, 그를 보좌하던 것은 소홀(召忽)과 관중이었다. 공자소백(公子小白)은 거국(莒國)으로 도망친다. 그를 보좌한 것은 포숙아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제나라에는 내란이 일어났고, 공손무지가 얼마후 다른 사람에게 살해된다.

 

제나라에는 일시에 군주가 없게 된다. 제나라의 고(高), 국(國) 두 상경(上卿)은 앞다투어 암중으로 거국에 사람을 보내어 소백을 불러들여 그를 새로운 군주로 세우고자 한다. 노나라는 스스로 군주에 오른 공손무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병력을 보내어 공자규를 호송하여 제나라로 돌려보낸다. 소백이 이미 길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거국이 제나라와 가까웠다. 그래서 관중은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 공자소백을 저지한다. 길에서 서로 만나서 관중은 활에 화살을 놓고 당겨 소백을 향해 쏜다. 소백은 화살 맞는 소리와 함게 바닥에 쓰러진다. 관중은 소백이 이미 죽었다고 여기고, 사람을 노나라와 공자규에게 보내어 보고한다. 이렇게 하여, 공자규를 호송하던 군대는 속도를 늦추게 된다. 육일만에 비로소 제나라에 도착한다. 그러나 공자소백은 의대구(衣帶鉤)에 맞았을 뿐이다. 그래서 죽은 것처럼 관중을 속인 다음 빨리 제나라로 들어간다. 고, 국 두 대가족의 옹호하에 국군에 등극한다.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즉위후 제나라는 즉시 군대를 보내어 노나라군대를 저지하고 패배시킨다. 노나라에게 공자규를 죽이도록 핍박한다. 당시 상류사회의 관념으로라면 '주군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는 것이다. 공자규가 피살되면, 그를 보좌하던 사람들은 더더구나 세상을 살아갈 염치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소홀은 자결한다. 제환공은 관중에 그에게 활을 쏜 원한이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노나라에 관중을 살아있는 채로 제나라에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 후에 그를 육장으로 만들어 원한을 풀고자 한 것이다. 노나라사람들은 할 수 없이 관중을 구금하고, 수거(囚車)에 태워서 그를 제나라로 압송한다. 이 때, 관중의 지혜가 충분히 발휘된다. 그는 자신이 보좌하던 사람이 소백의 정적인 공자규인데다가, 자신과 소백과는 '화살을 쏘고 맞은' 원한이 있어 제나라로 돌아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알고 있었다. 포숙아가 있으면, 귀국후에 그는 반드시 중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거는 아주 천천히 갔다. 관중은 노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바꿀까봐 우려하여, 차부(車夫)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어, 수레를 끌면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렇게 되니 차부들이 피로를 잊었고, 수거는 빨리 달렸다. 노나라사람들이 뒤쫓아 왔을 때는 이미 제나라에 들어간 다음이었다. 포숙아와의 관계가 있어 제환공은 관중이 화살을 쏘았던 죄를 용서해준다. 서로 간에 얘기를 나눈 후에, 제환공은 그의 재능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즉시 그를 상(相)에 앉힌다. 그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기 위하여, 국인들에게 그를 중부(仲父)라 칭하도록 명한다. 그후 40여년간, 제환공은 관중을 계속하여 신뢰한다.

 

여기서 설명해야 할 것은 소홀을 자살로부터 제나라가 사람을 내놓으라고 할 때까지는 하나의 과정이 있다. 관중은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충의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중 자신도 말한다: "공자규의 실패로 소홀이 그를 위하여 순국하고, 나는 구금되는 굴욕을 당했다. 포속아는 내가 염치없다고 여기지 않았다. 나는 작은 과실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공명을 천하에 날리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관중의 여러가지 행위가 그다지 영광스럽지 않기 때문에, 그는 '나를 낳은 자는 부모이고, 나를 알아주는 자는 포숙아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관중은 또한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다. 원래 그가 막 상국이 되었을 때 제나라에 대하여 대담한 개혁을 벌인다. 제환공은 바로 이들 개혁의 성과에 덕을 봐서 천하의 패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왕자성부(王子成父), 습붕(隰朋), 영척(寧戚)등의 사람을 추천하여 나라를 다스린다. 다만 40년후, 관중이 죽을 때, 제환공에 그에게 그를 대신하여 상국을 맡을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관중은 아무도 추천하지 않고 그저 한 마디 "신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군주입니다"라는 말로 대신한다. 이것은 충분히 설명한다. 관중은 이미 개혁가에서 보수파로 바뀐 것이다.

 

40여년간 상국으로 지내면서, 관중이 부귀한 정도는 국군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화려한 삼귀대(三歸臺)와 국군의 연회설비를 갖춘다. 이들 시설과 설비는 절대로 그냥 보기만 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이를 보면 관중의 일상생활이 얼마나 호화사치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개혁후의 제나라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칭패후의 제나라는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였다. 그의 부귀를 국군과 비견할 수 있다는 말은 제나라의 국군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외에 다른 나라의 국군들은 그와 비교되지 않았을 것이다. 관중이 생활했던 그 시대에 비록 "예악이 붕괴"되었지만, 어느 정도 예의를 중시했다. 관중 자신도 '존왕양이'의 구호를 제창했었지 않는가.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호화는 초호화이고 그의 사치는 초사치이다.

 

관중에게는 떳떳하지 못한 점이 있는데, 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지 않았을까? 후세의 사람들도 그를 본받으려 했을까? 이것은 바로 관중의 개혁은 부국강볍을 위한 것이고, 민중이 부유한 기초위에서 국가의 강대함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책은 민중의 옹호를 받는다. 그리고, 관중은 비록 국군에 비견할 정도로 부귀했지만, 그는 제환공의 앞에서 예의에 벗어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꺼이 보좌하는 지위에 만족했다. 이것이 바로 당세와 후세에 그를 문제삼지 않는 원인중 하나이다. 당연히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일생동안 한 공적이 그의 나머지 부정적인 면을 덮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일준차백추(一俊遮百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