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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모순론>은 표절인가?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적화(翟華) 

 

 

 

어제 해외중문웹사이트에는 이런 소식이 실렸다: 모택동의 <모순론>은 '문혁'기간중에 표절혐의가 발견되었다고. 원래 이처럼 놀라운 소식은 통상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민망에 발표된 남개대학(南開大學) 교수 유택화(劉澤華) 교수의 글이 붙어 있었다. 

 

유교수의 글은 원래 <염황춘추> 2013년 제9기에 실린 것으로 "나의 문혁중의 사상역정"의 한 부분이다. 유교수의 글은 다음과 같다.

 

--<모순론>은 표절의 혐의가 있다.

 

1970년 가을, 우리는 점차 중천에 뜬 해와 같던 진백달(陳伯達)이 찍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가 "가짜마르크스주의"이고 "마르크스주의의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깜짝 놀랐다. 이런 주장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는 진백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찍혀나간다는 것에 대하여 통쾌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다만 의문도 일었다. 그는 중앙문혁소조 조장인데, 그의 이론과 행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나는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1971년 여름, 학교 혁명위원회 선전부서는 몇 사람을 조직해서 진백달의 가짜마르크스주의이론을 청산하고자 했다. 소집인은 우성희(牛星熙)이고, 구성원은 경제학과의 곽사호(郭士浩), 철학과의 봉육창(封毓昌), 그리고 필자 이렇게 모두 4명이었다. 당시는 아주 비밀스럽게 했고, 대외적으로 기밀을 유지했다. 도서관은 우리에게 방을 한 칸 내주었으며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직접 서고에서 책과 잡지, 신문을 찾았다. 당시는 한여름인데, 문을 열어 통풍시킬 수가 없어서 더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는 진백달의 가짜마르스크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의 언론을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필자는 상부의 지시를 명확히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우리 자신이 만든 몇 가지 원칙은 있었다. 주로 아래의 몇 가지이다: 첫째, 모주석과 임부주석(우리는 당시 진백달을 제거하는 배후가 임부주석을 제거하려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모주석이 비준한 글이나 인정한 것은 열거해서는 안되고, 문제를 찾아내서도 안된다. 둘째, 문화대혁명의 이론, 방침과 노선에 손상이 가서는 안된다. 진백달의 관련 문장과 강연중 중앙문혁소조를 대표한 것은 비판할 수 없다. 셋째, 진백달의 과거 저작은 아주 많았다. 중앙지도자가 긍정한 것 혹은 중앙을 대표한 문자는 가볍게 건드릴 수 없다. 예를 들어, <사대가족>, <인민공적장개석>등등이다. 이 3가지 원칙을 가지고 하다보니, 우리는 무슨 "가짜"나 "반"의 문제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우리 4명은 피차간에 서로 알고 있었지만, 상호간에 깊은 교분은 없었다. 누구도 쓸데없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경계선'을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진백달을 비판한다고 하면서 '문혁'을 겨냥한다,모주석의 혁명노선을 겨냥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그래서 정리의 중점을 진백달의 초기저작에 두었다. 우리는 진백달에 대한 과거행적을 많이 알지 못했다. 그리고 적절한 색인도 없었다. 그저 그가 1930년대 북경, 천진에서 선생으로 있었고, "신계몽"을 한 바 있으며, 일부 글을 썼다는 것이다. 일부 의심가는 서적과 간행물을 최대한 찾아서 살펴보았다. 그중 <사회학대강>이라는 책이 있는데, 서명은 없었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이론의 저작에 속했다. "하북상전(河北商專)"의 교재였고, 석인본(石印本)이다. 개략 1930년대 초기에 인쇄된 것이다. 진백달은 그 당시 북경, 천진 일대에서 활약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이 아닌지 의심했다. 이 책은 봉육창이 검토한다. 이 책은 주로 유물론과 변증론을 논술했으며, "모순"문제를 논술하는데서, 봉육창은 모택동의 <모순론>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감히 떠들 수가 없어서 조용히 나에게 보여주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모순의 보편, 주요모순, 모순의 주요방면등의 관점을 논술하는데서 어떤 문구는 거의 같았다. 우리 두 사람은 몰래 상의했다. 다른 두 사람에게 알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나는 얘기하자고 했다. 우리는 집단이므로, 말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골치아플 수 있다고 했다. 봉육창도 나의 의견에동의하여, 우성희와 곽사호도 보게 된다. 4사람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고,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먼저 문제를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성희는 소집인이다. 네 사람은 상의한 후 2가지를 정한다: 첫째, 확산시키지 않는다. 둘째, 책을 봉존(封存)한다. 필자는 당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위대한 지도자의 대표적인 저작이 원래 표절한 것이었다? 1970년대말에 이르러, 나는 여러번 봉육창에게 이 일을 확실히 하자고 건의했고, 봉육창은 시간을 들여서 <사회학대강>의 작자는 양수봉(楊秀峰)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양수봉은 당시 교수이고 이미 공산당원이었다. 1949년후 하북성 성장, 교육부 부장, 최고법원 원장을 지냈고, '문혁'후에는 전국정협 부주석등을 지낸다. 봉육창은 양수봉에게 서신을 보내어 물어본다. 양수봉은 비서를 시켜 봉육창에게 회신한다. 이 책의 작자는 양수봉이라고 확인해분다. 다만, 동시에 양수봉의 의견도 전달한다. 이 일은 꺼내지 말라고. <사회학대강>의 논술은 그의 창작물이 아니고, 소련학자의 글에서 베껴온 것이다. 나중에 나는 여러번 봉육창에게 학술사의 각도에서 이 일 써줄 것은 요청했지만, 그는 항상 기다리라고만 하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이제 그와 나는 모두 늙었다. 그는 나보다 귀가 더 심하게 안들린다. 거의 총명함을 잃었다. 나는 쪽지를 써서 그에게 사정을 공표하자고 했다. 그도 쪽지로 회답했다:<사회학대강>을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또 말했다. 늙었다. 골치거리를 만들지 말라. 그래서 봉육창이 먼저 발견한 것을 내가 끼어들기는 적절하지 않다. 혹시 다른 사람들 중에서 이 일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는가?

