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경원당금(慶元黨禁): 남송역사의 대역전

by 중은우시 2014. 1. 14.

글: 우운국(虞雲國) 

 

순희(淳熙)16년(1189년), 송효종이 아들 송광종에게 황위를 넘겨준다. 이 남송의 제2대황제도 송고종의 뒤를 따라, 제2대 태상황이 된다. 누가 알았으랴 송광종이 즉위한지 3년이 되지 않아 정신병을 앓게 될 줄은. 전제정치체제하에서, 황제가 새옷을 입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당연히 황제의 머리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제3대황제는 계속하여 군림천하할 수 있었고, 군주세습제의 황당절륜한 일면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소희(紹熙)5년(1194년), 태상황이 붕어하고, 송광종은 더욱 의신의귀(疑神疑鬼)하게 되어, 상주가 되어 장례식을 주재하는 것도 거부하고, 군주제하에서 사상유례없는 인륜의 막장드라마를 연출한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조여우(趙汝愚)와 지각문사(知閣門事) 한탁주(韓侂胄)의 돈청(敦請)하에 태황태후(太皇太后) 오씨(吳氏)가 의사결정하고 주재하여, 이 '미친 황제'를 제3대 태상황으로 모시고(남송은 태상황이 풍부한 왕조이다), 그의 유일한 아들을 송영종(宋寧宗)으로 앉힌다. 이렇게 하여 황위계승의 위기는 잠시 해소된다. 이를 "소희내선(紹熙內禪)"이라고 부른다.

 

1

 

팔월, 새로운 군왕은 종실출신의 조여우를 우승상(右丞相)에 임명한다. 종실의 존엄과 상권(相權)의 무게로 군권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송나라때는 "동성가봉왕불배상(同姓可封王不拜相, 같은 성 즉 황제와 같은 조씨는 왕에 봉해질 수는 있지만 재상이 될 수는 없다)"의 가법이 있었다. 다만 송영종은 그때 진심으로 조여우에게 의지하고 있어서, 그에게 '동성지혐(同姓之嫌)'을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명령한다.

 

중추를 장악하기 전 십여년간, 조여우는 여러 군을 다니면서 친히 목격한 바 있다. 그래서 조송왕조는 "큰 건물과 같이 세월이 오래 흘렀다."는 것을 통감한다. "기둥과 서까래가 흔들리고 갈라지며, 비바람을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쌓인 폐해를 보완하고 새로 일으키는 것은 바로 지금 해야할 일이다."라는 것을 느낀다. 신황제가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그는 대유학자 주희(朱熹)를 천거하여 입조시킨다. 조정에는 진부량(陳傅良), 팽귀년(彭龜年), 섭적(葉適)등 정직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함께 나라를 다스릴만했다. 여러번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여우는 재상에 임명된다. 그를 정치적 지도자로 하고, 주희를 정신적 지도자로 하여, "여러 현명한 인물들이 조정을 채웠고, 사람들은 이를 '소원우(小元祐)'라고 불렀으며, 마치 치세의 기상을 정말 토로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여우는 먼저 이치(吏治)부터 다스리기 시작한다. 황제에게 조서를 내려 지금부터 "군,읍의 문무임직신하는 청렴한 자는 반드시 황제가 듣고, 더러운 자는 반드시 시정시킬 것이다. 고관이라고 하여 꺼리지 말고, 사적으로 따르지 말라." 전국적으로 청렴과 부정부패단속을 시작하여 '주현이 모두 잘 다스려지도록" 하고자 했다. 중앙관리의 임명에서, 첫째는 외부의 인재를 조정으로 끌어들여서, 관각의 청귀(淸貴)의 직을 맡게 했고, 개혁을 추진하는 핵심역량으로 삼았다. 둘째는 시종이 대간을 추천하는 옛 제도를 회복시켜, 군주가 사람을 잘 못알아봐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막고, 감찰계통의 생명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조여우, 주희등의 건의와 영향으로 송영종의 초기 정치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는 송광종이 궁중으로 불러들인 악인(樂人), 배우와 영관(伶官)을 모조리 내보내고, 소희조정을 어지럽혔던 환관들도 한직으로 보내버린다.

