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호유용은 일본과 결탁하여 모반하려 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11. 23.

글: 정만군(程萬軍) 

 

대명의 개국황제 주원장에 의하여 <간신록>에 들어가게 된 호유용은 주원장이 제거한 중국의 마지막 승상이다. 호유용은 주원장이 전우를 도살하는데, '한마공로(汗馬功勞)'를 세운다. 그러나, 결국 그도 '토사구팽'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권력야수 주원장은 죄명을 얽는데는 고수였다. 그는 자신의 방흉(幇凶) 호유용에게 여러가지 죄명을 뒤집어 씌웠다. 진자인지 가짜인지, 허허실실이다. 그중 가장 압권인 하나의 죄명은 바로 "통왜죄(通倭罪)"이다. 즉 일본인과 결탁하여, 주원장의 명나라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 죄명은 호유용을 <간신록>에 들어가게 했ㅇ르 뿐아니라, 그를 "이통외국(裏通外國)'의 제일인으로 만들었다.

호유용은 왕법(枉法)과 모역(謀逆)으로 참형을 당한다. 그리고 통왜죄는 그가 죽은지 6년후에 '추가로 가해진 것'이다.

<명사.호유용전>에 따르면, 홍무13년(1380년), 명태조 주원장은 권한남용과 모역죄로 호유용등을 처결한다. 그리고 "호유용이 죽었지만 아직 그의 죄상은 다 드러나지 않았다", "십구년 십월, 임현(林賢)사건이 종결되면서 호유용이 왜적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소위 호유용의 "통왜"는 그가 죽은지 6년후의 임현사건에서 드러난다.

임현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전 명주위지휘 임현은 병력을 이끌고 동해의 왜구방어를 맡는다. 임현이 경성에서 어가를 따를 때부터 이미 호유용과 내톻하여 일당이 된다. 주원장은 임현을 질책하여 일본으로 유배를 보낸다. 3년을 일본에서 사는데, 호유용이 몰래 사람을 일본으로 보내어 일본국왕의 병력을 빌리고자 한다. 거짓으로 진공하기 위하여 온다고 하였지만, 그 뜻은 난을 일으키는데 있었다. 오는 자는 정사(正使) 요장주(瑤藏主), 좌부사좌문위, 우부사우문위로 정예병 왜인 무장한 4백여명을 데리고 온다. 왜승은 밖에 있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호유용은 이미 죽었다. 일본정예벙은 운남으로 보내어 수비업무를 맡는다. 홍무19년 주원장이 법사(法司)에 명하여 반란의 내용을 심문해내고 족주(族誅)하고 끝냈다."

 

임현사건은 '호당사건'의 제9시리즈이다. 주원장이 친히 편찬한 <대고삼편>에 들어 있다.

이렇게 큰 '이통외국'사건은 중대한 역사사건이다. 다만, 주원장이 쓴 <대고삼편>외에, <명실록> 홍무19년의 관련기록에서 임현사건에 관한 내용이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왜 사료에는 이 '이통외국'의 대사건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을까?

호유용이 이미 죽었는데, 왜 그에게 이 죄를 추가시켰을까?

일본인과 결탁하여 모반하다니, 호유용이 이 죄를 짓기나 한 것일까?

 

오백년동안의 역사평가를 살펴보면, 이 죄면에 대하여 사학자들은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예를 들어, 1934년의 저명한 역사학자 오함 선생은 <호유용당안고>를 써서, 호유용의 통왜진상에 대하여 상세히 고증한다. 그 결론은 "임현이 바다를 건너가서 왜국의 병력을 불러오는 일"을 했다는 것은 논리나 시간적으로 모순이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함의 견해는 근현대 사학자의 이 사건에 대한 주류견해를 대표한다.

 

필자는 이렇게 본다. 이 사건은 주원장이 '죄를 추가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당금 승상이 변방에 유배된 장수를 시켜 일본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는 것은 역사적 대배경에 벗어난다: 첫째, 당시 일본은 명나라의 번속국이 아니다. 주원장이 부정지국(不征之國)으로 열거했다. 그런데 어떻게 명나라의 관리들의 유배지가 될 수 있겠는가? 둘째, 이때는 일본이 남북조시대이다. 자신의 국가도 아직 통일시키지 못했는데, 무슨 실력으로 다른 나라를 전복시킨단 말인가? 셋째, 만보를 양보하여, 설사 이 일이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호유용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공식자료를 보면, 임현이 유배되었을 때, 호유용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임현의 잘못을 추궁하기까지 했다. 임현이 처벌받을 때, 호유용은 이미 죽은지 6년이 지났다. 이 일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임현은 왜 호유용을 위해서 목숨을 건단 말인가. 특히 그가 죽기 전에는 아무 사건도 일으키지 않다가, 굳이 죽은 후에 일본으로 가서 병력을 모은단 말인가?

 

호유용이 고발될 때, 집안에 정기(旌旗)를 내걸어놓았다고 한다. 집 하나의 부지에, 얼마의 병력을 숨길 수 있단 말인가? 약간의 호위부대와 일본정예병 4백명으로 궁중정변이 가능할까. 백전노장인 주원장을 없앨 수 있을까? 실로 눈뜬 장님의 헛소리라고밖에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의 일본은 지금의 일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백년의 일본은 비록 중국의 번속국이 되지 않고자 하기는 해도, 몽골제국처럼 중국을 공격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소위 중원정복은 기껏해야 머릿속에나 남겨질 것이다. 대명이 개국한 이래, 외환이 많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북원남왜(北元南倭)이다. 비록 왜구는 대명왕조의 새로운 골치거리가 되었지만, 몽골제국의 잔여세력인 북원과 비교하자면, 그 살상력은 차이가 크다. 북원은 어떤 때에는 북경을 위협했고, 황실을 노략할 기세였다. 그러나 왜구의 골치거리는 그저 기습과 유격전이었다. 그때의 일본은 유목민족의 중국에 대한 '약탈'수준이지, '정복'의 단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일본의 요장주가 정예병 4백명을 데리고 호유용과 협력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는 일은 역사적 논리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근거가 없다.

 

<명실록>에는 일본의 요장주가 두번 중국에 진공했다는 기록이 없다. 일본측의 사료기재에 따르면, 요장주가 마지막으로 명나라를 밟은 것은 홍무17년이다. 이때 호유용이 죽은지 이미 4년이 지난 때였따. 만일 요장주가 이때 명나라정부에 체포되었다는 것도 사실이고, 임현과 연합하여 거사하려는 것도 사실이다. 그후에 사형을 받고, 수하와 사신은 운남으로 유배가서 군인이 된다. 그렇다며 이 일 및 처벌과 죽은지 4년된 호유용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쉽게 추단할 수 있다. "요장주, 임현, 호유용"의 이 "통왜"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의심많은 주원장이 억측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억지로 호유용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역사상, 주원장은 일본인에 대하여 가장 뼛속까지 미워하는 중국황제중 하나이다. 그 주요한 원인은 그가 '조공을 바치라'고 보낸 대명사신이 일본남조의 회량왕에게 머리가 잘렸기 때문이다. 주원장은 원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일본정벌은 시도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그 화를 삭이지는 못했다. 그래서 일석이조로, 본국의 간상과 타국의 왜구를 한꺼번에 합장시켜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명한 황제 및 민족정신의 '위대한 승리'를 얻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