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1644년, 이자성이 북경성을 함락시키고, 숭정제는 자살순국하며 명왕조는 멸망한다. 그후, 오삼계는 산해관을 만청에 바치고, 만청은 중원으로 들어와서 주인이 된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흥한다.
명왕조 중말기때 경제, 과기, 문화, 사상과 대외교류의 발전에 따라, 중국은 다시 한번 자본주의의 맹아가 나타났고, 명말때의 중국은 기실 봉건제도가 멸망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맹아상태에 처해 있어 사회전환의 십자로에 있었다. 봉건제도가 명나라말기가 되면서, 중국은 이미 1800년을 거쳤다. 진나라는 그것을 흥기시켰고, 한나라는 그것을 흥성시켰고, 당나라는 그 최고봉을 이루고, 명나라는 쇠락했다(기실 일찌기 양송때부터 이미 쇠락했다. 비애의 양송번성이었다.) 1640년,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난다. 서방의 각국은 자본주의의 길을 걸으며 나날이 새로워졌다. 1644년, 만청이 산해관을 들어왔고, 중국은 다시 원래 다시 돌아가서는 안되는 봉건주의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268년간이나 지속되었다.
1천여년을 겪은 후, 명왕조가 되었을 때, 봉건제도는 이미 아주 완벽하고 성숙하게 발전하였다(비록 그것이 이미 이 시대에 낙후되었지만). 그러나 입관전의 만청은? 당시는 노예사회말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렵으로 살아갔다. 그저 간단한 언어와 문자만 있었다. 무슨 사상, 과기, 문화, 경제를 얘기할 수는 없었다. 입관후, 명나라는 원래의 그 봉건제도는 이미 세계에서 낙후되었다. 다만, 만청에 있어서는 아주 선진적이고 아주 완벽했다. 그래서 나래주의(拿來主義)로 하나하나 모두 본받았다. 그래서 청승명제라는 말이 나왔다.
"청승명제"? 기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이 대청왕조의 낙후에 대하여 비난받다가 찾아낸 억지스러운 핑계였다: 중국은 명나라때부터 세계에서 낙후되었다. 대청입관후에 명나라의 규장제도를 계승하고, 명나라는 대청에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사회제도를 물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청의 낙후는 명나라의 낙후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정말 "청승명제"인가?
먼저 "내각(內閣)"을 보자. 당조 주원장은 황제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하여, 재상을 폐지하고, 내각을 설립했다. 내각관리는 일정한 권력이 있다. 다만 관직의 직급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내각"제도의 계속적인 발전과 완비로 명왕조 중후기때가 되어서는 내각의 권력이 이미 이전의 재상을 초과했고, 황제의 언행도 제약을 받을 정도였다. 만일 내각이 동의하지 않으면, 황지의 지시도 집행될 수도 없었다. 항상 사람들은 만력제가 20년간 조회에 참석하지 않은 일을 얘기한다. 그러나 완벽한 내각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일을 관장하지 않아도 국가는 정상적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것은 나중의 서방의 군주입헌제와 얼마나 비슷한가. 황제는 그저 상징이다. 크고 작은 일은 모두 내각이 결정했다.
그러나, 대청왕조는 어떠했는가? 비록 고양이를 보고 호랑이를 그리는 것처럼 "군기처"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전화통(傳話筒)에 불과하다. 그저 "누차이(奴才)는 명을 받들겠습니다(遵旨)." "황상성명(皇上聖明)"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때, 대신중에 몇 명이 감히 황제와 국가의 노선, 방침, 정책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던가? 모든 것은 황제 한 사람이 결정하면 그만이었다. 20년 부상조(不上朝)가 아니라, 20일 부상조만 해도 아마 청나라는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이백여년간, 대청은 방현령, 위징, 왕안석, 범중엄, 장거정, 해서와 같은 명신, 명상이 나온 적이 있던가?
