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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좌량옥: 명나라말기 내부투쟁의 고수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홍광조(弘光朝)의 "남도삼안(南渡三案)"중에서 영향이 가장 컸던 것은 "북래태자안(北來太子案)"이다.

1644년말, 홍려시(鴻臚寺) 고몽기(高夢箕)에게 목호(穆虎)라는 종이 있었다. 그는 북방에서 남방으로 도망쳐 오다가 도중에 한 젊은이를 만나서 두 사람이 동행을 하게 된다. 저녁에 잠을 자다가 목호는 젊은이의 내의에 용무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묻는다. 젊은이는 아주 겸손하게 대답한다: "내가 바로 황태자이다." 목호는 적지 않게 놀라서 오는 도중에 그가 먹고 마시는 것을 잘 돌봐준다. 그렇게 남경까지 왔다. 젊은이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남경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황제에 등극할 준비를 한다. 주유송을 포함해서 모두 멍해진다.

원래, 동림당, 복사(復社) 계통의 사람들은 주유송에 대하여 이견이 있었다. 이번에 결국 기회를 잡은 것이다. 사방에서 선동하고 여론을 조성한다. 하마터면 큰 혼란이 일어날 뻔한다.

다만, 대학사 왕탁이 나타나자, 이 젊은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왕교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예전에 태자의 스승으로 3년간이나 글을 가리켰다. 태자인지 아닌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다만 왕교수도 마음 씀씀이가 세심한 인물이다. 자신이 알아보고 아니고는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왕교수는 이 젊은이와 다음과 같이 애기를 나눈다.

왕탁이 젊은이에게 묻는다: "당신은 나를 아는가?"

젊은이가 대답한다; "모른다."

왕탁이 다시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서 대신들의 강연을 들었는가?"

젊은이는 틀리게 답한다.

왕탁이 이어서 묻는다: "책상 위에 평소에 어떤 물건을 놔두는가?"

젊은이는 틀린 대답조차 내놓지 못한다.

왕교수는 정말 심기가 깊다. 왜 이렇게 자세히 물었는가? 그저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책제목만 한두개 물어도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을 필요가 있는가?

진상이 밝혀지자, 딴 마음을 품은 사람이 아니라면 모조리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역사상 고위층을 사칭하는 일은 확실히 너무 많았다. 대명세(戴名世)의 <우암집>에 이런 이야기도 실려 있는데, 아주 재미있다. 스님이 하나 있는데, 여자를 아주 좋아하여 기녀를 자주 찾았다. 그 결과 아랫도리에 문제가 생겼다. 다만 이 스님은 아주 총명했다. 불리한 사정을 유리하게 전환시킨다. 결국 과감하게 위충현을 사칭한다. 많은 민중은 위충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텔레비젼 뉴스가 없던 시절의 문제점이다.

 

좌량옥이 어찌 멍청하겠는가? 이 태자 '왕지명(王之明)'은 성조차 틀렸다. 원래 짝퉁이다. 좌량옥이 어찌 그 헛소리를 쉽게 믿었을까? 좌량옥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짝퉁이었다. 가짜일수록 비용이 적게 들고, 이윤은 크다. 이것은 노점상들도 다 아는 이치이다. 좌량옥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하다보면 가짜가 진짜로 될 수 있다. 가짜가 황제에 오르더라고 기껏해야 한헌제 즉 허수아비황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좌량옥은 동탁이 아니면 조조가 되는 것이다.

명나라 역사상 청군측(淸君側)의 사례는 적지 않았다. 건문제때의 연왕 주체, 선덕제때의 한왕 주고후, 정덕제때의 영왕 주신호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번왕이다. 무장 좌량옥도 같은 방식으로 추진했다. 신하가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좌량옥의 '청군측"의 기획은 아주 새로웠고, 아주 생동감있었다. <작화록>에 따르면, "좌량옥의 손님 호이녕(胡以寧)이 계책을 내는데 가짜태자가 혈서로 조서를 써서 사람을 시켜 보내게 한다. 좌량옥은 조서를 받은 것처럼 단을 쌓고 곡을 하며 피를 뿌려 맹세한다."

기획자가 아니라면, 허실을 알 수가 없다.

