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전(劉典)
"감옥"이라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불길한 단어이다. 그 배후에는 오랫동안 누적된 뇌옥(牢獄)의 재난이 있었다. 기실 우리가 말하는 '감옥에 간다'는 말의 정식명칭이 있는데 그것은 '징역'이다.(중국어에서는 徒刑임)
유기징역은 현재 형벌중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종류이다. 일정기간내에 범죄인의 인신자유를 박탈할 뿐아니라 일정한 장소에 감금하는 형벌이다. 유기징역의 기간은 각 나라마다 규정이 서로 다르다. 중국의 형법규정에 따르면, 유기징역이 기한은 일반적으로 6개월이상 15년이하이다. 여러 건의 범죄를 저질러 병합처벌하는 경우에는 25년까지 연장될 수 있다. 사형집행유예기간중에 중대한 입공표현(立功表現)이 있는 경우에는 유기징역 25년으로 감형된다; 무기징역이 유기징역으로 감형될 때는 13년이상 20년이하이다.
걸핏하면 수년, 십수년의 유기징역과 당,송시대의 사법상황을 비교해보면,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당시의 범인이 징역을 살 때는 2년이상인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몇년의 징역을 선고받지만, 몇달만에 풀려난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거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법정형기가 아주 짧았다.
당나라, 송나라의 법률문헌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당시의 징역은 최고 3년을 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징역의 최고형은 3년이다. 1년에서 3년까지 5개의 형벌등급으로 나뉘어진다.
왜 그랬는가? 첫째는 당시의 의료조건, 생활수준의 제한으로 사람의 평균수명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4,5십까지 산다면 이미 장수한 것이다. 한꺼번에 십여년의 형을 내리면 아마도 대부분은 감옥에서 늙어 죽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사회현실에 맞지 않는다. 교사
둘째는 고대에는 현재와 같이 않고, 인력자원이 아주 저렴하지 않았다. 당시인구의 총수가 많지 않아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고귀한 인력자원이다. 생산과 경작에 쓸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을 장기간 구금하게 되면, 사회생산력의 발전에 불리했다.
셋째는 고대의 형벌목적은 범인이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 징벌을 위한 징벌이 아니었다. 법정형기가 비교적 짧았다. 범인들에게 개과천선할 기횔르 주는 것이고, 죄를 범한 후의 심각한 결과를 알게 하여 다시는 재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대의 징역은 사람을 감옥안에 가두는 것만이 아니라, 강제로 고강도의 노역을 시키는 것이었다. 현재의 유기징역에 노동개조를 더한 것과 같다. 형기가 지나치게 길게 되면, 체력이 약한 범인은 감옥에서 죽기 쉽다. 이것도 형기가 짧아진 객관적인 원인중 하나이다.
실제형기는 더욱 짧았다.
그럼 이상하다. 비록 법정형기가 오늘날보다 훨씬 단축되어 있다면, 최고형기는 왜 3년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왜 2년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까?
이것은 중국고대의 독특한 일종의 사법현상과 관련이 있다. 이런 현상을 일으킨 것은 일종의 법률상의 사면제도이다. 구체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용어가 있다. "대사천하(大赦天下,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다)".
중국고대 봉건제왕은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자주 은혜를 베푼다는 명목으로 범인을 사면했다. 황제등극, 황제붕어, 연호변경, 황제의 아들출생, 황후책봉, 태자책봉, 황제의 승전등의 상황이 있으면, 자주 사면령을 반포했다. 천하대란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대사면령을 내렸다. 왜냐하면 자연재해가 있으면 백성이 생활이 힘들어지고, 범죄현상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는 '대사천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거꾸로이다. 풍년이 들거나, 경제상황이 좋아지면, 황제가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대사천하'한다. 이를 통하여, 계급갈들, 사회갈등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실시할 때는 효력이 전국에 미친다. 일정한 기간내의 점죄에 대하여는 이미 발각되었는지, 판결이 났는지를 따지지 않고 모조리 사면한다. 이미 사면된 범죄는 다시 관청에 고발할 수 없다. 누가 사면받은 범죄를 가지고 관청에 고발하면 고발한 죄로 고발자를 처벌한다. 사면이전에 범죄가 이미 집행된 경우 전과로 치지 않는다.
이런 대사천하는 일부 특수한 범죄는 사면받지 못하는 외에, 나머지 죄명은 일률적으로 대사면의 범위내에 포함되게 된다. 즉, 황제가 대사천하하면 온 천하의 대다수 범죄자의 죄명은 사면받는 것이다. 행형은 이로서 종결되고, 감옥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축하하면 된다.
이런 대사면의 원인은 아주 여러가지 이다. 황제의 사생활에 관련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황제가 아들을 낳거나 딸을 낳은 경우, 황후를 책봉하거나 태자를 책봉한 경우, 신황제가 등극한 경우 등등이다. 그리고 조정에 관련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승전을 거두었다든지, 풍년을 맞이했다든지, 인구가 매년 증가했다든지 등등. 반대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대사천하한다. 예를 들어, 천재, 황제붕어, 패전등등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중국은 대사천하의 빈도가 아주 높았다.
어느 정도로 높았는가? 한나라에서, 수,당까지, 대사천하의 빈도는 점차 증가하여, 당송시기에 최고조에 이른다. 관련 통계수치를 보면, 당송시기에 평균 18개월마다 황제는 한번씩 대사면령을 내렸다. 법치사회인 오늘날, 징역이 기한은 일반적으로 비교적 길다. 유기징역의 기한은 6개월이상 15년이하이고 무기징역도 있다.
