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계진(丁啓陣)
송나라때의 저명한 매국노 진회를 변호사는 의견중 하나는, 바로 진회는 송체자를 발명하는데 공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송체자는 진회가 발명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체전승과 문헌기록 두 방면에서 증명할 수 있다.
서체전승을 보면, "송체자"의 기본필획, 구조의 특징, 나타난 시기등은 모두 송나라때보다 이전이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횡경수중(橫輕竪重), 횡세수조(橫細竪粗), 횡평수직(橫平竪直), 별첨세여유엽(撇尖細如柳葉), 날조중여도편(捺粗重如刀片), 필획의 횡필의 양쪽 끝에는 횡선의 아래와 횡선의 위에 삼각형의 돈필묵점(頓筆墨點)이 있는 것등 모든 송체자의 특징은 송나라이전에 일찌감치 모두 출현했다. 법서(正楷)가가 배출된 당나라때, 구양순(歐陽詢), 저수량(褚遂良), 유공권(柳公權), 안진경(顔眞卿)등 저명한 해서대가에게서 혹은 많게 혹은 적게, 이런 특징이 있었다. 확실히 송체자의 필획, 구조는 당나라때의 해서를 본받은 것이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서적을 간인하는 장인들이 광범위하게 "송체자"를 채택한 것은 송나라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송체자"는 그 용어만 보면 송나라때 탄생한 자체라고 생각하기 쉽다. 기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송체자"는 명나라때 탄생했다. 청나라때의 저명한 학자, 장서가인 전태길(錢泰吉)은 <폭서잡기(曝書雜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송서(宋書)의 남상(濫觴)은 명계(明季)이다" "명계때부터 서공이 부곽(肤廓)한 글자모양을 썼는데, 이를 '송체'라 불렀다." 그는 고증을 거쳐 이런 결론을 내린다. 송체자는 명헌종 성화(1465-1487)이후에 성숙되고, 이전의 간본에서의 소위 '송체'는 "오늘날 말하는 송체자인 경우는 없었다." 전태길은 그 자신이 본 것을 근거로, 송나라때 간행한 서적의 "자획활탈(字劃活脫)"하여 송체자의 "구판불령(拘板不靈)"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를 보면, 송체자는 명나라때 비로소 흥기한 일종의 인쇄자체이다. 그 발명자의 성명은 사서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무명의 각자공장(刻字工匠)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자체가 사대부계층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쇄자체로서, 송체자는 그 장점이 있다. 그것은 주로 다음과 같다: 필획이 규범화되어, 쉽게 모방할 수 있다; 정치하고 분명하여 구분이 잘 된다. 그러므로, 수백년동안, 광범위하게 서적에 응용되고, 신문간행물인쇄에 쓰인 것이다. 다만, 심미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그것은 결점이 있다: 필획의 변화가 적고, 시각적인 심미감이 떨어진다. 중국의 박대정심한 서예예술에서, 필세, 필의를 중시하는 한자의 아름다움은 송체자에서는 그다지 체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와 비교하자면, 해서체는 송체자보다 뛰어나다. 고대에, 약간만 까다로운 학자라면, 저작을 인쇄할 때, 송체자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고가를 주고 좋은 각공(刻工)을 써서, 해서체로 출판했다. <폭서잡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국초(國初, 청왕조 초기)에 책을 간행하는데는 해서의 명수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송체자는 오랜 기간동안 "장체자(匠體字)"로 불리웠다. 그 지위가 낮았음은 충분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송체자에는 여러가지 변체(變體)가 있다. 노송(老宋), 장송(長宋), 방송(仿宋)등등. 개략 송체자의 심미감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 할 것이다.
진회는 서예실력이 괜찮은 편이었다. 장원 출신이니까. 다만 서예에서, 송나라때에는 서예로 유명한 "소(식), 황(정견), 미(불), 채(양)"의 4대가가 있다. 진회의 영향력은 이 4명과 비교할 수 없다. 진회의 서예가 영향을 미쳤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생전의 서예 유명도로 따진다면, 진회는 또 다른 저명한 간상(奸相) 채경(蔡京)에 미치지 못한다. 자체를 창조하여 스스로 일파를 이루고,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영향이 심원한 것으로 따진다면, 송나라때의 서예가중 첫손가락에 꼽을 사람은 송휘종 조길이 발명한 "수금체(瘦金體)"이다. 어느 방면으로 보더라도, 진회는 송나라때 자체의 발명에 영향을 줄 사람은 아닌 것이다.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를 뒤집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다만, 진회와 같이 서사에 여러가지 악행이 기록되어 이미 어느 정도 부호화(간사, 음험, 투항)된 역사인물의 평가를 뒤집는 것은 특별히 신중하고 엄격해야 한다.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평가를 뒤집는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면, 충간시비(忠奸是非)의 개념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마음이 사악한 자는 반드시 더욱 거리낌이 없어질 것이고, 못하는 나쁜 짓이면 없게 될 것이다. 시비, 선악의 판단을 잃은 인류사회는 지옥과 같은 암흑, 혼란, 위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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