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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중국고대에 "농민의 난"은 존재하지 않았다.

by 중은우시 2013. 12. 22.

글: 양진도(楊津濤)

 

사학계에서는 "농민의거"의 성격규정과 평가에 대하여 이견이 존재해 왔다.

 

절대다수의 사람은 "농민의거"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진승, 유방, 주원장, 이자성의 이야기도 귀에 익숙할 것이다. 1949년이후의 중국통사에서 "농민의거", "농민혁명"의 내용은 오랫동안 많은 페이지를 차지해왔고,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예를 들어, 범문란(范文瀾)의 <중국통사>에는 이렇게 말한다: "지주는 농민의 앞에 유일한 대적대계급이 되었다. 진승오광부터 시작하여, 역사상 끊임없이 농민이 지주의 압박에 항거하는 크고 작은 의거가 발생했다" 전백찬(翦伯贊)의 <중국사강요>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황소가 영도한 농민의거군이 남북을 전전하며 각지의 농민의 투쟁을 추동시켰고, 지주계급을 침중하게 타격했다." <중국사강요>는 지금까지도 많은 대학역사전공학과의 필수교재가 되어 있다.

 

다만, 민국시기 통사에서는 소위 "농민의거"의 내용은 언급할 때, 좋은 뜻으로 하는 경우가 적었다. 예를 들어 전목(錢穆)의 <국사대강>에서는 왕선지(王仙芝), 황소를 "유구(流寇)"라고 부르고, 백련교, 배상제교를 "사교(邪敎)"라고 불렀다; 여사면(呂思勉)의 <백화본국사>에서는 진승, 오광이 '반란을 일으켰다", "복주 사람 왕선지가 방력을 일으켜 난을 일으키다"고 하였다. 타이완의 당대학자 부락성(傅樂成)은 비교적 중립적인 "민변(民變)"이라는 말로 "농민의거"를 칭했다.

 

의거지도자 측면을 보면, "농민의거지도자"는 절대다수가 농민이 아니다.

 

농민의거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고찰하는데 처음으로 필요한 것은, 그 지도자층의 기본구성이다. 사실상, 소위 "농민의거지도자"는 거의 농사짓는 농민이 없다. 그들은 하급관리이거나, 상인이거나, 심지어 귀족후예이다. 이들은 거사초기에 아무도 '지주계급에 반항'한다는 목적을 품지 않았다.

 

"농민의거지도자"에는 농민이 없고, 많은 사람이 지방의 하급관리나 상인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농민의거"는 농민이 지도자가 되어야 당연하다. 그러나, 사실상 역사상 대규모의 농민의거에 농민이 두목인 경우는 거의 없다.

 

문사학자 당원붕(唐元鵬)은 진말농민의 난, 녹림적미의 난, 황건적의 난, 수말 농민의 난, 당말 농민의 난, 왕소파 이순의 난, 방랍의 난, 종상 양요의 난, 원말 농민의 난, 명말 농민의 난, 백련교의 난, 태평천국의 난의 12번의 '의거'를 샘플로 하여, 그 주요지도자의 '직업'을 통계내본 후 발견했다. 하급관리출신이 9명(예를 들어, 유방, 두건덕), 상인출신이 8명(예를 들어, 황소, 방랍), 군인출신이 4명(예를 들어, 진승, 오광), 귀족자제출신이 3명(예를 들어, 항우, 이밀), 그외에 몇몇 소지주와 종교관련인사가 소수 있었다. 당원붕이 보기에, 양요(楊幺)만이 어민(漁民)이고, 양수청(楊秀淸), 소조귀(蕭朝貴)가 목탄공이어서 억지로 농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였다.

 

농민이 농민의거의 지도자가 돌 수 없다는 것은 그 필연성이 있다. 옛날 농민은 오랫동안 논밭에서 농사를 지었고, 문화수준이 없었다. 자신의 액운을 조성한 원인을 인식할 수가 없었고, 적절한 정치강령을 내걸 수도 없었다. 생활경력이 단순한 농민에게 가장 결핍된 것은 광범위한 사회관계망이다. 상응한 조직능력을 가지고 한 무리의 '의거군'을 이끌 수도 없다.

