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서문장(徐文長): 세번이나 자살미수한 명나라의 화가

중은우시 2013. 11. 23. 23:41

글: 이주즙(李舟楫) 

 

 

 

1665년, 45세의 서문장은 <자위묘지명(自爲墓誌銘)>을 썼고, 3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자살의 방법도 모두 상당히 잔인했다. 먼저 도끼로 자신의 얼굴을 내려찍어 얼굴에 온통 피가 흘렀고, "두개골이 모두 부서지고, 만지면 소리가 났다" 이어서 회초리로 자신의 불알을 때리고, 다시 날카로운 송곳을 자신의 두 귀로 찔러넣어서 송곳이 1촌여 들어갔다. 이렇게 하였는데도 죽지를 않았다.

 

의사의 견해에 따르면, 송곳이 3센티미터를 들어가면 고막이 외상을 입고, 귀뼈가 부서진다. 단단한 물건으로 귓속을 손상시키게 되면 격렬한 통증과 어지럼증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상해행위를 못하게 된다.

 

이상의 행위를 보면, 서문장은 정말 미쳤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이렇게 독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귀를 잘라서 기녀에게 준 네덜란드의 화가 반 고호라면 아마도 자신의 몸을 잔혹하게 해한 서문장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역시 정신분열증 환자이다.

 

자살의 이유에 관하여, 서문장은 자신이 "사생취의(舍生取義)"한다고 여겼다. 이 '의'는 바로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이다. <자위묘지명>에서 서문장은 호종헌(胡宗憲)이 자신을 알아주는 은혜를 회고한다. 그 후 자신이 막료로서 죽는 이유를 진술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위(褘, 서문장의 이름은 서위이다)는 문사(文士)이며 행동거지가 깨끗했으니 죽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고대의 문사들 중에서 다른 사람의 막료로서 행동거지가 깨끗하며 죽은 자가 많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서위가 스스로 죽는 것이다. 누가 다른 사람과 죽을 것인가. 그래서 그 죽음은 친척도 만들 수 없고, 친구도 이해할 수 없다."

 

자살하는 사람은 정신이 맑고 그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불행한 점이라면 이때의 서문장은 정신분열증환자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통쾌하게 죽는 법을 선택하지 못했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법으로 자신의 몸을 망가뜨린 것이다.

 

명나라때 신경의학의 발전수준을 보면, 서문장은 효과적인 치료를 받지 못했고, 증세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환상에 시달리고 비극은 계속 발생한다. 이번에 서문장의 목표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었다. 다음 해 서문장은 처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하여, 때려서 죽여버린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히나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구해내져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기형으로 된다. 그녀는 서문장의 네번째 처였다.

 

서문장은 왜 정신분열증을 앓았는가? 심리학의 기본관점에 따르면, 가족유전과 성장경력과 관련이 있다. 가족유전은 고증할 수가 없다. 개인경력을 보면, 그의 초기경력을 알 수 있다. 고통으로 충만했고,  실패와 좌절이 있었다.

 

서문장은 태어난지 100일만에 부친이 죽는다. 그의 생모는 신분이 낮은 시첩이었다. 어려서부터 적모인 묘의인(苗宜人)이 길러주었다.

 

14세때 묘의인이 죽고, 큰형 서회(徐淮)에 의탁한다. 형제간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서문장은 반씨(潘氏)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5년후 반씨가 죽으면서 반씨집안에서 나오게 된다. 집을 빌려서 제자를 받아 가르친다. 서출에, 부친이 죽고, 모친이 죽고, 처가 죽었다. 형제간에는 사이가 좋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며 살 곳이 없다. 인생비극을 서문장은 청년시절에 이미 모두 다 맛보았다. 그래서 그는 민감하고 의심이 많으며 고독하고 고집세며, 괴벽을 지닌 성격이 된다. 도망령의 <서문장전>에서는 "성절경민(性絶警敏)"이라는 네 글자로 개괄했는데 깊이있고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서문장은 천재성이 일찌감치 발휘된 유형이다. 그 자신이 말한 바에 따르면, 6살때 글을 배우면서 한번 보면 즉시 암송했다. "9살때는 글을 지었는데......유안(劉晏), 양수(楊修)와 비교할 만하다" 십여세때는 붓을 들면 만자를 썼다. 그러나 배움의 길은 험난했다. 두번이나 과거를 보나 모두 낙방한다. 재시험에 참가하여 겨우 현학의 증광생원이 된다. 그후 연속 8번이나 향시에 참가하나 모두 낙방한다. 44살에도 향시에 참가하고자 하나 참가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공명의 길을 포기한다.

 

과거제도는 시험을 잘 보는 자를 뽑는 것이다. 고금이 모두 그러했다. 하물며 명나라때의 팔고문으로 뽑는 과거는 더욱 그러하다. 역대이래로 중국의 과거제도는 창조적인 인재의 생성을 방해했다. 그래서 중국교육의 문제는 바로 천년이나 쌓인 얼음이고 하루이틀 추위로 이루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문장은 태어나면서부더 이단이었고, 자연히 과거에서 성공할 수는 없었다.

