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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광시형(光時亨): 명나라말기 남천을 저지한 인물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송나라에 이어, 명나라도 또 하나의 '망천하(亡天下)'의 왕조가 되었다. 다만, 송나라와 명나라를 비교하면, 남송은 한세기반동안 연속되었는데, 소위 '남명'은 겨우 십여년간 잔존했을 뿐이다. 한, 당과 비교하더라도, 명나라에는 '삼국' 혹은 '남북조'의 국면이 나타나지 않고, 바로 신왕조가 통일을 한다. 명나라가 급속히 멸망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수도가 함락됨과 동시에 최고통치자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위험한 지경에 처한 왕조가 사실상 국가 '뇌사'상태에 빠진 것이다.  명나라 숭정제는 왜 앉아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다른 왕조를 본받아 전략적으로 이전할 수는 없었을까? 이것은 하나의 '작은 인물' 광시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광시형(1599-1645)의 자는 우성(羽聖), 호는 함만(含萬)이며 명나라때 동성(桐城) 사람이다. 광시형은 숭정7년(1634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처음에는 사천 영창지현을 맡는다. 숭정말기 병과급사중이 된다. 바로 이 '위비권중(位卑權重. 직위는 낮으나 권한은 크다)'의 자리에 앉는 바람에 광시형은 중국역사상 전환기의 특수한 인물이 된다. 그는 여러번 명왕조가 수도를 '남천(南遷)'하는 것을 저지한다. 그는 보잘것없는 몸으로 중국의 역사진전, 심지어 국가의 역사국며에 후대인들이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위 "남천"은 바로 숭정제가 경사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하에서, 북경을 전략적으로 포기를 하고, 남경으로 천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략조정을 하여, 왕조생존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농민군과 청군의 거대한 군사위협하에, 내우외환은 날로 심각해지던 숭정제때, '남천'문제는 여러번 최고통치자의 중요한 의사일정에 올라갔다. 일찌기 숭정15년 십일월 청군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주유검은 천도를 생각한다. 이청의 <삼원필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황상은 변방의 오랑캐와 전투를 벌이게 되자, 주연유와 남천의 의논하면서 누설하지 말 것을 명한다." 수도는 장기간 만청의 총칼에 위협받고 있었다. 남경천도는 필요할 뿐아니라, 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명나라는 이백여년간 '유도(留都)'제도를 실시하고 있어서, 유도 남경은 국가의 경제중심일 뿐아니라, 북경에 상응하는 중앙정부기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국난이 닥칠 때 큰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다만, 이번 남천논의는 천계제의 의안황후 장씨의 반대로 무산된다.

 

숭정17년 정월, 이자성이 서안에서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병력을 동쪽으로 보내어 산서로 침입한다. 그의 뜻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겠다는 것이다. 경사의 형세가 더욱 위급해진다. 명나라 조정은 다시 남천을 의논한다. 계육기(計六奇)의 <명계북략>에 따르면 이명예(李明睿)등이 남천을 건의하고, 숭정제는 단독으로 이명예를 만나서 얘기한다. "짐은 그런 생각을 한지 오래되었다. 제대로 보좌하는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미뤄왔다. 그대의 뜻이 짐과 일치한다. 그러나 바깥의 여러 신하들이 동의하지 않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주유검의 원래 뜻은 자신이 남경으로 가는 것이고, 내각등 일부 관리를 북경에 남겨서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월 초하루, 대순(大順)의 격문이 어전에 도달한다. 격문에는 "삼월 십오일에 경사에 도착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군신상하는 모두 공황상태에 빠진다. 이월에, 대순군의 유방량(劉芳亮)등의 부대가 이미 하북을 나와서, 기본적으로 경사에 대한 포위를 완성한다. 경사의 형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주유검이 안전하게 남천하는 것도 이미 곤란하게 된 것이다. <명사.이방화전>에는 이때 "이방화가 비밀리에 상소를 올려, 황제는 북경을 고수하고, 태자로 하여금 남경에서 감국하도록 청했다. 황제는 그 상소문을 받고 마음이 움직였다. 대전을 돌아서 걸으며, 이를 논의하고자 했다. 중윤 이명예도 역시 남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이 절충한 남천방안도 결국은 무산되고 만다.

