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구(吳鉤)
역대왕조는 모두 관료집단의 부정부패를 용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관료사회가 부패하면 전체 총치계급의 권력기초가 부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이런 선입관이 있다: 고대정부는 부패방시를 단지 인치의 수단에 의존했고, 엄밀한 제도를 건립하는데 이르지는 못했다. 기실, 2,3백년이상 유지된 왕조에 효과적인 부패방지제도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통치할 수 있었겠는가?
금년 봄의 "양회"에서 전국인대대표이자 작가닝 이월하(二月河)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은 급여를 올려주어 관리를 청렴하게 만들자고 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상 급여가 가장 많았던 때는 송나라때이다. '공무원급여'가 한나라의 6배, 청나라의 10배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가장 부패한 왕조이다." 필자는 '급여를 많이 준하고 하여 관리가 청렴해지지 않는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송나라가 중국역사상 가장 부패한 왕조이다'라는 것은 소설가의 말에 불과하고, 진짜라고 생각할 일은 아니다. 왜냐ㅏ면, 만일 부피의 심각성을 얘기한다면, '정유뇌성(政有賂成)'(즉, 시스템적이고 제도적인 부패)의 만청(청나라말기)가 가장 심했다. 청나라말기 관료사회의 부패, 관료집단의 타락은 당시의 체제내관리이던 운남학정 섭이개(葉爾愷)조차도 청왕조는 합법성을 잃었고, 망하지 않으면 천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송나라때도 당연히 일부 대탐관(大貪官)이 나타났다. 그러나 어쨌든 시스템적, 제도적 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제도안배의 각도에서 보자면, 송나라때 건립한 부패방지매터니즘은 아주 주도면밀했다. 예를 들어, 공급으로 먹고 마시는 측면에서, 송왕조는 "공용전(公用錢)"제도를 마련한다. 즉, 재정에서 지방관리에게 '공용전'을 내려보내는데, 이는 공무원이 접대에 쓰는 판공비와 유사하다. 바꾸어 말하면, 송왕조는 공무원접대의 합법성과 함리성은 인정했다. 다만 기관장도 함부로 공용전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다. 반드시 공무접대에 써야 했다. 공금으로 접대할 때는 반드시 법정의 규격, 기준에 따라야 했고, 사용시에는 부직(副職)의 부서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공용장부에 기입했다. 만일 공무원접대가 법정기준을 위반하면, 관련관리는 책임을 추궁당하게 된다.
동시에 송나라정부는 "권식(券食)"제를 설립한다. 관리가 공무로 출장을 가거나, 하급정부를 시찰할 때, 정부에서는 '권식'을 발급한다. 그리고 이 권식으로 음식을 공급받는다. 어떤 직무의 어떤 관리, 어떤 상황하에서 권식을 발급할지 말지, 어떤 기준으로 발급할지에 대하여 정부는 모두 아주 상세한 규정을 두었다. "권식"의 비용은 연말에 각주의 상평주무관리 계통에서 통일적으로 정산한다. 그리고 호부에 감사를 받는다. 만일 '과다하게 사용했거나 규정에 어긋난 경우에는 중벌을 받는다."
여하한 정부이든 공무원접대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당연히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건은 어떻게 불필요하게 공금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억제하느냐이다. 송나라때 창립한 "공용전"과 "권식"제도는 아주 현대적이다. 이것은 현대국가에서 그대로 카피해서 시행할 수 있는 제도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영국의 액턴경이 한 말을 아직도 인용하여 부패가 나타나는 매커니즘을 설명한다. "권력은 부패를 부른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 기실 액튼경이 한 말의 이치는 송나라의 제도창건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송나라의 모든 제도설계는 하나의 원칙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위지방(事爲之防), 곡위지제(曲爲之制)". 현재의 말로 말한다면, 분권과 견제균형을 통하여 절대권력을 출현을 막는다는 것이다. 송나라때 사람인 여조겸(呂祖謙)은 송나라의 권력견제균형매커니즘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대신의 권한이 너무 크면, 그가 사리사욕을 도모하지 않을까 우려되어, 급사(給舍)에게 출납을 맡기고, 대간(臺諫)에게 시정을 요구하게 했고, 시종(侍從)이 순방(詢防)하게 했다." 그중 대간의 견제균형권한은 특히 강대하다. "말이 승여(乘輿)에 미치면 천자가 얼굴색을 바꾸었고, 일이 낭묘(廊廟)에 미치면 재상이 대죄(待罪)했다."
