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법률/법률이야기

해치(獬豸): 법률을 상징하는 신기한 독각수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유전(劉典)

 

 

 

한국의 수도인 서울은 한자명칭을 "한성(漢城)"에서 "셔우얼(首爾)"로 바꾸고 난 후에도 중국문화의 흔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같다. 2008년에 확정된 도시상징물 '해치'는 일찌기 한국전문가, 학자들에 의하여 '상징물이 중국에서 온 것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렇다면, '해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가?

 

해치는 "해치(解)" 혹은 "해치(解豸)"라고도 부른다. 중국고대전설에 나오는 상고의 신수(神獸)이다. 체형은 큰 것은 소만하고, 작은 것은 양만하며, 기린과 유사하다. 온 몸에는 짙은 검은 털이 나 있고, 두 눈은 아주 밝고 빛난다. 이마에는 통상적으로 뿔이 하나 나 있으며, 속칭 '독각수(獨角獸)'이다.

 

해치는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사람을 안다. 중국고서에서 자주 보이는 신수의 일종으로 시비곡직을 판단할 수 있다. 한나라 양부(楊孚)의 <이물지(異物誌)>에는 해치의 특성을 가장 대표적으로 개괄하고 있다: "성격은 곡직을 구분한다.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을 뿔로 부딛친다. 사람이 다투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문다." 그 뜻은 해치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어,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뿔로 틀린 사람을 부딛치고,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입으로 잘못된 측을 문다는 말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선진의 관리가 소송에서 판결을 내릴 때, 해치를 써서 그 중의 시비곡직을 판단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제요(帝堯)시대의 형관(刑官) 고요(皋陶)이다. 전설에 따르면 고요는 해치를 길렀고, 판결하기 어려운 사건이 생기면, 해치로 하여금 결정하게 했는데,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고대에 해치는 공정한 법집행의 화신이 된다.

 

선조들은 '법(法)'자를 만드는데, 그 연원은 아주 지혜롭고 신화적인 색채가 있다. 고대에는 현재의 '법'자를 "법()"자(로 썼는데, 거기에 숨은 뜻은 깊은 의미가 있다. 글자의 구조로 보면, "법()"자의 왼쪽은 삼수변이다. 이는 법이라는 것이 물처럼 공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法平如水). 오른쪽은 "치()"의 아래에 '거(去)"자를 두었다. '치'는 곧 신수 해치를 말한다. '치'를 '법'자의 일부분으로 삼은 것은 바로 '해치'가 시비곡직을 판단한다는 법률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그리하여, 해치는 한자문화에서 '법'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다. 그후 여러 방면의 문화영향으로, 해치는 고대에 법률을 상징하는 지위를 이런 식으로 얻게 되었다.

 

나중에, 글을 쓰기 편하고 기억하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치'자는 '법(()"자에서 사라지고, 간략하게 "법(法)"으로 쓰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상징하는 중국법률의 전통문화는 그렇다고 하여 소멸되지 않았다. 해치는 중국 고대법제사상 여전히 비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전통법률의 상징으로서, 해치는 역대왕조의 숭상을 받아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춘추전국시대, 초문왕은 일찌기 해치 한 마리를 얻는다. 그리고 그 모양으로 관을 만들어 머리에 썼다. 그리하여 윗사람의 행동을 아랫사람들이 본받아, 해치관은 초나라에서 유행하게 된다. 진나라때 집법어사도 이런 관을 썼다. 한나라는 진나라제도를 승계하여 대체로 마찬가지였다.

 

동한시대에 이르러, 고요상과 해치그림은 아문(衙門)에서 불가결한 장식품이 된다. 해치관은 '법관(法冠)'이라고도 부른다. 법집행관도 이로 인하여 '해치'라 부른다. 이 습관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청나라때, 어사와 감찰사등 감찰사법관리는 일률적으로 해치관을 썼고, '해치'도안을 수놓은 예복을 입었다.