 

당연히 송녕종의 초기정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설사 조여우의 개혁이 있었지만, 여전히 경력신정(慶歷新政)때처럼 총강령이나 큰 조치가 나오지는 않았다. 비록 그러했지만, 여전히 "해내인령(海內引領), 이관신정(以觀新政)"했다. 조여우도 "경력, 원우의 옛 일을 교훈으로 삼아서" 범중엄, 사마광과 같은 상업(相業)을 이룰 것을 자신한다. 윤십월, 그의 건의하에, 송영종은 다음 해를 경원원년(慶元元年)으로 선포한다. 연호를 이렇게 바꾼 것에는 경력(慶歷), 원우(元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한 것이 경력,원우가 존경받는 이유이다; 형벌을 아끼고, 세금을 가볍게 하는 것이, 경력, 원우가 천하에 베푼 혜택이다. 짐은 조상의 업적을 이어받았다. 어찌 하루도 이를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아름다운 이름을 따서, 연호로 삼고자 한다."

 

2

 

"소희내선"때 태황태후를 제외하고 조여우는 수석집정으로 그 일을 주재하고, 한탁주는 조정내외의 연락업무를 맡았다. 또 다른 종실조신인 조언유(趙彦逾)도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새로운 군주가 논공행상을 할 때, 조여우는 조언유에게 말한다: "우리는 종실이니 공을 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그리고 한탁주에게는 "나는 종실지신이고 너는 외척지신이니 어찌 공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한탁주를 단지 추밀도승지(樞密都承旨)로 승진시킨다. 이는 추밀원에서 황제의 명령의 전달을 책임지는 종오품(從五品) 무관자리이다. 주희와 섭적은 모두 이렇게 일깨워준 바 있다: "한탁주의 원망이 아주 심하다. 마땅히 그의 노고를 후한 상으로 내리는 것이 좋다. 외직의 고위직으로 내보내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여 후환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조여우는 "재상으로서 명성을 중시하여, 조장의 관작을 인정에 따라 처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인심이나 관리기풍은 이미 경력때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정직이 초래하는 것은 단지 관직에 나가고자 하는 자들의 원망뿐이었다. 사람들은 조여우가 권모술수를 모르고,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재단한다고 말한다. "충성은 남을 정도이지만, 지모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이 바르고 정치가 곧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조여우와 싸울 때, 한탁주에게는 두 가지 우세가 있었다. 첫째, 그는 송영종의 한황후의 외척이다. 외척과 종실간에 선택할 때, 군주는 왕왕 황위에 대한 위협이 동성종실이 이성외척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절실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많은 경우 외척과는 가까이 지내고, 종실은 멀리한다. 둘째, 한탁주는 지각문사와 추밀도승지등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획련폐부(獲聯肺腑), 구시금밀(久侍禁密)" 그는 재상보다도 황제와 더욱 가까웠던 것이다. 내정과 의사소통하는데 훨씬 편리했다. 송영종은 조서를 반포하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내비어필(內批御筆)하는 방식을 좋아했는데, 더더구나 이에 관여하기 편리한 점이 있었다.

 

팽창하는 권력욕과 균형을 잃은 복수심은 한탁주로 하여금 정쟁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는 먼저 어필을 거짓으로 만들어, 대간(臺諫)을 장악한다. 같은 당파인 사심보(謝深甫)를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앉히고, 같은 일당인 유덕수(劉德秀)를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앉힌다. 송나라때 대간은 정치를 논하고 탄핵하는 이중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여론을 좌우하여 적수에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정쟁의 쌍방은 모두 그 힘을 빌려야 했다. 얼마후 한당(韓黨)은 줄줄이 관직에 들어오고, 언로에서 선수를 장악한다.

 

그해 말, 조언유는 외직을 받아 조정을 떠난다. 집정의 꿈이 사라질 지경에 처하자, 그는 반조파(反趙派) 진영으로 들어간다. 황제에게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할 때, 그는 명단을 하나 내놓는다. 그리고 송영종에게 말한다: "노신은 이제 떠납니다. 폐하에게 한 말씀 드릴 것인 이들이 모두 조여우의 일당입니다." 조언유와 조여우는 모두 종실이고, 같이 의사결정을 한 사람이다. 그의 모함은 살상력이 있었다.