 

긴급한 순간에, 남천만이 쓸만한 대책이었다. 숭정제의 두번에 걸친 남천방안은 왜 가능한데도 실행하지 못했을까? 조정에서 대순군의 전략적 의도에 대하여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였고, 숭정제는 정치적인 고려에 매달려 있었다는 점 이외에 광시형 등이 강력하게 반대한 것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숭정제가 조정에서 논의에 부칠 때, 이명예는 송나라황실이 '남천'으로 왕조의 수명을 150년이나 연장시킨 선례를 들어, '남천'방안만이 중흥이 희망이 있다고 얘기할 때, <명사>에 따르면, 광시형이 탁자를 치고 일어나서, '공개적으로 기밀을 누설하는 것은 시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명예를 죽이지 않으면 민심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숭정제때, 이명예는 숭정제의 내심을 가장 잘 알고 마음이 가장 들어맞는 사람이었고 숭정제의 신임을 깊이 얻고 있던 사람이었다. 숭정17년 정월, 숭정제는 이명예를 우춘방 좌서자로 승진시켜 좌춘방인(左春坊印)을 관장하게 한다. 파격적으로 그를 정6품에서 정5품으로 발탁한 것이다. 이명예의 주장에 대하여, 광시형은 분명 그 배경을 잘 알았을 것이다. 이것은 이명예의 개인적인 의견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시형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로 깊은 배경이 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진연(陳演)이다. 주연유가 재상에서 파직된 후 죽고, 진연이 수보(首輔)에 오른다. <명사>에 따르면 진연의 사람됨은 "기용차각(旣庸且刻, 평범하면서도 각박했다)". 그러나 사실상 진연도 엄청나게 총명한 사람이다. 그는 일단 숭정이 '남천'하면 그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경사에 남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최후는 아마도 주연유보다 그다지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황제의 "친정(親征)" 남천방안이 무산된 후, 태자감국(太子監國)이라는 우회적인 남천방안이 나온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광시형에게 제지당한다. 장대(張垈)의 <석궤서후집>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명예등이 태자가 남경으로 가서 감국하는 것을 주청한다. 그러나 광시형이 말하기를 "태자를 모시고 남으로 가다니, 여러 신하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당숙종 영무이야기가 재현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당숙종은 이형(李亨)으로, 당현종의 셋째아들이다. 당현종이 서쪽으로 도망칠 때 마외파를 지난다. 이형이 황위에 오르고 나중에 궁중정변에서 우울하게 죽어간다. 숭정재의 내심을 보면 분명 당현종,당숙종의 역사가 재연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광시형의 이 말은 그의 아픈 곳을 찔렀다. 결국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어, 결국 자결하고 만다.

 

미국의 한학자 Frederic Evans Wakeman Jr(중국명 魏斐德)은 <홍업-청조개국사>에서 '남천'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분석했다: "이것은 나중에 만청이 북경을 점령할 때의 형세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다. 만청은 비교적 완전하게 명나라의 중앙정부를 접수하여, 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을 보유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명나라의 거의 모든 한족관리를 접수하고, 그들에 의지하여 천하를 관장하며, 최종적으로 남방을 정복했다. 숭정제의 결정은 여러 황실종친의 계승권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각 파벌끼리 다툼이 일어나서 남명정권을 약화시킨다." 만일 광시형의 반대가 없었다면, 그리하여 주유검이 정말 남경으로 천도했더라면, 대명왕조는 나중에 이자성 혹은 만청과 정치적 연합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역사의 이런 가설은 광시형의 출현으로 모조리 물거품이 된다.