"폐관쇄국(閉關鎖國)"? 어떤 사람은 대청조의 "폐관쇄국"은 명나라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기실 명나라에서 진정 폐관쇄국한 것은 주원장이 통치한 그 30여년이다. 그때는 명왕조가 막 건립되었고, 국가의 안정을 유지보호하기 위하여 "해금(海禁)"을 실행했다. 이것은 이해할 만한 조치이다. 그러나 국가가 안정된 후 1405-1433년, 정화는 방대한 함대를 이끌고 7차에 걸쳐 하서양(下西洋)한다. 비록 절후(絶後)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공전(空前)이라고는 할 만하다. 영선(永宣)이후, 비록 함대가 멀리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관방의 대외내왕을 중단시킨 것이고, 민간의 해외무역과 거래는 정지되지 않았었다. 경륭(慶隆)개관이후, 명나라의 해외무역과 문화교류는 더욱 사상유례없는 번영을 이루었다. 대량의 백은은 무역의 방식을 통하여 중국에 대량 유입된다. 그 총량은 3억냥이상이다.
청나라를 돌아보면, 그것은 진정한 폐관쇄국이었다. 천조상국으로 자처하며, 서방의 선진적인 사상, 과기, 문화를 보고도 못본척했다. 우물안 개구리로 야랑자대(夜郞自大)한 것이다. 이백년간 사상, 과기, 문화등 방며에서 여하한 진보도 없었을 뿐아니라, 오히려 많은 명나라에서 이미 있던 것들도 대청조에서는 '실전(失傳)'되었다. 만청입관때부터 아편전쟁때 영국인이 튼튼한 전선과 날카로운 대포를 이용하여 국문을 열여제칠때까지, 이백년동안 배는 전혀 바다로 나갈 수가 없었다.
"문자옥(文字獄)", 어떤 사람은 대청조의 '문자옥'도 명왕조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문자옥은 어느 정도 역대 왕조에 다 있긴 했다. 명왕조에도 확실히 많은 '문자옥' 원안(寃案)이 있었다. 다만, 이들 '문자옥'은 절대다수가 명초 주원장이 통치하던 삽십여년간에 일어났다. 그후, 명조에 몇 번이나 '문자옥'이 있었던가? 명무종이 반란평정을 핑계로 강남으로 내려가겠다고 하자, 거의 언관들의 침에 빠져죽을 정도였다. 가정제도 해서에 의하여 욕을 먹어 구혈림두(狗血淋頭)했다. 만력제는 태자를 세우기 위하여 대신들과 십여년을 싸웠다. 그러나, 국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 만다. 명나라의 황제들은 명성이 대부분 좋지 못했다. 아마도 그들은 확실히 과실이 있었다. 단 최소한 한 가지는 설명해준다. 명나라의 대신들은 황제를 욕할 수 있었다!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그러나 청왕조는? 순치, 강희, 옹정, 건륭의 4황제때, 150여년의 시간을 지속하며 계속하여 이어졌다. 그러나 대청왕조의 입국은 268년에 불과하다. "문자옥"의 양이나 질에 있어서, 명왕조는 청왕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청왕조의 강희, 옹정, 건륭이 중국고대의 문자옥에서 최고봉을 이룬다. 한마디 "청풍불식자(淸風不識字), 하고난번서(何故亂翻書)"로 온가족이 멸망했다.
"팔고문(八股文)". 어떤 사람은 대청조의 "팔고문"도 명나라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주원장이 사람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팔고문". 그러나 "팔고문"이 사상과 문화의 발전에 불리했지만, 대청조는 왜 "팔고문"을 페지시키지 않았던가? 왜 보배처럼 2백년간이나 써왔는가? 다시 말해서 마찬가지로 "팔고문"으로 시험쳤지만, 명왕조는 양사기, 양포, 양영, 서계, 장거정과 같은 정치가를 배출해 냈고, 서광계, 송응성, 조사정, 왕징, 방이지, 이시진과 같은 과학자도 배출했다. 왕양명, 왕부지, 이지, 황종희, 고염무와 같은 사상가도 배출했다. 그러나, 대청조는? 몇 명의 정치가, 과학자, 사상가를 배출했는가? 이렇게 하면 명왕조의 "팔고문"은 청왕조의 "팔고문"과 같은 것이 아닌 것같다. 최소한 성과는 달랐다.
등등...
청승명제? 그것은 양두구육의 진실한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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