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雍正帝)는 왜 바쁜가?

중은우시 2012. 2. 4. 11:23

글: 신공무기(申公无忌)

 

최근 들어, 매체들은 TV연속극을 비판한다: "청나라 궁중드라마가 판을 치고, 옹정제는 너무 바쁘다(淸宮戱泛濫, 雍正爺很忙)"

 

청나라궁중드라마가 붐을 이룬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중국의 궁중드라마는 명,청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주 많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문자기록의 각도에서 볼 때, 명,청의 내용이 가장 많은 것이다. 정사건 야사건 아주 풍부하다. 이야기거리를 고르기가 아주 용이한 것이다. 민국이래로, 명청을 배경으로 한 각종 유형이ㅡ 평서, 희극이 무수히 많다. 명청을 서로 비교하자면, 청나라가 더 심하다. 연다가 가깝고 이족통치였다는 것이 아마도 중요한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청나라궁중드라마중에서 '옹정제 어르신"이 가장 바쁘다. 여기에도 원인은 있다. 청나라 12명의 황제중에서 옹정제가 여러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말할 거리가 있는 것이다. 바로 문학창작이 붐을 이루는 동력이기도 하다. 청나라는 중원의 주인이 된 후, 순치제에게는 별로 얘깃거리가 없다. 강건성세는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별다른 새로운 거리가 없다. 그 중간에 낀 옹정은 많이 다르다.

 

옹정제의 이름은 애신각라.윤진(1678-1735)이다. 강희제의 넷째아들이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들어온 후 세번째 황제이며, 13년간 재위했다. 연호는 옹정이며, 묘호는 세종이다. 시호는 좀 긴데,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이다. 황제의 사후에는 모두 이런 시호가 있다. 각종 좋은 말은 다 가져가 붙이기 때문에 골치아프다.

 

"옹정제가 바쁜" 것은 바로 그의 일생이 전설적이기 때문이다.

 

첫째, 옹정의 황위찬탈. 옹정제가 황제에 오른데 대하여 야사에서는 의문을 많이 가지고 있다. 청사전문가인 염숭년의 말에 따르면, "유조계위설" "개조찬위설"과 "무조탈위설"의 세 가지가 있다. 이 주제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얘기했다. 여기서 더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생각한다. 옹정은 정당하게 즉위했다고. 중국역사자료관에는 <강희유조>가 보관되어 있다. "황사자윤진, 인품이 귀중하고, 짐을 잘 안다. 능히 대통을 이을 만하다. 짐을 이어 등극하라. 황제위에 오르라." 야사의 주장을 나는 별로 믿지 않는다. 다만 야사는 이야기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둘째, 옹정의 잔인함. 일부 청사에서는 옹정이 수족을 죽이고, 붕당을 타격하는데 등봉조극의 경지였다고 한다. 옹정이 즉위한 후,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형제들에게 살수를 서슴없이 뻗었다. 그의 책략은 먼저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다. 확실히, 옹정은 여론조작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옹정2년 칠월, <붕당론>을 간행하여 내려보낸다. 이 글에서는 신하와 군왕이 호오를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붕당의 위해를 지적한다. 여론을 크게 조성한 후, 옹정은 손을 쓴다. 황십사자 윤제를 군왕으로 강등시키고, 탕산에 구금한다. 나중에 청동릉을 지키도록 보내어진다. 그리고 다시 패자로 작위를 낮추고 연금한다. 황구자 윤당은 서녕으로 유배를 보낸다. 연갱요에게 감시를 하도록 시키고, 이름을 "사스헤이(개)"로 고치게 한다. 강적 황팔자 윤사도 연금되며, 이름을 '아치나(돼지)"로 고치게 한다. 황십이자 윤도는 삭탈관직된다; 황삼자 윤지도 작위를 박탈당하고 갇힌다. 그후, 옹정은 심복 연갱요, 융과다에게 칼을 들이댄다. 옹정3년, 옹정은 92가지 죄를 물어 연갱요를 자결하도록 한다. 옹정5년, 옹정은 41가지 대죄를 이유로 융과다를 연금하고, 다음해에 연금장소에서 사망한다. 형재도 진압하고, 심복도 죽인다. 이를 보면 옹정의 잔인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드라마창작은 거의 모두 이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다.

 