 

사실상 중국역사를 고쳐쓰게 만든 광시형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광시형에 관하여, 정사와 야사에는 많은 기록과 평가가 있다. 그를 질책하는 내용이 아주 많다. 특히 경사함락후, 광시형은 앞장서서 투항한다. 정말 그랬다면, 광시형은 이자성의 '간첩'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광시형이 투항했다는 것은 증거가 부족하다. 정사에 따르면, 남명 홍광제 조정의 신하들도 의견이 불일치 했다고 한다. 그저 마사영, 완대성등 권력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결론이 나고 처리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갑신전언록>, <홍광실록초>등 야사에 따르면, 광시형은 확실히 이자성에게로 갔다. <명계북략>의 "북회목격충역정안>에는 이런 말이 있다. 광시형은 이자성의 총애에 몸둘 바를 몰라했고, 아주 복잡한 심정을 품고, 아직 남명통치하에 있는 아들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자성을 배알하니 후한 상과 격려를 내리고, 원래의 관직에서 일을 보게 해주었다. 광시형은 아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제갈량 형제는 삼국에서 각각 일을 했다. 우리 부자도 역시 두 조를 섬긴다. 나는 대순의 은혜를 입었으니, 너희는 성을 주초(走肖)로 바꾸어 여전히 글을 열심히 읽어서 남조의 과거에 합격하도록 하라."

 

광시형의 수준은 제갈량보다 낮다고 할 수 없다. 국제형세에 대한 판단은 항상 정확도의 문제이다. 광시형의 관점에 따르면, 이자성이 완패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끝까지 혁명에 성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천하대세는 중국에 다시 '남북조' 혹은 '삼국'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상당한 자신이 있었던 것같다. 그렇다면, 제갈량등과 같이, 아이들은 남조에서 과거에 참가하고, 부친은 북도에서 일을 한다. 이렇게 양쪽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어느 하나가 무너지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광시형이 정치졸부에게 의탁한 것은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다. 신뢰도는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리에 부합하느냐에 있다. 국제형세는 너무 복잡하여, 누가 능력이 있는지, 누가 정확하게 보았을찌 알 수가 없다. 명청교체기에 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삼국시대와 같다. 자신은 새로운 민영기업에서 운을 시험해볼 수 있었다. 자녀는 옛날 국유기업에서 그대로 철밥통으로 살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다 담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광시형이야말로 정명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일은 그다지 잘 한 짓도 아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서, 광시형의 공자는 억울하다고 주장하고, 황도주(黃道周)는 동정하여, 당왕(唐王)의 길을 걷고, 그를 위하여 명예회복절차를 취해준다. 몇년후, 완대성의 고향사람이며 대명이 자자하고 진짜 억울하게 죽은 대명세(戴名世)는 <서광급간일사>를 쓴다. 여기에서 합리적인 답안을 내놓는다. 완대성은 광시형을 죽이고자 했다. 이유는 광시형이 이를 악물고 완대성을 크게 욕한 바 있기 때문이다. 완대성은 보복하고 싶었으나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광시형이 자신의 집을 찾아로기를 기다려, 유택청(劉澤淸)에게 그를 체포하도록 암시를 준다. 그러나 완대성 이 자는 일을 하는데 확실히 통이 크지 못했다. 그래서 대명세의 이 이유는 기본적으로 말이 된다. 쌍방은 은원이 있고, 그것은 끝을 맺어야 했다. 대낮에는 신사인척 하지만, 밤에는 귀신눈을 해야 한다.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에 손을 쓴 것은 너무 심했다.

 

다만,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광시형이 하옥된 후, 사법절차는 상당히 정상적이었다. 완대성이 무슨 악독한 수단을 쓴 것은 아니다. 그에게 욕을 얻어먹었다고 하여 칼질로 되갚아 주지도 않았다. 어사 장손진(張孫振)은 광시형을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극력 주장했다.