 

복장만이 아니다. 황실건축에서도, 해치의 이미지는 불가피했다. 명효릉과 십삼릉의 진묘신수(鎭墓神獸)라든지, 고궁 태화전, 건청군애에 위엄있는 독각수라든지, 모두 해치의 화신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일부 법원 입구에 배치된 법률을 대표하는 호문신수(護門神獸)도 해치이다. 해치문화의 연원이 유장한 것을 알 수 있다.

 

해치는 중국고대문화에서 영향이 아주 심원하고 많은 이야기와 전설에서 해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찌기 고영주(古潁州)에서 태수를 지낸 바 있는 북송의 대문학가, 서화가 소식은 <애자잡설>에서 '해치변호'의 우언을 싣고 있다.

 

일찌기 전국시대의 제(齊)나라에서느 한번은 제선왕이 애자(艾子)에게 말한다: "듣기로 옛날에 해치라는 일종의 동물이 있는데, 너는 잘 알고 있느냐?" 애자가 답한다: "요가 황제로 있을 때, 해치라는 일종의 맹수가 있었습니다. 궁정에서 길렀는데, 그것은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할 줄 알아서, 간사한 관리를 보면, 뿔로 그를 받아버렸습니다. 그 후에 내장을 먹었습니다." 애자는 잠간 멈추고는 이어서 말했다: "만일 오늘날 조정에 이런 맹수가 있다면, 내 생각에 해치는 다른 먹을 거리를 찾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시비곡직을 판별할 줄 아는 해치를 관료사회에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관리를 감시감옥의 대상으로 한다. 간사한 관리가 발견되면, 뿔로 받아버린다. 그 후에 내장을 먹어치운다. 다른 먹을 거리를 찾을 필요도 없다니, 당시의 관료사회에 간신과 탐관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관한경(關漢卿)의 <옥경대>의 제일절에는 "생전에 해치관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어서 기린상을 그렸다."는 대사로 해치의 이미지를 묘사한다. 그리고 4대명저중 하나인 <서유기>에는 지부(地府)의 "체청(諦聽)"이라는 신수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미후왕의 진짜가짜를 판별할 때 해치와 유사한 기능을 발휘한다.

 

민간에서 많은 지방의 문화는 모두 해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객가인들은 오랫동안 이주하고 생산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객가인은 고대 해치숭배를 기초로 하여 독특한 민서(복건서부)의 '해치'문화를 형성했다. 그 핵심내용은 총명하고 강인하고 공정하고 성실하다는 것이다.

 

해치문화가 민서 객가인의 가치관, 행위방식, 사유방법, 심미관, 도덕규범등 각 분야를 주도했다. 객가인들은 '해치'문화의 충실한 실천자이다. 국가의 전도가 암담할 때, 유아루(劉亞樓), 양성무(楊成武), 부연장(傅連暲), 장남생(張南生), 등자회(鄧子恢), 장정승(張鼎丞)등을 대표로 하는 공화국장군을 배출하여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이미 혈액속에 용해된 '해치정신'을 받들어 중국의 미래를 위하여 전부후계(前僕後繼)로 자신의 역량을 바쳤다.

 

법률의 상징으로서, '해치'문화는 두터운 역사문화적 축적이 있을 뿐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더욱 새로운 내용과 사명을 부여하고 있다. 법제건설을 적극적으로 창도하는 오늘날, '해치'문화가 나타내는 가치는 '중립, 공정, 독립, 민주, 효율, 공개"의 현대사법이념에 부합한다; 그가 제창하는 공정, 성실의 사회도덕가치관은 각종 '용속문화', '부후문화'을 없애고 깨끗한 사회분위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이 제출하는 청렴이념이 수립, 청렴정신의 제창, 청렴환경의 조성이라는 중요한 임무는 정부의 부패방지업무에 심원하고도 적극적인 영향을 미친다.

 

'해치문화'를 선양하는 것은 사회의 조화, 법제의 진보에 '강심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조상이 우리에게 남겨준 진귀한 문화자산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 자산을 아껴서 더욱 아름다운 내일을 창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