 

주희는 개혁파의 영혼으로서, 황제에게 수업을 하는 경연강관(經筵講官)이다. 이것은 한탁주로 하여금 위협이 지척에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온갖 머리를 짜내어 송영종이 주희에게 반감을 갖도록 만든다. 그리고 다시 어필을 빌어 그를 경연관에서 파직시키고, 고향집으로 돌려보낸다. 조여우가 이를 알고는 어필을 되돌려주며, 자신의 재상직을 파직해달라는 말로 간청하여, 황제의 명을 회수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송영종은 노기가 가라앉지 않았고, 그가 주희를 도와 군명을 거역하려 한다고 여겼다.

 

주희를 파면한 것은 한당의 혁신파에 대한 정면공격이 개시된 것을 의미한다. 졸지에 파란이 일어난다. 이부시랑 팽귀년은 송영종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탁주와는 양립할 수 없다." 송영종은 양난의 지경에 처한다. 한탁주는 황후의 외척이고, 팽귀년은 동궁사보(東宮師保)이다. 그래서 둘 다 파면하려고 생각하낟. 조여우는 이 논의를 적시에 진행하지 못한다. (팽귀년을 희생하는 것을 댓가로 한탁주를 조정에서 몰아내는 것은 전략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었음에도). 오히려 한탁주를 경성의 궁관(宮觀)으로 보내고, 팽귀년을 원직에 두는 것으로 건의한다. 이렇게 하여 한탁주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다. 송영종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만 한탁주의 활동으로 내놓은 내비(內批)에는 한탁주는 경성의 궁관으로 가고, 팽귀년은 지방에 임직하는 것이었다. 조여우는 다시 팽귀년을 남도록 청했지만, 송영종에게는 이미 더 이상 상의할 여지가 없었다. 한탁주는 명목상으로는 궁관의 한직으로 물러났지만, 실제로는 황제를 좌우했다. 그의 뜻에 따라, 재상의 조직에 큰 조정이 일어난다. 조여우는 이미 고장난명(孤掌難鳴)의 상황에 처한다.

 

연말연초, 조여우에 대한 유언비어가 확산된다. 내선이전에 "삼군사서는 조상공(조여우를 가리킴)를 추대하고자 준비했다"라든지, 태학에서 '낭군불령(郎君不令, 즉 송영종이 총명하지 못하다)"을 이유로 태학생이 조여우를 백부로 모시자고 한다는 등등이다. 경원원년(1295년) 이월, 조여우는 스스로 더 이상 포부를 펼칠 수 없다고 보고, 재상직을 사직하고자 할 때, 우정언(右正言) 이목(李沐)은 각종 유언비어를 한데 묶어서 탄핵상소를 올린다. 조여우는 "동성(조씨)으로 재상의 직위에 있는데, 이는 조종의 전고가 없는 일이다; 태상황의 성체가 좋지 않을 때, 주공이 되고자 했다; 허성에 의존하여 사당을 심고, 정책을 스스로 결정하고, 공로를 혼자서 독차지 했다"고 한다. 조여우는 자신이 탄핵당한 것을 알고 조여우는 관례에 따라 죄를 기다리며 파면시켜줄 것을 청했다. 송영종은 소문으로 들은 유언비어와 조언유가 조정을 떠날 때 모함한 일을 연계시켜, 철저히 한탁주에게 기울고, 조여우를 재상에서 파명하는 조서를 내린다.

 

이번 정쟁에서 비록 한탁주는 외척이고, 조여우는 종실이지만, 외척과 종실간의 싸움이라는 성격은 갖추지 않았다. 한탁주는 정적의 특수한 신분(종실)을 들어 그를 들어냈는데, 이는 단지 타격의 핑계일 뿐이었다. 이 구실은 송영종에게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설사 "불령"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방비심리는 약하지 않았다. 황위에 대한 위협과 비교하면, 한때 표방했던 "경원신정"은 이미 머리 속에서 멀리 사라진 다음이었다.