 

장손진은 자가 공무(公武)이고, 호는 고악(古岳)이다. 안휘 곽산 사람이다. 그는 완대성, 광시형과 같은 고향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관료로서의 명성은 아주 좋았다. 그는 숭정원년의 진사로, 태복사소경, 하남도감찰어사를 지냈으며, 당시 '천하제2청관'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이 간부의 명성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는 후세인들로서 알 길이 없다. 그가 산서순안으로 있을 때, 원계함에게 사적인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으나, 원계함에게 거절당한다. 그는 즉시 수완을 써서, 원계함이 부정부패하다고 하여 그를 감옥에 넣는다. 나중에 산서의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원계함이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집단적으로 수도로 가서 민원을 넣는다. 그리하여 중앙지도자들이 이를 중시하여 진상이 밝혀지게 된다. 원계함은 원직에 복귀되고, 장손진은 고향 곽산으로 쫓겨난다.

 

명나라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데 책 한권만 보아서는 절대 알 수가 없다. 광시형에 대하여 투항이라는 정치적 오점에 대하여 야사에스이 이미지는 상당히 어둡다. 그저 이야기로 아주 생동감있고 재미있다. 광시형의 저명한 상표는 '조인(鳥人)'이다. 사람들은 그를 '세조어사(洗鳥御史)'라고 부른다. 당시의 수보인 온체인(溫體仁)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위맹하게 생겼지만, 그 속은 상당히 형편없었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비방의 약물로 광시형은 매일 온체인의 양물을 씻겨준다. 이렇게 하여 그는 감찰어사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광시형 고향의 사적에서는 이런 내용을 완전히 뒤집는다. 마기창의 <동성기구전>에서 광시형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이렇다. "어려서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일처리에 과감했으며, 성격상 악을 용납하지 않았다." <동구집>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광시형은 성격이 강직하고, 독립무원(獨立無援)했다. 그를 싫어하는 자들은 천도를 제지한 것을 가지고 그의 명성을 깍아내렸다. 세상은 모두 그가 억울하다는 점을 알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동구집>에 수록된 광시형의 첫번째 시는 바로 <남루서중(南樓誓衆)>이다. 이는 완전히 국난을 당했을 때의 장사의 이미지이다. "인신기위질(人臣旣委質), 식록당불구(食祿當不苟). 수사령일방(受事令一方), 차신기아유(此身豈我有). 즉우관갈주(卽遇管葛儔), 상수쟁승부(相須爭勝負). 신령봉소적(矧令逢小敵), 안능거각주(安能遽却走). 앙서두상천(仰誓頭上天), 부시요간수(俯視腰間綬). 아심여광겁(我心如恇怯). 유검감재수(有劍甘在首). 독서회고인(讀書懷古人), 숙석치인후(夙昔恥人後). 수양여상산(睢陽與常山), 불성역비구(不成亦匪咎). 역혈시신명(瀝血矢神明), 탄검청용후(彈劍聽龍喉)"

 

인물의 품성과 관료로서의 업무처리까지, 지방사의 광시형에 대한 견해는 모두 정사, 야사와 전혀 다르다. <동선기구전>등 지방사적의 기록에 따르면, 광시형은 숭정7년(1634) 진사로, 처음에 영창지현을 맡았다. 이 때, 섬서의 농민군이 이미 봉기했고, 천하는 대란에 빠지낟. 현의 한 열렬한 지원자가 자금을 모아서 현성의 다리를 건설한다. 광시형은 말했다: "도적이 조만간 들이닥칠텐데, 성벽이 낡았으니, 당연히 다리를 철거하고 배를 사며, 다리의 돌로 성벽을 수리해야 한다"  광시형은 과감하게 결정한다. 안정유지가 최우선이고 그 후에 건설을 한다. 성벽을 다 수리하고 나서 농민군이 들이닥친다. 이제 성벽도 견고하고, 강에 다리도 없으니, 농민군도 어쩔 도리가 없게 된다.

