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작비비(黃雀飛飛)
조광윤은 무장출신으로 후주(後周)의 시가(柴家)로부터 천하를 빼앗았다. 그는 당왕조, 오대시기 번진작란(藩鎭作亂)이 역사교훈을 얻어, 무인세력을 극력 억제했다. 그래서 송나라때 무장은 시종 문인의 억압하에 있었다. 정치권력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은 아주 적었다. 이 방면에서 정국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으나, 송왕조의 군사상 취약함을 보였고, 외족의 침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은 몽골의 손에 망한다.
난세에 영웅이 나오는 법이다. 대송왕조는 비록 군사적으로 약했지만, 외족과 장기간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많은 명장이 나타난다. 특히 연의소설 <양가장>, <악비전> 및 그 후의 문학, 예술작품에서 양가장, 악가장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남녀노소가 모두 알게 된다. 그래서 송나라의 명장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양가장과 악가장을 떠올린다. 그러나 대송왕조의 진정한 장문세가는 당시에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나, 지금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절가장(折家將)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절가장은 전후로 8대에 걸쳐 근 200년간간 지속되었다. 만일 오대이전까지 계산한다면 역사는 더욱 유구해진다. 중국제일장문세가라 할 만하다.
절가장은 오대시기의 명장 절종완(折從阮)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원래 선비족 척발씨의 후예이다(당항족 혹은 강족이라는 설도 있다). 절가는 운중(雲中, 산서성 대동)의 명문거족이고 무장세가이다. 절종완은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이래 계속하여 부주(府州, 지금으 섬서 부곡현)을 근거지로 하여 중원정권이 서북을 맡아왔으며 여러번 거란을 물리쳤다. 주세종(周世宗)때, 절종완은 분녕절도사(汾寧節度使)가 되고, 아들 절덕의(折德扆)는 영안군절도사(永安軍節度使)가 되어 부자가 모두 변방의 장수가 된다.
제2대 절가장은 절덕의, 절덕원(折德願) 형제이다. 절덕의는 장남이고, 어려서부터 군대에 들어간다.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는 것으로 이름을 날린다. 북송초기, 형제 2명은 부주를 지키며 거란인들을 막아냈고, 여러번 적군을 격파하고 장수를 죽였다. 절덕의는 젊었을 때 이미 영안군절도사를 맡아, 부주의 군무를 책임진다. 전설에 따르면, 절덕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명장 양업(楊業)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이여자가 바로 대명이 자자한 사태군(佘太君, 折太君)이라고 한다.
제3대 절가장의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절덕의의 아들인 절어훈(折御勛), 절어경(折御卿) 형제이다. 절덕의가 임지에서 죽은 후, 절어훈은 분주단련사, 권지부주사가 되고 나중에 태녕군절도사(泰寧軍節度使)가 된다. 태평흥국2년에 사망한다. 절어경은 형을 도와서 부대를 통솔하며 전공을 많이 세운다. 순화3년, 군공으로 부주관찰사에 오른다. 순화5년, 영안군절도사가 된다. 그리고 거란의 대장 한덕위(韓德威)를 대파하고 오천여수급을 획득한다. 한덕위는 '겨우 몸만 빠져나간다" 얼마후, 절어경은 병세가 위중해지고, 한덕위는 그 기회를 틈타 복수하고자 한다. 한덕위는 무리를 이끌고 기습한다. 절어경은 병구를 이끌고 출전한다.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모친이 사람을 보내어 돌아오라고 하자, 절어경이 말한다: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었는데, 변방의 오랑캐는 아직도 모두 없애지 못했다. 이것은 어경의 죄이다. 지금 적을 앞에 두고 병사를 버리고 간다면, 안될 일이다. 군중에서 죽는 것이 본분이다. 태부인에게 말씀드려 나를 걱정하지 말라고 해달라. 충효는 둘 다 이룰 수는 없다.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린다. 다음 날 사망한다. 나이 38살이었다." 그의 충의는 감탄할 만하다.
제4대 절가장의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절유신(折惟信), 절유창(折惟昌), 절유충(折惟忠) 형제이다.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절유신은 전투에 용맹했고, 절유충은 군대를 잘 다스렸으며, 절유창은 지용을 겸비했고, 사격술이 정교했으며 여러번 공을 세웠다. 절유신, 절유창은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한다. 절여충도 영안군절도사의 직위에서 사망한다.
제5대 절가장의 주요 인물은 절계세(折繼世), 절계조(折繼祖), 절계민(折繼閔)등이다. 모두 서하와 싸운 명장이다.
제6대 절가장으로는 절극행(折克行)이 가장 유명하다. 그는 명장 종악(種諤)을 따라 서하군대를 막아낸다. "서하인과 크고 작은 백칠십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절극행신도비>), "매번 나서면 반드시 이겼고, 서하인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익좌상병은 절씨가 전적으로 맡았다."(<송사>)
제7대 절가장으로는 절가대(折可大), 절가존(折可存), 절가적(折可適), 절가구(折可求)등이 있다. 절가존은 동관(童貫)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방랍의 반란과 송강의 반란을 진압한 적이 있다. 절가적은 종악을 따라 출전하였고, 용맹하고 지혜가 많아서 강족,서하 연합군 10만의 무리를 대파한 바 있다. 북송 서북변방에서 드물게 보는 대승리였다.
제8대 절가장 중에는 절언질(折彦質), 절언야(折彦野), 절언문(折彦文)등이 모두 일시의 명장들이다. 북송,남송의 교체기에 천하는 대란에 빠진다. 절언질은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금군에 대적한다. 나중에 송고종을 따라 남하한다. 관직에 30여년 있었다. 절언문은 패전하여 금나라에 투항한다. 금나라사람은 그를 여전히 부주를 진수하도록 보내어 서하군과 대치하게 한다.나중에 서하와의 관계가 개선되자, 그를 청주로 이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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