 

3

 

조여우가 재상에서 파면되자, 조야의 반향은 적지 않았다. 조여우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강렬했고, 그 기세도 대단했다. 이는 한탁주가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태부시승(太府寺丞) 여조검(呂祖儉)이 앞장서서 송영종에게 경고한다: "정권이 앞으로 행문(倖門, 간사한 소인배)에게 돌아갈 것이다"; "신은 이후에 천하가 말을 하고자 할 때 이번 일을 반면교사로 삼는 경우가 많을 것을 걱정합니다. 입을 닫고 혀를 묶는 기풍은 한번 형성되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어찌 국가에 이롭다고 하겠습니까." 글을 올린 후, 이 "촉군소이도화기(觸群小而蹈禍機)"의 두려움없는 지사는 유배의 길을 당당하게 떠나고, 유배지에서 다음 해에 사망한다.

 

한탁주는 겁을 주는데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강을 막는 것보다 어려웠다. 여조검이 유배간 후 3일째 되는 날, 태학생 양굉중(楊宏中)이 동학(同學)에게 말한다: "스승이 대신의 억울함을 변론하는데, 학생이 스승을 남겨두고 떠날 수 있는가? 그게 의로운 일인가?" 그의 창의로 상소문을 만든다. 태학생 주단조(周端朝), 장도(張道), 임중린(林仲麟), 장부(蔣傅), 서범(徐範)등이 자원하여 가잆한다. 장부는 정기늠름한 상소문을 작성하고 6명이 공동으로 서명한다. 그날 밤 한탁주가 이를 알고 중죄에 처하겠다고 공언한다. 친구들은 서범에게 개입하지 말라고 하나 그는 분연히 말한다: "이미 이름을 썼는데 어찌 바꿀 수있는가?" 다음 날 양굉중등 6명은 궁궐앞에 엎드려 상소문을 올린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자고이래로 국가의 화란은 소인이 군자을 중상모략하는 데서 나옵니다. 당고는 한나라를 망쳤고, 붕당은 당나라를 해쳤습니다. 대체로 이러합니다. 원우이래로, 정(正)과 사(邪)가 서로 공격하여 마침내 정강지변이 일어났습니다.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다면, 폐하는 차마 듣지 못할 것입니다. 간관인 이목은 전 재상 조여우를 무고하였는데, 이는 폐하에게 불리합니다. 하늘의 말을 듣지 않고 가리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폐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신다면 점차 고립되고, 후회막급하게 될 것입니다."

 

상소문이 올라갔는데, 마치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다로 들어간 듯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학생들은 부본을 각 시종, 대간에게 뿌린다. <사조견문록>에 따르면, 한탁주는 비록 대노하여, "그 우두머리의 목을 베고자 했지만" 단 "선비를 감히 죽일 수는 없어서 계책을 세워 그를 죽이기로 한다" 송영종은 조서를 내린다. "함부로 상소문을 올려 국사를 뒤흔든다."는 죄로 6명을 500리밖으로 편관(編管)한다. 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일(鄧馹)은 조서를 돌려주며, "국가는 태학을 만든 이래로, 여러 조에서 상소를 올려서 말하는 학생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어 죄를 물은 적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본관 혹은 다른 주로 가서 공부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청독(聽讀, 감독하에서 학업을 계속하는 것)"으로 처벌이 낮추어진다. 새로운 임안지부 전상조(錢象祖)도 한당이었다. 그는 그날 밤에 바로 이들 학생을 체포하여, 강제로 폄소(貶所)로 압송한다.