 

이와 비교하면, 하급관리, 상인등은 일정한 문화수준을 지니고 있을 뿐아니라, 견식이 넓고, 어떻게 조정체제를 본받는지도 알아서, 자신의 규칙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지식분자가 참여하면, 왕왕 '의거군'이 신속히 발전하는데, 유방, 주원장에게는 장량, 이선장등이 가담한 후 비로소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농민의거의 지도자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농민의 이익을 도모한 적이 없다.

 

인상속에 '농민의거'의 목적은 분명 농민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어야 한다. '균전면량(均田免糧)' 즉 밭을 골고루 나누고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것등이다. 다만, 사실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사초기에 그저 개인의 부귀영화만을 추구했다.

 

진승, 오광은 대택향에서 수졸(戍卒)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킬 때,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고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역졸을 부추겨서 반란을 일으키고 약속한 것은 전답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부귀공명이라는 것이다. 수졸들은 지주계급에 반항할 뜻이 없었을 뿐아니라, 오히려 진승, 오광이 내건 "공자부소, 항연"의 기치를 따른 것이다.

 

당말의 황소, 왕선지는 모두 대염상(大鹽商)이었다. 소금을 밀매하여 거부를 이루었다. 그들의 반란은 확실히 핍박받아 몰린 것이지, 농민을 도와서 지주에 반항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왕선지, 황소는 반란도중에 여러번 당나라정부에 투항을 청한다. 예를 들어, 879년, 황소는 글을 올려, 그를 광주절도사로 임명해주도록 청한다. 그러나 당나라조정은 그에게 4품의 하급관리를 부여하는데 동의하였을 뿐이다. 자연히 협상은 결렬된다.

 

주원장은 가난뱅이출신이다. 자신은 농사를 짓지 않았으며, 농민보다 못했다. 그러나, 그가 혁명에 '투신'하려는 마음은 전혀 굳건하지 못했다. 고향사람 탕화(湯和)가 서신을 보내어 그에게 함께 호주 곽자흥(郭子興)에게 투신하자고 할 때, 주원장은 친구 주덕흥(周德興)을 찾아가서 상의한다. 주덕흥은 주원장에게 참가하도록 격려한다. 주원장은 그래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황각사(皇覺寺)가 불에 타버리고, 갈 곳이 없어졌을 때야 비로소 먼저 가서 점을 쳐본 후 다시 곽자흥에게 투신하기로 결정한다.

 

호주에는 당시에 오수(五帥)가 병존하고 있었다. 오함의 <주원장전>에 따르면, "군량미를 분담시킬 때,공덕애(孔德涯)의 일당은 지주에게 많이 거두자고 주장했다. 가난한 농민들은 끼니조차 잇지를 못하고 있는데, 거기에 식량을 거두게 되면 그들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따. 곽자흥은 그러나 다른 주장을 한다. 지주에게 적게 거두자고. 기껏해야 지역내에 지주는 수십 집밖에 되지 않는데, 너무 많이 거두게 되면 지주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칠 것이라는 것이다. 빈농은 비록 거둘 것이 많지는 않지만, 사람 수는 많으므로, 집집마다 조금씩 거두어서 다 모으면 큰 숫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주원장은 곽자흥의 편에 선다. 이것은 농민을 위하여 지주에 반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농민의거지도자들은 어느 정도 기세를 얻게 되면,왕왕 "균빈부(均貧富)"같은 류의 기치를 내걸어 인심을 끌어모은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목적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바로 구왕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집단을 핵심으로 하는 신정권을 건립하는 것이다. 군웅축록은 문정중원을 목적으로 한다. '농민이익'이 아니다.

 

목적으로 보면, 농민들은 지주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협박받아서 "반란"을 일으킨 경우도 있다.

 

황제시대의 중국은 농업사회이다. 그래서, 농민은 반드시 여러 차례의 농민의거에서 주요 참여자였다. 다만, 중국역사상 지주와 농민의 한계는 불분명했고, 양자간의 모순은 상상하는 것처럼 그다지 첨예하지 않았다. 많은 농민의거때, 농민이 가입한 것은 원인이 아주 복잡하다. 심지어 협박을 받아 들어온 경우까지 있다. 대다수는 '지주의 압박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고대에, 진정하고 첨예한 모순은 지주와 농민이 아니라, 조정과 민간이었다.

