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효민(智效民)
2013년 12월 12일은 서안사변 77주년기념일이다. 77년전에 장학량(張學良), 양호성(楊虎城)이 장개석을 구금한 후, 연안에는 무대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공개재판을 통하여 장개석을 처형할 생각이었다. 다만, 왜그런지 2,3일후, 연안측에서는 장학량에게 장개석을 풀어주라고 한다. 그리고, 서안사변후, 왜 장학량은 장개석을 모시고 남경으로 돌아가고, 그 이후 입을 꽉 다물게 되었을까? 이들 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최근에 <장정불회고록(蔣廷黻回憶錄)>을 읽어보았는데, 소련당국의 서안사변에 대한 반응이 있었다. 그것은 위에 언급한 의문을 풀어주는 하나의 단서이자 해석을 제공해주는 것같다.
장정불(1895-1965), 호남 소양사람이다. 일찌기 미국에 유학가서 컬럼비아대학의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다.귀국후 남개대학, 청화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호적(胡適)등과 함께 <독립평론>을 창간한다. 나중에 행정원 비서장 옹문호(翁文灝)의 추천을 받아 학자의 신분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행정원 정무처장이 된다. 1936년, 그는 중국주소련대사가 되고, 11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떠나기 전에, 송미령(宋美齡)이 그에게 말한다. 장개석은 멀리 소련이 있으나 소식이 없는 큰아들을 그리워한다고. 그렇게 하여 소위 "가사국사천하사(家事國事天下事)"로 그 임무는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
1개월여후, 장정불은 뉴스에서 서안사변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다. 그날 밤, 공상희(孔祥熙)와 옹문호가 연명으로 전보를 보내어, "공군이 서안지구를 정찰한 결과, 장학량은 이미 서안의 각처에 홍기(紅旗)를 게양한 것을 발견했다." 전보에서는 그에게 즉시 "소련측에 평안하게 장위원장이 석방되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하라는 것이었다. 이 지령에 대하여 장정불은 아주 난감해 했다. 그는 소련당국이 그 요청을 분명히 거절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승인하는 거이 된다: 장학량과 그 일당은 소련의 명을 듣고 있다.
다음날 일찍, 이즈베스티야와 프라우다에서는 서안사변소식을 눈에 띄는 곳에 실었다. 이것은 장학량과 왕정위(汪精衛)가 합작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것에 대하여 장정불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는 알고 있었다. 왕정위, 장학량의 정치적 견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왕정위는 여하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일본과 평화롭게 지내고자 하지만, 장학량은 즉시 대일작전을 바라고 있었다." 다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통신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장개석을 감금하는 문제에 있어서, 관련방면에서 소련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런 소련의 큰 물이 중국의 용왕묘를 치는 국면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소식 가운데, 장정불은 소련당국이 장학량의 행동을 아주 반대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남경정부의 재촉하에, 장정불은 할 수 없이 마음을 가다듬고 소련의 외무장관 리트비노프를 찾아간다. 그는 리트비노프에게 말한다: "장학량 및 그의 일당은 모두 소련을 아주 믿고 있다" 만일 외무장관께서 의견을 얘기해주면 사번의 해결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리트비노프는 즉각 말을 막는다. 그는 말했다: "소련정부와 장학량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소련측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변의 진상을 보도하는 것이다." 리트비노프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소련의 우호적인 의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의심을 받고 있다고. 이에 대하여 그는 이미 소련주중국대사에게 중국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도록 명령했다고 했다.
며칠 후, 장정불은 다시 소련의 외무장관을 예방한다. 이번에 리트비노프는 더욱 격분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련정부는 장학량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발표한다. 장정불은 "장학량이 제3국제가 키우는 통일전선분자이다"라고 지적하자, 그는 목소리를 높여서 소리친다: "우리는 제3국제의 주인이 아니다.....모스크바는 제3국제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다." 이처럼 "이곳에 은삼백냥이 묻혀 있지 않다"는 거짓말에 대하여 장정불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서안사변이 최종적으로 스탈린의 감독하에 해결된 것을 장정불은 당시에 몰랐다고 한다. 여러해 이후 이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의 소련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여 이렇게 결론내린다: 서안사변은 중일전쟁이 조기에 발발하도록 촉진했다. 이것은 소련이 희망하는 것이다. 왜 소련은 중일간에 전쟁이 발발하기를 희망했는가? 이 전쟁은 일본이 소련으로 진공할 가능성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일 장항량의 생각대로 장개석을 죽인다면 아마도 왕정위가 정권을 잡을 것이고, 중일양국은 동맹을 맺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아마도 소련에 진공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스탈린은 서안사변에 아주 반감을 가진다. 이것은 소련이 왜 장학량과 왕정위를 동일시했는지, 왜 중국항전을 원조하고자 하였는지의 근본원인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것도 서안사변의 막후거래라고 말한다.
1950년,호적은 일찌기 장문의 글을 쓴 바 있다. 제목은 <스탈린 책략하의 중국>이다. 이 글은 서안사변을 얘기하면서 Smedley(중국명 "史沫特萊")의 말을 인용했다: 장위원장 일행이 서안을 떠난 후, 한 무리의 젊은 동북 장교와 구국회 지도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속았다; 홍군이 소수(少帥, 장학량을 가리킴)에게 장씨(장개석)를 석방하도록 권했다" 이와 동시에, 글에서는 한 미국학자의 극동형세에 대한 분석을 소개한 후, 스탈린이 서안사변을 처리하는 책략을 지적했다: 비록 "크레믈린궁은 일본에 대한 공포에 대하여 큰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크레믈린은 즉시 무력으로 일본에 저항해야한다고 소리치는 반란단체들보다 장개석을 믿었다. 일본에 대하여 더욱 큰 저항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적은 말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소련은 아무런 조약도 체결하지 않은 상황하에서, 장개석을 회유했다. 이것은 스탈린의 책략중에서 가장 뛰어난 점이다. 또한 정치수완이 고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호적이 서안사변에 대하여 반대태도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사람들에게 명망을 얻는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주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일 장개석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하면, 중국이 20년은 후퇴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장락량이 서안사변을 발동한 것은 "명목은 항적이지만, 실제는 스스로 장성을 망친 것이다" '국가민족의 죄인'이다. 장학량은 말련에 침묵을 깬 바 있다. 자신이 서안사변을 발동시킨 것은 "오장관(誤長官), 해붕우(害朋友), 훼부하(毁部下), 막차위심(莫此爲甚)"(윗사람을 그르치고, 친구를 해치고, 부하를 망친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것은 없었다.)
저명한 사학자 당덕강(唐德剛)은 이렇게 말한다: 항일전쟁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1937년 7월 7일 싸우기 시작한다. 이것은 소련이 서안사변에 개입한 직접적인 결과이다. 만일 항일전쟁이 1939년 유럽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늦추어 졌다면, 전체 국면과 중국의 운명은 아마도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호적의 소위 "서안사변은 우리 국가에 끼친 손실을 보전할 수 없다"는 견해는 주목하고 연구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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