 

서문장이 32세때 참가한 향시의 답안지에 제학부사 설응기가 이렇게 "구절마다 헛소리이니 이장길(李長吉, 당나라의 시인 李賀)의 류이다"라고 한다. 비록 재주가 뛰어났지만, 주류에 영합하지 않았고, 시험은 볼 때마다 떨어진다. 평생 급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과거로 성공할 수 없으면 막료가 되어 사야(師爺)의 길을 걷는다. 이것은 소흥 독서인의 전통이다.

서문장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는 바로 호종헌의 막료를 지낸 기간이다.

당시, 호종헌은 병부좌시랑 겸 도찰원좌첨도어사에 직절총독의 신분을 지니고, 절강, 남직예와 복건등지의 군무를 총괄했다. 동남해연안의 왜구소탕의 전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왕직등 해상무상밀수집단을 소탕하는 중임을 맡는다.

 

1558년, 영파(寧波)와 정해(定海)의 사이에서 호종헌은 백록(白鹿) 한 쌍을 얻는다, 서문장은 <초진백빈녹표(初進白牝鹿表)>를 대신 써서 조정에 바친다. 이런 방법으로 황제에게 아부한 것은 당시 '신왜구가 대거 몰려와서" 일부 부서에서 호종헌이 황제를 속인다고 탄핵을 하여 가정제가 대노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대유등 장수를 엄격하게 처분하고, 호종헌에게는 기한을 주어 토벌하도록 명령한다. 백록을 하늘에서 내린 상서로움으로 헌상한 후, 도교를 독실하게 믿는 가정제는 과연 크게 기뻐한다. 도망령은 <서문장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표가 올라가자, 황상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 글은 열흘 한달동안 사람들에게 퍼져나간다. 호종헌은 이 때부터 서위를 중시하게 되고, 아끼고 더욱 예로 대한다."

 

그후, 단맛을 본 호종헌은 안휘 제운산에서 다시 백모록(白牡鹿)을 얻었고, 서문장이 <대재진백록표(代再進白鹿表)>를 쓴다. 이제 호종헌의 은총은 최고조에 달하다. <명통감(明通鑑)>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황상은 1년내에 하늘이 두번이나 상서를 내렸다고 보고, 주희충(朱希忠)등을 원극보전 및 태묘로 보내어 감사인사를 하고, 조정신하들도 글을 올려 축하한다. 호종헌의 봉록을 한등급 올려준다."

 

이 기간동안 서문장은 여러번 막료에서 사임한다. 서문장의 서생기개를 호종헌은 높이 평가하고, 예의로 서로 대한다.

호종헌의 사적을 보면 호종헌은 능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능신으로서 사람을 잘 썼다. 서문장은 글을 잘 썼을 뿐아니라, 병법에도 능했다. 이런 인재를 호종헌은 마음을 다 주며 사귄다.

 

서문장은 막료들 가운데서도 호종헌의 특별한 우대를 받았고, 그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명사.서위전>에 따르면, "서위는 병법을 알고, 기계를 잘 알았으며, 호종헌이 서해를 붙잡고, 왕직을 유인한 것은 모두 그의 계모였다."

정사의 견해는 믿을만하다. 서문장은 호종헌이 왕직, 서해등 무장해적밀수집단을 유인하고 섬멸하는 행동에서 큰 공로가 있었다.

 

1561년, 진해루가 완공되고, 서문장은 호종헌을 대신하여 <진해루기>를 쓴다. 호종헌은 백은 220냥의 보수를 준다. 이렇게 후한 보수를 주는 것을 보면 호종헌은 손이 컸다. 그리고 그가 인재를 중시하는 흉금을 지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문장은 220냥의 돈으로, 성의 동남쪽에 토지 10무를 구입한다. 거기에는 집 22칸짜리가 있었고 과일나무, 연못등이 있었다. 새로 정리하고 수리한 후 "수자당(酬字堂)"이라 이름한다.

 

1564년, 엄세번사건으로 호종헌이 두번째로 체포된다. 그리고 감옥에서 죽는다. 이 사건은 서문장의 정신분열증이 발발한 도화선이 된다. 호종헌의 지우(知遇)에 감사하는 외에, 그에 연루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가진다. 이러헥 공포로 발광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호종헌의 세력에 의존하여 발호했었다. 그런데 호종헌이 감옥에 갇히자 서위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했고, 결국 발광했다."

 

서문장의 성격으로 호종헌의 막료로 있을 때, 재주를 믿고 오만했고, 한때 잘 나갔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밉보인 적이 많았다. 원굉도의 <서문장전>에도 몇 가지 이야기가 적혀 있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서문장은 정신분열증이 발작한다. 먼저 자살미수사건을 벌이고, 나중에 처를 죽이고 하옥된다. 친구들이 구해주어 죽지 않는다. 7년후, 친구의 아들, 융경 신미(1571년) 장원 장원변이 구해주어 출옥한다. 이때부터 서화에 골몰하며 나머지 인생을 보낸다. 말년에 그림을 그리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화조화의 개산조사가 된다. 아무 생각없이 심은 버드나무가 그늘을 이룬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