 

"농민의거"의 역사서술을 보면, '지주계급'과 '농민계급'의 모순이 극히 첨예한 것처럼 묘사하고 시시때때로 대립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실들을 보면, 중국역사상 지주와 농민은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놓여 있지 않았다. 학자 맹상재(孟祥才)가 분석한 바와 같다: "중국역대왕조는 토지매매와 제자석산(諸子析産)의 제도를 실행했다. 게다가 왕조교체와 전쟁이 조성한 주기적인 사회동란은 지주와 농민이 모두 계속적이고 끊없이 변하게 만들었다. 지주는 범죄를 지어 관직을 잃거나, 경영을 잘 못하거나,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여러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가지셔 농민으로 되고, 농민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얻거나, 경영을 잘하거나 혹은 사업을 하여 돈을 벌어서 일약 지주로 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상황은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두 계급은 계속하여 인원교류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다는 쌍방삼투가 이루어진다."

 

전국의 반수이상의 토지는 자경농, 반자경농의 수중에 있었고, 지주가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견해는 근거가 없다. 소위 "부자전연천맥(富者田連阡陌), 빈자무입추지지(貧者無立錐之地)"라는 등의 말은 과장되거나 특수한 상황이다. 전농(佃農), 고농(雇農)은 자신의 토지가 없고 그들은 지주를 위하여 경작하였다. 그러나 농촌에는 복잡다단한 종족관계가 존재하여, 지주와 전농, 고농은 왕왕 종족네트워크에 얽혀 있다. 소위 '계급모순'은 드러나기 어려웠다.

 

고대중국에서 진정 첨예한 모순은 지주와 농민사이가 아니라 민간과 조정사이에 존재했다. 한 왕조가 중후기로 갈수록 왕왕 백성들에게 무거운 부역을 부과했고, 이때 지주, 농민은 사실상 같은 지위에 처한다. 진왕조때 수졸을 징발할 때, 농업생산을 보증하기 위하여, 먼저 여우(閭右)의 호강(豪强)으로부터 징발했다. 호강으로는 부족해지면 비로소 여좌(閭左)의 농민들을 징발했다. 소위 "진술역다(秦戌役多), 부자역진(富者役盡)"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가정(苛政)하에서, 지주, 농민은 모두 국가정책에 불만을 갖게 되고, 반항정서를 품게 된다.

 

그래서, 소위 "농민의거"라는 말은 부정확한 것이다. 이 '의거'에 참여한 사람은 사회각계각층에서 온다. 진말의 대동란에, 먼저 한 무리의 수졸(戍卒)들이 첫 반란의 소리를 울리고, 그 후에 농민, 지식분자, 관리, 지주가 호응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기>에서 말한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 진승이 "수백의 무리를 이끌고 몸을 돌려 진정권을 공격했다. 참목위병(斬木爲兵). 나무를 잘라 병기를 만들고, 게간위기(揭竿爲旗). 장대를 들어 깃발로 삼았다. 그렇게 하니 천하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호응했다....산동의 호걸준걸들이 함께 일어나니 진나라가 망하게 된다."

 

백성들이 '의거군'에 참가한 것은 토지를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경우 죄가 겁나서이거나 미신때문이었다.

 

황소, 주원장과 같은 호걸도 농민을 위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농민도 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거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사실상 그것도 아니다. 진승은 둔장(屯長)으로서, 수졸을 관리할 책임이 있었고, 그들을 데리고 주둔지로 가야 했다. 도중에 큰 비를 만나, 기한내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기한을 어기면 모조리 참형을 당한다. 수졸은 "가도 죽는 상황하에서 차라리 거사라도 일으키고 죽자'라는 심정으로 진승, 오광의 반란에 참가한 것이다.

 

유방이 정장으로 있을 때 명을 받들어 범인을 여산으로 압송하는데, 가는 도중에 범인들 절반이 도망친다. 유방은 알았다. 여산에 도착하면, 이들 범인들은 모조리 도망쳤을 것이라고, 아예 어느 날 밤에 범인을 모조리 풀어준다. 그 결과 십여명의 범인은 유방을 따르겠다고 한다.

 

유방이 도망하는 과정에서 "참백제자(斬白帝子)"와 머리 위에 "상유운기(常有雲氣)"라는 두 가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패현의 사람들은 이것을 들은 후, 유방은 장래 큰 일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해서 속속 그에게 투신한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유방에 투신한 이들은 원래 농사지을 토지가 없어서 생활할 수 없었던 농민이 아니고, 지주계급에 반대하려는 목적을 품지도 않았다고."