 

태학생의 상소는 인심을 정확히 반영하는 외침이었다. 그들의 호연정기(浩然正氣)와 무외용기(無畏勇氣)는 세상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경원육군자(慶元六君子)"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는다. 송나라때, "정강(靖康)이래,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여러 학생들이 대궐문을 두드리며 대궐앞에 엎드려 위언(危言)도 꺼리지 않았다. 비록 일시적으로 간신에게 억압받지만, 시간이 흐르면 공론이 펼쳐지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한탁주의 교사하에, 유덕수는 상소를 올려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으로 모함한다. 그리고 조정사대부들의 "진위(眞僞)를 검사하고, 정사(正邪)를 판별하도록" 할 것을 요구한다. 사상적으로 소위 "진위"를 가린다는 것을 당쟁중의 소위 "정사"의 구분과 억지로 함께 연결시킨 것이다.이를 통하여 정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죄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어사중승 하담(何澹)은 유덕수가 먼저 채찍을 든 것을 보고 도학을 금지하도록 주청을 올린다. "분명히 조서를 내려 대신들중 마땅히 제거할 자를 제거하도록 할 것"을 청한다. 진위를 가리는 기초 위에서 조정대신에 대한 대숙청을 하고, 이를 통하여 조여우, 주희의 문하인 저명한 인사들은 일망타진하고자 한 것이다.

 

조여우에 대한 유언비어는 갈수록 기이해진다. 그가 태상황을 도와서 소흥으로 가서 소희황제라 칭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나온다. 즉위때 송영종은 이미 "불효의 이름을 짊어지게 될까봐 우려하여" 태상황과는 비록 부자간이지만, 조여우가 소희황제를 복벽시키려는데 대하여 미묘한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여우는 마침내 영주(지금의 호남성 영릉)에 안치된다. "안치(安置)"라는 것은 범죄를 저지른 관리를 지정한 거주지에 거주하게 하고, 자유를 상대적으로 제한하는 처벌조치이다.

 

귀양을 가는 길에 조여우는 가족에게 말한다. "한탁주의 뜻은 반드시 나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너희는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는 길에, 그는 약간 병갈(病渴)이 나타난다. 의사는 열증(熱症)으로 오진하여, 한제(寒制)를 쓴다. 소상을 배를 타고 지날 때, 조여우는 뱃머리에 서 있었는데, 생각이 복잡했다. 멀리 눈이 내리는 산을 바라보며, 한기를 느낀다. 경원2년 정월, 형주(지금의 호남성 형양)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미 병이 가볍지 않았고, 주수 전무(錢鍪)는 상사의 뜻에 영합하여, 그에게 갖은 굴욕을 안긴다. 조여우는 약을 먹고 급사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약 속에 빙뇌(氷腦)를 넣었다고 한다. 즉 독살당했다는 것이다.

 

4

 

영구차가 조여우의 관을 싣고 고향 여간(余干, 지금의 강서성 여간 서북)으로 가서 안장된다. 그의 영구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주민들이 길거리에 나와 향을 사르며 절을 했다. 평향(萍鄕)은 전체 성의 백성들이 대나무가지로 종이돈을 문앞에 걸어둔다. 영구차가 지날 때 종이돈을 불사른다. 전체 평향성은 연기로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심지어 멀리 사천, 복건의 "깊은 산, 골짜기에서 과부와 아이들까지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해 마지 않으며 눈물을 흘렸다."

 

부고는 임안에도 전해진다. 정직한 인물들은 고압적인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만장(挽章)을 하고, 서로 조문하고 곡을 했다. 그리고 큰 글자를 도성의 관궐(觀闕) 위에 걸어둔다." 대내의 궁전 담장의 바깥과 행재성문아래는 거의 매일 추모시가 붙어 있었다. 한당은 진압하고자 했으나, 작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들 익명시는 대부분 태학생의 손에서 나왔다. 가장 널리 알려진 태학생 오도손(敖陶孫)은 임안주루에 이런 시를 건다:

 

좌수선건우전곤(左手旋乾右轉坤), 여하군소자유언(如何群小諮流言)?

낭호무지거희단(狼胡無地居姬旦), 어복종천조굴원(魚腹終天弔屈原).

일사고지공소흠(一死固知公所欠), 고충행유사장존(孤忠幸有史長存).

구원약견한충헌(九原若見韓忠獻), 휴설거가말대손(休說渠家末代孫)!

 

시편은 조여우가 위기국면을 전환시킨 시책의 공로를 칭송하고, 그를 성왕을 보좌한 주공에 비유했다. 그리고 회왕에게 쫓겨난 굴원에 비유한다. 마지막 련은 한탁주가 그의 조상을 뵈러갈 면목이 없을 것이라고 통박한다. 바로 북송의 명신 한충헌 한기(韓琦)이다.