셋째, 옹정의 '문자옥'이다. 사서의 평가에 따르면, 청나라때 문자옥은 공전절후이다. 청나라 순치제때 문자옥이 7번, 강희제때 문자옥은 12번이다. 옹정제때는 17번, 건륭제때는 무려 130여건이다. '문자옥'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우리가 옹정제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저며안 "청풍불식자(淸風不識字)"사건이 있다. 한림원 서길사 서준은 강희제때의 형부상서 서건학의 아들이고, 고염무의 조카손자이다. 옹정8년(1730년), 서준은 상소문에 폐하의 폐(陛)자를 폐(狴, 들개라는 뜻임)로 잘못 적은 적이 있다. 옹정은 즉시 서준을 삭탈관직하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조사시킨다. 서준의 시집에서 "청풍불식자, 하사난번서(淸風不識字, 何事亂飜書, 맑은 바람은 글자도 모르면서, 무슨 일로 책장을 넘기는가)", "명월유정환고아, 청풍무의불유인(明月有情還顧我, 淸風無意不留人, 밝은 달은 정이 있어 나를 돌아보고, 맑은 바람은 뜻이 없어 사람을 남기지 않네)"라는 싯구를 발견한다. 그래서 옹정제는 이것을 서준이 청(淸)을 비방하고 명(明)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취급하여 대경률로 '참입결(斬立決)"에 처한다. 그리고, "유민소지(維民所止)"사건이 있다. 옹정제때, 사사정(査嗣庭)이 강서로 가서 시험관으로 있을 때, 문제를 제출하는데, "유민소지"였다. 이 말은 <시경.상송.현조>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방기천리, 유민소지(邦畿千里, 維民所止)"이며, 그 뜻은 국가의 광활한 토지는 모두 백성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제목은 유가의 규범에 부합한다. 그러나, 옹정은 이 제목을 듣고는 "유지(維止)"라는 두 글자가 "옹정(雍正)"에서 머리를 잘라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신의 머리를자르겠다는 뜻과 같다는 것이다. 옹정은 사사정을 체포하여 엄히 조사하게 한다. 사사정은 옥에서 억울하게 죽고, 육시의 처벌을 받는다. 사사정의 아들도 옥에서 참혹하게 죽고, 가족들은 유배된다. 절강성은 전체 성의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된다.

 

넷째, 옹정은 근면하게 일했다. 만일 옹정제가 잔인한 폭군이기만 하다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다. 옹정은 아주 근면한 황제였다. 재위기간동은 그는 스스로 '이근선천하(以勤先天下,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천하의 으뜸이다)", "조건석척(朝乾夕惕.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다)"으로 자부했다. 매년 자신의 생일에만 하루를 쉬었다. 매일 촛불을 켜고 새벽 1,2점까지 일을 했고 다음 날에는 여전히 아침조회에 나타났다. 그에게는 원칙이 있었다. "오늘 할 일은 오늘 끝낸다" 절대로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가 일생중 검토하고 지시를 내린 글자가 천만자를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모두 공필(工筆)로 적었다. 옹정의 주비(朱批, 황제만 붉은 글씨로 지시를 내린다)가 360권에 이른다. 어떤 사람은 계산해봤다. 이들 글자를 모두 베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옹정이 이렇게 근정(勤政)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강건성세에 옹정은 위와 아래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격이 이렇게 복잡한 황제이다보니 TV드라마의 작가, PD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다섯째, 옹정은 시로 마음을 표현했다. 옹정은 공무에 바쁜 와중에도 시간만 나면 시를 많이 지었다. 그러나, 옹정의 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술, 꽃, 물건을 읊은 것이 너무 많다. 이를 보면 감성적인 사람같다. 그러나 기세는 강희에 미치지 못하고, 화려함은 건륭에 미치지 못한다. 당연히 그의 시에는 임금의 고독함, 임금의 어려움을 읊은 것들도 있다. 후세인들이 <청세종시문록>으로 시들을 모았는데, <중추유회>라는 시는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다:

 

번비정락엽초개(飜飛挺落葉初開), 창앙난금독의란(悵怏難禁獨倚欄)

양지서풍인몽격(兩地西風人夢隔), 일천양우안성한(一天凉雨雁聲寒)

경추전촉음신구(驚秋剪燭吟新句), 파주논문억구환(把酒論文憶舊歡)

고부차시증유약(辜負此時曾有約), 계화향호부동간(桂花香好不同看)

 

옹정도 낭만적인 점이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궁중드라마의 극작가들이 그를 더더욱 좋아하는것이다. 남자, 피비린내, 에피소드 그리고 여자까지 드라마로서의 성공요소는 모두 갖추었다.

 

여섯째, 옹정의 급사. 옹정13년(1735년), 옹정은 돌연사한다. 옹정의 사인은 청나라궁중의 미스테리중 하나이다. 염숭년 선생은 일찌기 5종견해를 내놓았다. 예를 들어, "옹정이 여사낭에게 목을 베었다"; 조설근과 연인 축향옥이 공모하여 옹정을 죽였다; 옹정은 궁녀의 손에 죽었다; 옹정이 중풍으로 죽었다; 옹정이 단독(丹毒)에 죽었다 등등. 그러나, 단독이라는 주장이 가장 합리적이다. 황제는 모두 장생불사를 꿈꾼다. 옹정도 일찌기 두 도사를 불렀다: 장태허(張太虛)와 왕정건(王定乾). 그들로 하여금 연단을 만들게 한다. 옹정은 오랫동안 단약을 복용했으니, 수은, 납, 셀레늄이 중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역사에서 황제가 단약을 먹고 죽은 일은 14건에 이른다고 한다. 옹정이 어떻게 죽었든, 야사에서 기록된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청나라궁중드라마의 제재가 되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니 옹정제가 바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특히 현재는 각종 소설이 성행한다. 옹정을 제재로 한 것은 바로 그를 통해서 현재의 정치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점이 있다.

 

어쨌든 현재 사회는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가치관이 부재한다. 현재의 TV연속극들은 너무나 쓰레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