송나라는 대간의 권한이 가장 발달한 왕조이다. 감찰권을 대표하는 대단은 행정계통에서 완전히 독립된 지위를 얻었다. 송나라때 사람들은 자주 "집정"과 "대간"을 나란이 언급한다. 이를 보면 그들은 이미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행정권과 감찰권은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성격의 권력이라는 것을. 당연히 양자를 분리시키고, 대치시켜야 한다는 것을. 이것은 고전중국의 '이권분립'사상이다. 현대회사지배구조하의 '경영진'과 '감사'의 이분제와 비슷하다. 아마 이 제도도 거기에서 영감과 지혜를 얻은 것일 것이다.
강대한 대간시스템과 발달한 감찰권은 송왕조에서 가장 유력한 부패방지매커니즘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남송초기 송고종은 조령을 내린다: "만일 관리가 뇌물을 받고 법규를 어기면, 어사대는 이를 검거하여 대리시로 보내어 법에 따라 처리한다. 모든 경성의 관리, 대신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중에 송효종도 조서를 내린다: "여러 감사군수는 불법으로 재물을 거둘 수 없다. 어기는 자는 중벌에 처하고 어사대로 하여금 감찰하게 한다."
실제효과로 보면, 권력정화매커니즘으로서의 대간제도는 아주 잘 운용되었다. 송나라의 관리가 대관으로부터 부정부패로 탄핵을 받으면 통상 조사를 받게 된다. 송인종때, 소순흠(蘇舜欽)이라는 관리가 '새신회(賽神會)'라는 명절에, 기관의 낡은 신문을 팔아서, 돈을 조금 마련하여, 몇몇 동료를 불러모아 술을 마셨다. 그 결과 이 일로 대간에게 탄핵을 당하였으며, 소순흠은 '삭적위민(削籍爲民)'되고, 같이 술을 마신 사람들은 '모조리 쭃겨난다(斥逐). 소순흠은 겨우 하급관리였다. 송인종때의 재상 양적(梁適)도 대간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일을 탄핵당한다. 비록 양적은 재상의 고위직에 있었지만, 대간은 전혀 봐주지 않았고, 재삼 탄핵한다. 결국 황제도 할 수 없이 양적을 재상직에서 물러나게 한다. 유사한 사례는 아주 많다. 행정권력과 감찰권력의 권력구조하에서, 독립된 대간계통은 확실히 적시에 행정계통이 권력부패문제를 제거하는 역할을 했다.
단지 정치가 엉망인 때에는 달랐다. 예를 들어, 북송말기, 이 권력정화매커니즘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송나라사람들이 부정부패를 방지할 효과적인 제도를 만들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부정부패를 방지하는 제도는 있었다. 다만 그냥 방치되고 중단되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에 있어서, 아마도 송나라의 부패방지의 득실에서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부패를 방지하는 제도를 건립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어떻게 이 제도를 효과적으로 운용되게 하느냐에 있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나라: 대항해시대 (0) | 2015.02.10 |
---|---|
송나라의 휴무일 (0) | 2014.10.02 |
스타벅스와 비슷한 송나라때의 찻집 (0) | 2014.01.15 |
경원당금(慶元黨禁): 남송역사의 대역전 (0) | 2014.01.14 |
절가장(折家將): 북송 최고의 명장세가 (0) | 2013.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