 

정치적인 고압하에서,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그래도 저울이 있었다. 이번 정치투쟁에서, 공정한 인심은 명백히 조여우의 편이었다. 비록 그가 정권을 잡은지는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독능분불여신(獨能奮不慮身), 정대계어경각(定大計於傾刻)"했다. 그리하여 남송은 군권이 방기될 엄중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의 뜻은 폐정을 시정하는 것이었다. "명덕의 선비를 불러들여, 송영종의 신정을 보좌하고, 천하를 잘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는 비록 경력, 원우 같은 경세의 사업을 성취시키지는 못했지만, 조야의 인심은 그와 한탁주간에 정치에서와 사람됨에서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긍게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특히 그 후에 한탁주의 전정(專政)과 사미원(史彌遠)의 전정을 겪으면서, 모두 "조여우가 죽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하게 된다.

 

5

 

조여우가 죽은 후, 당금(黨禁)은 더욱 심해진다. 한당은 먼저 관리들이 옮길 때나 학생이 과거시험을 볼 때 반드시 "만일 위학이면 기꺼지 조정의 처벌을 달게 받겠다"고 표시하게 한다. 이어서 다시 "위당"을 "역당(逆黨)"으로 승격시킨다. 사상정치적인 이견을 충역지변(忠逆之辨)의 최고심판대에 올려놓는다. 정적이 주심(誅心)과 주신(誅身)의 이중판결을 받게 하였다. 이것은 중국전제정치체제하에서 반대파를 박해하는 통용수법이다. 마지막으로, 한당은 "위학역당"의 블랙리스트를 내놓는다. 여기에는 59명의 이름이 열거된다. 비록 적지 않은 도학자가 있었지만, 약 3분의 1의 인물은 소위 도학과 전혀 관계가 없다. 일찌기 직접, 간접적으로 한탁주 혹은 그의 일당에 밉보인 사람들이다.

 

가태2년(1202년)에 이르러 8년에 걸친 혹렬한 당금이 기본적으로 해동된다. 그러나 이미 남송후기의 역사에 극히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전의 송나라 당쟁은 대부분 정견지쟁(政見之爭)의 범위내였다. 경원당금의 발동자는 당쟁을 도학지쟁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한다. 정적이 주장한 도덕규범, 가치관과 행위방식을 왜곡하고 추화하는 전제하에서 정권의 힘을 빌어 전면적으로 성토하고 철저히 소탕한다. 그것이 향하는 바는 바로 사대부가 오랫동안 안신입명(安身立命)했던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시비는 전도되고, 이어서, 일반 사대부중에서 보편적인 가치위기와 도덕실범이 나타난다. 경원,원우연간에 "천하를 자신의 임무로 여긴" 그런 기풍은 전혀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소희이전의 정풍, 사풍과도 같은 반열에서 논할 수 없게 된다. "소희이전에 일시으 풍속이 좋았다. 선비들은 시정을 얘기하기를 좋아하고, 관리는 공명을 세우는 것을 좋아했다. 경원당금이후, 세속은 네모를 원이라고 하고, 진짜를 가짜라고 하고, 기풍을 망치는 폐해가 말할 수 없이 많았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당금이 일어날 때, 송영종은 비록 암약무능(暗弱無能)하지만, 전제군권을 대표했다. 바로 그의 최종방향전환으로 직위가 겨우 5품에 불과한 한탁주가 재상 조여우와의 당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후 6,7년간, 송영종은 한탁주에게 맡겨서 도행역시(倒行逆施)하고, 한탁주는 하고싶은대로 하면서 조정을 농단하고, 정적을 배척하며 권신의 길로 들어선다. 당금이 완화된 날, 그의 권신의 기세는 이미 중천에 뜬 해와 같았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군자지맥기삭(君子之脈旣削), 소인지세수성(小人之勢遂成)". 한탁주의 권력독점은 남송후기에 연이은 권상전정(權相專政)의 시작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경원당금은 남송역사상 대역전의 시발점이라 하더라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