이 기획을 내놓았을 때, 좌량옥은 확실히 우두머리로서의 모략을 보였다: 한편으로 마사영을 토벌하는 격문을 공표하고, 다른 한편으로 마사영에게 사람을 보내어 생일축하인사를 한다. 좌량옥의 군대가 구강에 이르러서야, 마사영등은 확실한 소식을 듣게 된다.

다만, 좌량옥의 '청군측'방안은 아주 잘 기획되었지만, 이를 받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 사문(邪門)의 사회에 '정의'로운 사업일수록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만일 정말 남경으로 가서 간신을 붙잡자고 얘기한다면, 그저 할일없는 사람들이나 구경하러 갈 것이다.

 

좌량옥은 하등교(何騰蛟)에게 같이 가자고 하나 하등교가 거절한다. 구강에 도착한 후, 원유함(袁維咸)의 지지를 요청했으나, 역시 욕만 얻어먹는다.

원유함(1593-1646), 자는 계통(季通), 호는 임후(臨侯)이며 강서 의춘 사람이다. 천계5년(1625년) 진사가 되었고, 숭정15년(1642년) 병부우시랑 겸 우첨도어사를 맡는다. 주절구강, 총독강서,호광,안경,응천(남경)등이 군무를 맡았다.

가장 지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지지하지 않았다. 좌량옥이 얼마나 우울했을지는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사업을 하나 새로 일으키는 것은 자고이래로 어려웠다. 사업이 순조롭지 못하고, 몸도 좋지 않자, 좌량옥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좌량옥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좌몽경(左夢庚)이 계속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간다. 이 좌몽경은 확실히 젊은이이다. 이때가 어떤 시기인지도 고려하지 않았다. 청나라병사들이 남으로 밀고 내려와 강북을 공략하고 있었다. 청나라병사와 조정의 사이에 끼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행히 원래 무슨 큰 사업을 벌일 생각이 없던 좌몽경은 금방 새로운 업무를 찾는다. 하완순(夏完淳)의 <속행존록. 남도대략>에 따르면, "좌씨는 다시 내려가서 안경을 함락시키고, 완씨(阮氏)를 모조리 죽여버린다. 완대함등은 좌씨가 오는 것이 오랑캐(청나라)가 오는 것보다 못하다고 여기고, 차라리 오랑캐를 이용하여 좌씨를 죽이고, 왕지명을 죽여서 희망을 끊어버리고자 하였다."

하완순의 기록은 믿을만할 것이다.

홍광원년(1645) 삼월 이십오일, 좌량옥은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내려온다. 반란을 일으킨 장수들이 안에서 호응하여, 하룻밤만에 성곽이 무너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다. 그들이 내려올 때 왕대성의 당제인 완전지(阮前之)는 마침 시골로 내려가서 붙잡히지 않았다. 안경, 종양등이 지방사료를 뒤져보면, 당시 좌량옥의 병사들이 이 곳으로 온 후에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완씨는 찾아서 다 죽였으며, 백성들도 걸리는데로 죽였다.

사람들을 충분히 죽인 다음 병사들은 동쪽으로 내려간다. 이제 마사영, 완대성도 확실히 알았다. 만일 나라를 지키려고 생각한다면, 집안을 지킬 수도 없겠다는 것을.

두 가지 페해를 비교해본다면, 마사영 완대성은 '강북의 병력을 모조리 철수시켜, 강의 상류를 막는다" 즉, 강북의 황득공, 유량좌를 불러서 좌량옥의 군대를 막게 한 것이다. 완대성이 친히 지휘하여 판자기의 전투제서, 좌몽경의 군대는 황득공의 군대에 궤멸당한다.

좌몽경의 부대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자 이익을 본 것은 청나라군대이다. 강북의 방어선이 비게 되고, 양자강, 회하 방어선이 붕괴된다. 청나라군대는 직접 남하하여 무인지경으로 누빈다.

모두 좌몽경이 우둔하다고 말하지만, 그는 부친보다 기민했다. '청군측"이 성공하지 못하자, 좌몽경은 바로 '주군'을 바꾼다. 이번 '주군'은 주씨도 아니고, 왕시도 아니다. 바로 만청이다. 청군이 남하하자, 좌몽경, 황팽(黃澎)은 부대를 이끌고 청나라군영으로 간다. 좌량옥은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갔고, 주유송이 기반도 거의 무너져 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