 

"의거"에 참가한 많은 농민들은 자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난세에 어쩔 수 없이 참가한 경우였다.

 

역대 의거 가운에, 천재지변에 의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배고픈 백성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 위험을 무릅쓰고 거사를 한 경우로는 왕광(王匡), 왕봉(王鳳)의 녹림군(綠林軍)이 있다. 홍수전(洪秀全)의 거사성공 원인중 하나는 광서의 대가뭄이다. 다만 '의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많은 참여자들은 주동적이 아니었고, 피동적이었다. 이수성은 공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배상제교인들의 집은 가옥이 모조리 불태워졌다.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를 따랐다. 시골 사람들은 먼 길을 떠나본 적이 없다. 백십리를 떠난 후에는 돌아가는 길을 몰랐다. 그래서 다시 관병을 쫓아갔다."  이것이 바로 처음에 억지로 끌려가서 '의거'에 가담한 일부분 사람의 모습이다.

 

태평천국이 천경을 수도로 정한 후, 일찌기 북벌을 진행한다. 사료에 따르면 북벌군은 "가는 길에 협박하여 가입시켰다", "도처에서 협박으로 가입시켜, 갈수록 많아졌다." 또한 "관병을 따르며 짐을 들어주다가 따로 떨어져 나왔다가" 다시 북벌군에게 협당당해 따라간 경우도 있었다; 시장에 갔다가 끌려온 경우도 있었고; '성안에서 극을 보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장발적(태평천국)이 성에 들어와서' 끌려온 경우도 잇었다. 북벌군의 총사령관 이개방(李開芳)은 포로로 잡힌 후 이렇게 진술한다: "나중에 각 처에 도착하면 현지백성을 협박하거나, 돈을 주고 매수하여 따르게 했다. 혹은 죽는게 겁나서 따른 경우도 있었다." 끌려갈까봐 겁이 나서, 어떤 곳에서는 북벌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백성들이 도망쳐서 열집중 아홉집이 비었다."

 

어떤 사람은 태평군에 끌려간 후, 다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끌고 올지를 생각한다. 이하의 사료는 지금 보기에 전율스러울 정도이다. "보안(保安)의 주생(周生)은 일찌기 여러 적(賊, 태평군)에게 말하기를: '너는 붙잡혀 온 것이냐, 스스로 들어온 것이냐' 대답하기를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집은 불태워져서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다시 묻기를 '너는 너를 끌고온 자와 너를 해친 사람을 미워하는가?" 말하기를 '미워합니다.' '그러면 왜 오늘 다른 사람을 붙잡아오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였는가?' 여러 적들은 한 입으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의 집은 불타고 끌려왔는데, 매번 온전한 집을 볼 때마다 생각하기를 나는 이런데 너희들은 편안하게 사느냐는 생각이 든다. 분노와 불평불만에 그들을 붙잡아와서 나처럼 만들어야 마음이 시원해진다.'"

 

붙잡혀온 사람은 그저 태평군을 쫓아서 반란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끌려온 사람중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글쓰는 일을 맡겻고, 선생이라고 불렀으며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노약자이나 담력이 약한 자들은 물건을 들고 옮기게 하거나 식사를 짓게 하였다." 남은 청장년에게는 장모(長矛), 도검을 나누어주었다. 태평군의 사병은 뒤에서 이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감독했다. 누구든지 퇴각하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태평군이 백성을 협박한 점에 대하여는 전목의 논설이 아주 날카롭다. "기근은 농민들이 움직이게 할 수는 있었지만, 농민들을 조직할 수는 없었다. 임시로 농민을 조직하려면 종교에 자주 의존해야 했다. 단기간내에 만들어지고 임시로 흥기한 종교는 좋은 내용일리가 없다. 이것은 농민혁명 자체에도 치명상이 된다." "중국은 강역이 넓고 기근과 재난을 겪는 곳은 대지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기근은 자연적으로 제한이 있어서 일이년 후에는 상황이 바뀐다. 한때 한 지방의 격동적인 변란을 확대시키고 연장시키려면 반드시 유동적인 공포정책을 써야 한다. 양민을 끌어와서 그들이 돌아갈 곳이 없게 만들고, 재산을 없게 만들어야 한다. 변란에 따라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소위 '유구'이다. 이런 변란은 소요지역이 확대될수록 학살이 더욱 심해지고, 협박으로 끌고가는 경우가 갈수록 많아진다."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역대 "의거"에서는 모두 북벌군의 이런 방식이 존재했다. '의거군'이 한 곳에 도착하면 병력을 보충하는데, 자연히 갖은 방법을 써서  현지인들이 반란에 참가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의거군'이 지나간 곳은 농민이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했다.