그러나 봉건사회인 당나라때 유기징역의 최고기한은 겨우 3년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나름의 이유가 있다. 대사의 빈도가 1.57년에 한번씩인 상황하에서, 형기를 마치지 않고 사면되어 석방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래서 더욱 높은 형기를 매겨야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것이다.
대사(大赦)이외의 특사(特赦)도 있다
대사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한가지 대사는 교사(郊赦)라고 하는데, 황제가 남북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지낸 후 반포하는 대사이다. 한문제15년, "하(夏)사월, 상행옹(上幸雍), 시교견오제(始郊見五帝), 사천하(赦天下)"
이것은 비교적 초기의 기록이다. 진(晋)나라이후, 일반적으로 남교제천(南郊祭天) 때 대사를 행한다. 교사는 매년 거행되지만, 매번 대사를 내리는 것은 아니다. 송나라에 이르러, 황제는 매3년 1번씩 친히 남교에서 제사지내고 동시에 대사를 반포한다.
그리고 , 또 한가지 유형은 은상사(恩常赦)이다. 즉, 은사(恩赦)와 상사(常赦)이다.
은사는 아주 경축할 일을 만났을 때 하는 사면이다. 일반적으로 모반,대역, 모살고살, 십악등의 범죄로 사형을 받은 경우나 군사적인 범죄로 죄를 받은 경우, 도망자를 숨겨주거나, 침탐입기(侵貪入己)한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일률적으로 사면하는 것이다.
상사는 통상적인 혹은 통상적인 예에 따라 진행하는 사면이다. 일반적으로 제한이 비교적 엄격하다. 형률 가운데 '상사소불원(常赦所不原)'으로 열거된 죄명은 조서에서 임시로 특별한 규정을 둔 이외에는 모두 사면되지 못한다.
그외에 또 하나의 사면제도가 있는데, 특사이다. 고대에는 이를 곡사(曲赦)라고도 불렀다. 즉, 일부지역의 사면이다. 이것을 '사' 혹은 '특사'라고 불렀다.
곡사의 명칭은 서진 태시5년의 "곡사교지,구진,일남오세형(曲赦交趾,九眞,日南五歲刑)"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송나라 마단림의 <문헌통고>에는 송나라때 사면제도에 관한 기재가 있는데, 사면이 단지 경성, 양경, 양로, 일로, 수주, 일주에 한하는 경우에 '곡사'라고 불렀다.
사면을 반포하는 조령(詔令)을 '사서(赦書)'라고 불렀다. 오대, 당, 송에는 '덕음(德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송때, 사서는 공개의식을 행하면서 읽었고, 그 후에 재신(宰臣)이 형부에 보내어 각 지방에 반포하여 널리 알렸다.
사서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반드시 사면의 원인, 기한, 사면되는 죄의 범위등 내용이 기재되어야 한다. <당률소의. 명례>에 따르면 사서를 반포하는 날의 여명 이전의 범죄는 일률적으로 사면받는다.
<구당서.형법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사면을 행하는 그 날, 궁성의 문밖의 오른 쪽에 금계(金鷄)와 고(鼓, 북)을 설치하고, 죄인을 문앞에 모은 다음 북을 천번 두드리고, 사서를 읽어준다. 그 후에 그들을 석방한다. 사서는 비단에 서서 각 주에 반포한다.
이렇게 많은 사면의 방법이 있으므로 범죄인이 감옥에 오랫동안 있고 싶어도 있기 어렵게 된다. 더더구나 2년이상의 징역을 논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원나라에 이르러, 대사의 빈도가 줄어든다. 대체로 평균 2,3년에 1회이다. 그래도 비교적 빈번했다. 명나라때는 대폭 내려간다. 개략 평균 5년여에 한번씩 대사가 있었다. 그후 청나라에 이르러서 대사는 갈수록 줄어든다. 평균 14년여에 한번씩 대사천하가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대사도 범위를 줄였다. 범죄인의 범죄를 모조리 사면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감형을 해주었다.
인치가 법치에 간섭하고, 인명이 법령보다 크다.
중국고대의 션제도에 대하여, 18세기 프랑스 계몽시대의 저명한 사상가, 법학자인 몽테스키외는 그의 명저 <법의 정신>에서 중국고대의 황제 대사를 논하고 이를 비판한다.
그는 말했다. 중국황제는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 논리성도 없다. 황제가 최고법관인데, 본인이 형을 내리고 어떻게 본인이 형을 사면해준단 말인가. 그는 이것을 비정상적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형은 법관이 내리고, 국왕이 최후의 정의를 주재하는 자로서 죄인을 사면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황제는 규칙의 제정자이다. 그러나 항상 친히 자신이 만든 법률을 파괴하곤 했다. 법률을 공문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중국고대는 하나의 인치사회이다. 법률은 많은 경우에 형식에 불과했고,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는 그것의 실제의의보다 컸다. 형벌은 통치자의 은혜를 베푸는 수단이 되었다. 법률에 무슨 권위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근대 각국에도 대사는 있다. 담나 중국고대의 대사와는 이미 많이 다르다. 은전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형사정책이 되었다. 대사의 적용범위는 가장 넓다. 무릇 일정 시기에 범한 일정한 죄는 모주 적용받는다. 특정한 사람을 한정하지 않는다. 대사의 사면효력도 가장 크다. 형의 집행을 면제할 뿐아니라, 죄와 형을 근본적으로 없애주는 것이다. 대사사면을 받은 사람은 전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사는 국가의 중대행동이므로, 통상적으로 국가원수 혹은 국가최고권력기관이 명령의 형식으로 선언한다. 사법기관이 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의 진보이다. 또한 중국고대법치상황의 비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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