 

광시형의 이런 사적은 최고지도자에게도 들어간다. 숭정제는 친히 그를 접견한다. 최고지도자의 질문에 광시형은 또한 많은 건설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주유검은 감동한다: '그를 만나볼 때 황상이 일어나서 그를 쳐다본 것이 세번이었다." 황제는 일반적으로 긍지가 있고, 옆에서 담배에 불을 붙여주더라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속 그를 쳐다보았다니, 그것은 정말 그의 말에 감탄한 것이라 할 것이다.

 

동성의 지방사에 나오는 광시형은 너무나 완벽하다. 왜 완벽한가. 이런 이야기도 적혀 있기 때문이다: "동성세용병(桐城歲用兵), 우년비부등(又年比不登), 조미삼년미교청(漕米三年未繳淸), 포정하격보정(布政下檄補征), 민피병(民疲病), 무이납(無以納), 공소청면지(公疎請免之)". 즉, 동성지역에 매년 징병을 하여 삼년이나 세금을 내지 못했는데, 다시 포정사가 추가로 징수하라고 하니, 백성들은 피로하고 병이 들어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광시형은 상소를 올려 이를 면제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농업세를 내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보기에, 한 사람이 좋은 일을 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정으로 고향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기는 어렵다. 고향사람들이 특산품을 보내주지는 못하더라도 평생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

 

광시형이 이자성에게 투항한 사실이 있는가? 야사에서는 그렇다고 한다. 이자성이 성을 공격할 때, 광시형은 왕장(王章)과 함게 부성문(阜成門)을 지키고 있었다. 왕장이 죽음으로 저항할 때, 광시형은 왕장을 끌고 도망친다. 왕장이 말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너는 죽는 것이 두려운가? 광시형이 대답한다: 이렇게 죽어버리면 보통병사들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우리는 성으로 들어가서 황상을 찾자. 찾지 못ㅎ면 그때 죽자. 그때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렇게 도망치다가, 농민군과 맞닥뜨린다. 왕장이 크게 소리친다: 나는 시군어사가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리겠느냐. 그러다가 바로 찔려 죽는다. 광시혀은? 바로 '급히 놀라서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한 마디 소리도 치지 못하고 투항을 한다.

 

동성의 지방사료에서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북경성이 함락될 때, 광시형은 어사 왕장과 함께 성을 순시하고 있었다. 왕장이 피살되고, 광시형은 장단지에 부상을 입고 여승암자로 도망친다. 한밤중에 숭정제를 따라 목을 매고자 한다. 그러나 여승이 발견하여, 죽지 못한다. 어하(御河)를 지날 때 그는 어사 김현(金鉉)과 함께 강에 뛰어든다. 그 결과 김현은 죽고, 광시형은 죽지 않았다. 하늘의 뜻이 이러하니, 광시형은 '잠행하여 남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모두 후세문인들이 쓴 것이다. 어느 것이 정확할까? 동성문인의 주장이 아마도 더 믿을만 할 것이다. 만일 백주대낮에 반도가 되었다면, 아예 다시 돌아가서 반도로 있으면 된다. 이자성에게 투항하는 것이나, 만청에 투항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인가. 단지 한번 투항한 후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그리고 하필 엣주인이 있는 곳으로 도망쳐와서 죽는단 말인가? 사람의 인격을 모욕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IQ까지 모욕해서는 안된다.

 

다만, 광시형의 인물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투항을 했건 투항을 하지 않았건, 다른 사람에게 밉보였던 아니건, 그는 모두 죽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확실히 한 가지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단시 야사에 쓰여 있어서 눈길을 많이 끌지는 못하지만...이 죄명은 명륭에는 없다. 중국에서 유일하고, 세계에서도 유일하다. 오로지 광시형을 위하여 주문제작한 죄명이다. "남천저지죄" 광시형이 온갖 사례를 들이밀어, 숭정제를 도덕적으로 엉망진창이 되게 만들었고, 숭정제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저 마음에도 없는 북경고수를 끝까지 밀고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