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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유목민족은 어떻게 중원왕조에 영향을 끼쳤는가?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휘격(輝格)

 

북방초원유목민족과의 관게는 시종 고대중국역사발전에 영향을 미친 관건요소였다. 이 관계를 처리하는 방식은 많은 정도로 중원농업제국의 정치형태, 군사역량배치 내지 재정구조를 만들어냈고, 한 왕조의 기질과 운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관계 및 그것이 쌍방이 미친 정치적 영향에 대하여 통일적이고 설득력있는 해석을 이론적으로 논증한 경우는 드물다. 비록 쌍방의 역량의 등락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분석이 있었고, 심지어 '15인치강우선'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류의 기후요소로 이런 등락을 해석해보고자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대부분 너무 거리가 멀었고, 이를 통해 얻은 내용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보스턴대학의 인류학자 토마스 바필드가 1992년에 발표한 <위험한 변방>이라는 책은 이 주제와 관련한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바필드는 먼저 우리에게 몇 가지 사실을 주의하라고 한다. 통일되고 강대한 초원제국은 항상 동시에 통일되고 강대한 중원제국이 있었다; 몽골이라는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중원을 정복한 것은 항상 만주에서 온 퉁구스어를 하는 어업수렵유목농경의 혼합민족이었고, 몽골초원에서 온 순수한 유목민족이 아니었다. 이런 정복은 항상 초원과 중원제국이 모두 쇠퇴하고 와해되는 시기에 발생한다.

 

이에 대하여, 바필드의 해석은 유목민족은 권력의 개인화성격과 승계권의 불안정성이 있어, 그 자신이 장기간 정치적인 통일을 유지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중원의 통일은 거꾸로 장기적이고 통일적인 유목제국을 형성한다. 첫번째 초원제국 흉노는 바로 진나라가 통일제국을 건립한 후에 나타난다. 그 수명도 바로 진,한의 강성시기와 일치한다. 유사한 장면은 돌궐과 대당제국의 관게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유목민족은 정착하고 있는 농경민족을 대하는 방식이 두 가지였다. 약탈 그리고 약탈위협에 기한 재물강요. 쌍방이 모두 분열상태일 때, 기회주의적인 약탈이 우선한다. 중원왕조가 통일되어 있을 때는 이상적인 재물강요대상이 된다. 이런 공갈은 통상적으로 화친과 알현이라는 겉옷을 입게 된다. 그리고 점차 정기적인 봉공(奉供)제도로 발전한다.

 

한 유목부락이 중원제국을 설득하여 그들이 변방을 약탈하지 않는 댓가로 재물을 바치게 하려면, 그 자신이 초원에서 충분한 권위를 가져야 했다. 그렇게 하여 다른 부락의 약탈행위를 효과적으로 제지할 수 있어야 했다. 일단 정기적인 봉공을 받는다면, 이 봉공관계는 다시 그의 초원에서의 지위를 강화시킨다. 결국 그가 초원을 통일하여 유목제국을 만들도록 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러한 쌍방관계가 가져오는 거대한 이익으로 인하여 유목민족은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중원제국을 격패시키는데 열중하지 않았다. 농경지구를 통치하는데에는 더더욱 흥미가 없었다. 반대로, 이 관계을 가장 잘 깨달은 것은 초원제국이다. 예를 들어, 회흘은 전력을 다하여 중원제국의 반란이나 침입을 막도록 도와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중원이 혼란에 빠지면, 자신은 편리한 대상을 찾아서 거액을 뜯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 재미있는 것은 중원을 정복할 능력을 가진 곳은 만주의 퉁구스부락이라는 것이다. 선비, 거란에서 여진까지. 만주는 생태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장기간 어업수렵, 유목에서 농경까지 각양각색의 사회형태가 존재했다. 거기에서 굴기한 국가는 그 문명과 제도가 중원국가처럼 성숙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른 사회형태간의 외교관계와 통치문제 및 조직능력등에서 장점이 있었다. 정복의 기회가 나타나면, 그들은 왕왕 조직적으로 준비한다. 그리고, 요동의 한인농경지구는 그들로 하여금 산해관을 넘어서 중원요지를 정복하기 전에, 그들의 이원적통치모델을 충분히 실험할 수 있게 해준다.

 

바필드씨의 삼각꽌계이론에 대하여, 징기스칸이 창건한 몽골제국은 현저한 예외이다. 이 예외는 또 다른 예외를 불러온다. 명왕조는 한왕조이래 봉공제도를 거절한 중원제국이다. 한때 변방무역도 금지한다. 이 선택은 바로 몽골정복이 조성한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반작용이다.

 

명왕조는 이로 인하여 거대한 댓가를 치른다. 반드시 북방의 변방에 대군을 주둔시켜야 했다. 이 군대가 황제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한다. 이를 위하여 거대한 조운의 댓가를 치러야 했다. 또한 권력중심과 문화경제중심이 장기간 분리됨으로 인한 여러가지 곤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런 댓가는 수확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봉공의 지지를 잃은 후, 몽골초원에서 다시는 분열상태에서 다시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