 

유교수의 이 글을 읽고 몇 가지 의혹이 들었다. 첫째, 양수봉은 법률계 인사이다. 건국초기에 유청산, 장자선의 부정부패사건을 처리한 바 있다; 그는 또한 교육가이다. 1960년대에 "고교육십조", "중교오십조", "소교사십조"를 초안했고, <교육문선>, <교육논문집>등 저작을 썼다. 그의 경력으로 볼 때 1930년대에 철학방면의 저술을 썼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둘째, <사회학대강>이라는 책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작자는 양수봉이 아니라, 유명한 중공의 1대대표이자 저명한 철학자인 이달(李達)이다; 그리고, 이달이 쓴 <사회학대강>은 현재 찾기 어렵지 않다.

 

책의 서문기재를 보면 이달이 쓴 <사회학대강>은 개략 1930년대초기에 썼고 1937년 4월 1일 완성된다. 5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중 가장 두터운 것이 제1편 '유물변증법"(근 400페이지)이다. 그중 제3장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제3장: 유물변증법의 제법칙

 제1절: 대립통일의 법칙

 제2절: 양에서 질로, 질에서 양으로의 변환법칙

 제3절: 부정의 부정법칙

 제4절: 볼질과 현상, 내용과 형식

 제5절: 필연성과 우연성, 현실성과 가능성, 법칙과 인과성.

 

이달의 <사회학대강>은 상해서점에서 1989년에 출판된 <민국총서>에 수록되어 있고, 인터넷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모택동의 <모순론>은 1937년 8월에 완성된다. 시간적으로 이달의 <사회학대강>보다 약간 늦다.

 

내용을 보면, 모택동의 <모순론>은 얇은 20여페이지이고 대립통일, 양과 질의 변화등 철학개념을 언급하였지만, 더 많은 것은 당시의 반제,반봉건, 반국민당의 실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택동이 이달의 이론을 표절한 것인가? 아마도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것같다. 왜냐하면 이달도 <사회학대강>의 서언에서 이 책은 '편찬'한 것이라고 하였고, '새로운 창견(創見)은 없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이달도 국외의 이론을 참고한 것이다. 만일 오늘날의 기준으로 엄격히 말하자면, 이달, 모택동은 모두 '표절'의 혐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