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구(吳鉤)
오늘날 쁘띠부르조아들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 유행하는 생활습관으로 되었다. 마치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현대도시생활의 풍취를 모르게 되는 것처럼. 천년전의 송나라사람들도 현대인들이 커피를 즐겨마시는 것처럼 차를 즐겨마셨다.
개략 송나라때부터 차(茶)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없으면 안되는 일부분이 되었다. "매일개문칠건사(每日開門七件事)". 매일 문을 열면 하는 7가지 일 중의 하나로 되었다: "무릇 사람의 집에서 매일 없을 수 없는 일은 시미유염장초차(柴米油鹽醬醋茶)이다" 여기서 언급해야할 점은 송나라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법은 오늘날 끓인 물에 찻잎을 넣어서 마시는 것과 달랐다. 송나라때는 찻잎을 가루로 만들어 다시 끓인 물이 넣어서 마셨다. "연차위말(碾茶爲末), 주지이탕(注之以湯), 이선격불(以箲擊拂)"(차를 갈아서 분말로 만든 후, 끓는 물에 넣고 작대기로 젓는다). 이것을 "점차(點茶)"라고 불렀다. 일본의 말차(抹茶)는 송나라의 점차가 건너간 짝퉁이다. 일본인의 <유취명물고>에서는 "다도의 시작"은 "송나라에서 전래되어 들어왔다"고 인정하고 있다. 송나라사람들은 점차를 할 때 차분말의 품질, 수질, 화후, 차구등을 많이 따졌다.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송나라사람들은 아주 정교한 다예(茶藝)를 형성한다. 이를 "분차(分茶)"라고 불렀다. '점차'를 새로운 양식의 뛰어난 기예로 승화시킨 것이다. 고명한 분차기술은 차분말과 끓인물의 반응을 이용하여, 찻잔에 각종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도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북송 <청이록>의 기재에 따르면, "근래에 들어 끓인 찻물에 수저를 이용하여, 교묘한 기술로 차무늬와 물흐름으로 물건과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낸다. 금수, 충어(蟲魚), 화초같은 것을 정교하게 그림처럼 만들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였다. 이러한 차의 변화를 당시 사람들은 '차백희(茶百戱)'라고 불렀다."이것은 오늘날 커피숍에서 여러 모양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커피와 우유의 색깔을 조화시켜 재미있는 도안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저명한 여사인 이청조는 차예의 고수였고, "활화분차(活火分茶)에 능했다고 한다.
송나라때도 "투차(鬪茶)"가 유행했다. 다도(茶道)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몇명 함께 모여서 각각 물을 끓여서 차를 만들고, 누구의 찻잎, 찻물이 뛰어난지 누구의 차예가 더욱 뛰어난지를 겨루는 것이다. 사대부들간에서 투차가 유행한 것이 아니라, 평민들도 투차를 좋아했다. 남송화가 유송년(劉松年)의 <명원도시도(茗園賭市圖)>는 아주 생생하게 시정에서 몇몇 차상인들이 투차하는 장면을 그려냈다.
시장에서 차를 즐겨마시니, 송나라도시에는 찻집(茶坊)이 도처에 나타난다. 지금의 커피숍과 같다.<동경몽화록>에는 주작문 밖에, "남쪽의 동서 양 교방에는 나머지가 모두 주택 혹은 찻집이다. 길거리는 밤이 될 때까지 사람들이 많이 다녔다." 남송도 마찬가지였다. 오자목의 <몽량록>을 보면, 임안의 "곳곳에는 찻집이 있다"고 되어 있다. 예를 들어,유칠랑차방(兪七郞茶坊), 주고루차방(朱骷髏茶坊), 곽사랑차방(郭四郞茶坊), 장칠상간차방(張七相干茶坊), 황첨취축구차방(黃尖嘴蹴球茶坊), 일굴귀차방(一窟鬼茶坊), 대가차아차사(大街車兒茶肆)가 있다. 찻집의 이름오 아주 신선했고, 눈길을 끌었다. 광고효과가 확실했다.
찻집은 송나라 도시사회의 공공공간을 구성한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사적인 공간일 뿐아니라. 청아한 찻집은 사대부들이 친구들을 만나는 장소였다. 고급찻집은 '부잣집 자제들, 관료등이 몰려들어, 악기를 가르치고, 노래와 곡을 가르쳐서 돈을 벌었다." 대중적인 찻집은 "여러 업종의 노동자, 장삿꾼, 예인등이 모였던" 장소이다. 그리고, "건물 위에는 기녀를 두고, '화차방(花茶坊)'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었다." "군자가 머물 곳은 아니다."
고급 찻집은 장식도 우아하고 운치있게 했다. "변경의 숙식점(熟食店) 장씨는 유명한 그림을 걸어놓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식사를 팔았다. 오늘날 항주의 찻집도 그러하다. 사시사철 꽃을 꽂아놓고, 명인의 그림을 걸어놓고, 점포를 장식한다...지금의 찻집에서의 화가(花架)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기이한 소나무, 괴이한 전나무등을 놓아두어 점포를 장식했다." 오늘날 일부 커피숍, 호텔이 청아하게 보이기 위하여 유명작가의 서화작품을 걸어두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일부 찻집은 특색있는 경여을 한다. 가기(歌妓)를 두어 손님을 끌기도 했다: "여러 곳의 찻집, 청악차방, 팔선차방, 주자차방, 반가차방, 연삼차방, 변이차방, 그리고 금파교등 양하(兩河)에서 와시(瓦市)까지, 각각 차이는 있다. (가기)가 예쁘게 차려입고 문앞에서 맞이하며 웃음을 앞다투어 판다. 아침에는 노래부르고 저녁에는 연주하며, 눈과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처음 집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병을 들고 차를 올리는 사람이 있다. 한 잔에 수천씩 하지만 이를 '점화차(點花茶)'라고 불렀다. 건물에 올라가서 한 잔을 마시면 먼저 수관인데 이를 "지주(支酒)'라고 불렀다. 그 후에 주인을 불러서 마음껏 연회를 펼친다. 간진(장삿꾼), 저응(봉사원), 손님이 모두 모여들며,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든다. 혹은 다른 기생을 부르기도 한다. 길건너편이지만 가마를 불러서 타고오는 것을 "과가교(過街轎)'라 부른다."
이런 고급찻집은 품위나 가격에서 모두 오늘날의 스타벅스보다 몇 단계 위이다. 송나라사람들은 그렇다고 하여, "왜 한 잔의 차가 이렇게 비싸냐"고 묻지 않았다. 확실히 고급찻집에서 파는 것은 찻물이 아니라 격조이다. 생활방식이다. 신분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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