 

소위 "의거"는 정의를 위하여 거병하는 것이다. 만일 행하는 것이 불의라면 그것을 "의거"라고 할 수 있을까? 상상속에서는 '의거군'이 지나간 곳에서 추호도 백성들을 건드리지 않고, 주성, 부현을 함락시킨 후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과 전혀 상반된다. '의거군'이 도착한 곳에서는 살인방화약탈이 있었다. 그래서 생령이 도탄에 빠진다. 20세기 상반기, 공산당지도자중 한 사람인 이달은 이렇게 말했다. 농민전쟁은 생산력에 대한 파괴가 엄중했다. "황소는 팔백만의 인구를 죽였고, 장헌충은 사천인을 도살했다." 1949년이후의 사서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유는 "이들 내용은 봉건문인들이 계급입장에서 농민의거를 멸시비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내용을 다시 쓰는 것은 농민의거의 이미지를 해칠 수 있다."

 

당나라말기 황소를 예로 들면, 그의 대오에서 병사, 아사, 전사한 총수는 100만명 이상이다. 중원은 원래 인구가 조밀한 곳인데, 황소가 패망했을 때, 이미 종횡천리에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광주에 회교도, 기독교들만 해도 황소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12만이상이었다. 장안은 당시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대도시였는데, 황소가 수도로 삼았다. 당나라군의 반격으로 황소가 낭패하여 철수할 때, 그는 방화를 명령했고, 장안은 잿더미가 된다. 이후에 장안은 다시 수도가 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이자성의 대군은 규율이 엄격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 곳은 "무릇 집이란 집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관료집안은 편안하게 살지를 못했으며, 심하면 오형을 받아 죽는 경우가 수두룩했다."만일 이것을 지주계급에 대한 타격이라고 한다면, 그가 언사(偃師)를 함락시키고 온 성을 도살한 경우에 피해자는 대부분 보통백성이었다. 장헌충이 사천에서 도살한 것은 더욱 유명하다. 온강현은 '인류가 거의 멸종한다."

 

고대의 사서에서, 각종 민간거사를 '도적'이라고 적어왔으므로, 1949년 '농민의거'를 지고무상의 지위로 끌어올린 후, 모든 '도적'을 일률적으로' 의거'라 규정하게 된다. 기실 이들 도적중 많은 경우는 태평세월에 무리를 끌어모아 살인약탈강도를 벌인 자들로 파괴성이 강하고 조그만치도 '의거'의 강령은 없었다.

 

이들 '농민의거'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반란사건은 많은 경우 그 작용이 소극적이었다. 학자 융생(戎笙)이 말한 것처럼 많은 대규모 농민전쟁이 끝난 후, 사회생산력은 장기간 정체쇠락상태를 겪게 된다. 어떤 농민전쟁이후에는 분할할거국면이 형성되어 사회생산력이 장기간 파괴된다. 중등규모의 농민전쟁은 생산력을 추동시키지 못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그래서 농민의거는 역사발전을 추진하는 '진정한 동력'이었다라는 견해는, 그 자체로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민의거"는 역사발전의 '동력"이라는 주장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 된 후에, '농민의거'의 작용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이렇다: 신통지자가 농민이 동난중에 획득한 토지를 인정하게 하고, 요역과 세금을 감경시켜주는 조치를 취하게 만든다. 사실상, '의거'가 가져온 대동란 후, 국가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생산력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런 정책을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농민에게 양보한 것이라기 보다는, 신왕조건립자가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결론

 

비록 역사상 규모가 적은 반란사건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폭정에 항거하여 일으킨 것일 수 있고, '농민의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규모 '농민전쟁'에는 그러한 사례가 하나도 없다. 명실상부한 '농민의거'는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