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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서예

왕희지(王羲之): 역대제왕들이 가장 좋아한 서예가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직장노Q 

 

중국서예사상, 영향력으로 보면, 아무도 왕희지와 비견할 수 없다.후세인들이 '서성(書聖)'이라 부르는 이 동진(東晋)의 대서예가는 수천년동안 제왕장상과 문인묵객들이 열렬히 추구한 대상이었다.

 

그를 가장 사랑한 당태종은 "일자천금(一字千金)"으로 천하의 왕희지작품들을 끌어모아서 무덤으로 가져간다. 그리하여 그 이후 왕희지의 진적(眞迹)을 볼 기회는 없게 된다. 현재 세계 각지의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왕희지'는 기실 고고(高古, 고아고박한 것으로 통상 당나라이전을 말한다. 여기서는 당,송때를 의미함)의 정모본(精摹本)이다. '고고모본'만 하더라도, 세상에 남아있는 것은 겨우 십여건에 불과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타이페이 고궁의 진관지보(鎭館之寶)인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과 일본에 유실된 <상란첩(喪亂帖)>등이 있다.

 

왕희지의 작품은 역대이래로 귀하게 여겨졌다. 고대에 이미 가치가 엄청났다. 그가 중국서예사상의 숭고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역대제왕이 그의 작품을 숭상한 것과 관련이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왕희지는 역대제왕들이 추앙했기 때문에, 그 어떤 서예가도 누리지 못한 '정종(正宗)'의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왕희지를 중시한 황제는 남조의 양무제(梁武帝)이다. 그래서 왕희지가 죽은지 100여년후 양나라에서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왕희지붐'이 일어난다. 왕희지의 서예사상의 지위는 이 때 확립된다. 양무제는 "이왕서법(二王書法, 왕희지 및 그의 아들 王獻之)"작품을 15000여건 모았다. 그러나, 남북조시대에 전쟁이 빈번하여 남아있는 것은 아주 적게 된다.

 

남북조시기의 진무제, 진원제, 송명제, 제고제, 제무제도 모두 서예를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의 사서에는 "천하가 모두 이(왕희지의 글)를 귀하게 여겼다." "여러 왕이 모두 서로 구하려고 했고,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진정 왕희지를 '시성'의 반열로 올려놓은 핵심인물은 당태종 이세민이다. 그는 왕희지를 가장 사랑한 황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제왕의 권세로 왕희지 서예의 '정종'지위를 확립시켜주었을 뿐아니라, 온나라의 상하 심지어 해외까지도 '왕희지를 떠받드는 운동'을 벌이게 한다.

<구당서. 저수량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당태종은 명을 내려 신하들로 하여금 "돈과 비단으로 왕희지의 서예작품을 구입하라" 그후 일시에 천하에서 앞다투어 바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당태종,당고종의 두 황제때 내부에서 왕희지서예작품 2,290장을 확보하여, 13질(帙), 128권으로 장정한다. 당시 군왕이 왕희지를 좋아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왕희지의 진적은 민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당태종은 <난정서>를 구한 이야기도 남겼다. <난정서>는 왕희지의 최고작품이다. "천하제일행서"로 불린다. 왕희지 본인조차도, <난정서>는 이미 "모방은 가능하지만, 추월할 수는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특별히 후대에 당부하여, "전가지보"로 보관하게 한다.

 

상란첩

 

나중에, <난정서> 진적은 왕희지의 7대손의 수중에 있었다. 이 7대손은 스님이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지영(智永)화상으로 불렀다. 그도 중국역사상 10대서예가중 한 명이다. 지영화상은 후손이 없으므로, <난정서>를 제자인 변재(辯才)에게 넘긴다.

 

그러나, <난정서>를 강호에서 찾을 수 없었지만, 강호에는 여러가지 소문이 있었다. 왕희지의 팬인 당태종은 <난정서>를 가지고 싶었다. 그는 세 번이나 변재에게 <난정서>를 내놓으라고 했고, 심지어 죽이겠다고 위협까지 했으나, 변재는 <난정서>를 본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 당태종은 어쩔 수 없었고, 침식도 거를 정도가 된다. 그래서 재상 위징은 당태종에게 감찰어사 소익을 추천한다. 소익이 계모가 많으니 <난정서>를 구해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어진 이야기는 향문천이 임아행을 구한 이야기와 같다. 소익은 서법예술을 '아주 좋아하는' 서생의 신분으로 변재와 교분을 튼다. 그리고 개인적인 매력으로 변재의 마음을 얻는다. 하루는 소익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몇 폭의 왕희지 진적을 꺼내놓고 변재와 함께 감상한다. 변재는 감동을 받는다. 당연히 자신의 수장품도 자랑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전설중의 <난정서>이다.

 

소익은 <난정서>의 진품을 본 후, 변재가 부주의한 틈을 타서 훔쳐간다. 그후에 신분을 드러내고, 당태종의 "징용조서"를 내민다. 변재는 진적을 잃은 후 힘들어 한다. 주걸룬의 <난정서>노래에서 불렀던 것과 같다: 진적이 없어졌다. 진심을 누구에게.... 얼마후 그는 우울증에 빠져 죽고 만다. 1년도 안되어 사망한 것이다.

 

당태종은 <난정서>를 얻은 후 며칠간 기뻐서 잠을 자지 못한다. 시시때때로 꺼내서 감상한다. 죽기 전에 그는 태자 이치를 불러서 여러번 당부한다. 반드시 그가 좋아하는 '왕희지'를 그와 함께 소릉에 묻어달라고. 특히 <난정서>는 같이 묻어주어 영원히 자신과 함께 하게 해달라고.

 

제왕이 좋아하면 신하들도 따라 배우기 마련이다. 그래서 당,송시기에 왕희지를 배우는 풍조가 이미 막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 후세의 서예가들에게 왕희지의 영향을 크게 받도록 했을 뿐아니라, 역대제왕들도 하나같이 왕희지 작품을 숭상했다. 송나라대의 송태종, 송고종,송효종도 왕희지를 아주 숭상한다. 그러나 이때는 전란과 시간의 마모로 왕희지의 진적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 송나라때 내무에서 소장한 왕희지작품의 수량은 격감한다. 당나라때 내부의 10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그중에서 진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몇 건에 불과했다.

 

명청양대에 이르러, 서에가 당송만큼 흥성하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왕희지를 숭상하는 여파는 남았다. 명성조 주체, 명인종 주고치에서 청나라의 강희제, 건륭제는 모두 왕희지의 작품을 보물로 여긴다. 다만, 청나라때는 이미 왕희지의 진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비록 건륭은 자신이 소장한 것이 진적이라고 고집했지만, 나중에 고증한 바에 따르면 대부분 고고모본이다.

 

 

평안첩(平安帖)

왕희지의 전세서법(傳世書法)

통계에 따르면, 현존하는 당나라대의 왕희지첩의 모본은 15첩(帖)이다.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쾌설시청첩>, <원환첩(遠宦帖)>, <봉길첩(奉桔帖)>, <평안첩>, <하여첩(何如帖)>(삽첩합본).

 

일본: <상란첩>, <이사첩(二謝帖)>, <득시첩(得示帖)>(삽첩합본), <공시중첩(孔侍中帖)>, <빈유쇠화첩(頻有衰禍帖)>(이장합본), <유목첩(遊目帖)>.

 

요녕성박물관: <이모첩(姨母帖)>, <초월첩(初月帖)>(<만세통천첩에 합장되어 있음)

 

천진예술박물관: <한절첩(寒切帖)>

 

미국프린스턴대학부속미술관: <행양첩(行穰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