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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서예

강희제가 쓴 "복(福)"자는 어떻게 다른가?

by 중은우시 2018. 2. 28.

글: 고건중국(古建中國)


황제의 어필(御筆) "복(福)"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공왕부(恭王府)의 복자비(福字碑)에 쓰여진 "복"자일 것이다.





공왕부의 복자비는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을까? 공왕부의 보물인데, 강희제가 쓴 글은 한자한자가 천금의 가치가 있다. 공문 이외에 고증을 거친 강희제가 쓴 글은 세 개밖에 되지 않는다. 이 세 개는 모두 북경성내에 있다. 그래서 국가의 최고등급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북경성내에 있는 강희제의 글 중에 교태전(交泰殿)의 "무위(無爲)" 편액도 있다. 교태전과 같이 중요한 곳의 편액에도 "강희어필지보(康熙御筆之寶)"라는 도장을 찍지 않았다. 그런데, 공왕부의 "복"자에는 '강희어필지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이를 보면 강희제가 이 글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도 알 수가 있다.


강희12년(1673년), 효장황태후의 육십세 생일이 다가올 때, 생각지도 못하게 고질병이 도진다. 강희제는 상고에 "승제사(承帝事)"로 복을 빌어 수명을 연장시켰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고는 조모를 위하여 복을 빌기로 결정한다. 목욕재계 3일후에 강희제는 "사복창생(賜福蒼生)"이라는 네 글자가 정해자(正楷字)로 새겨진 붓을 들어 비단으로 만든 지전에 조모에 대한 복을 비는 "복(福)"자를 쓴다. 그리고 파격적으로 글자에 '강희어필지보'라는 도장을 찍는다. 옥새는 황제권력의 상징으로 일반적으로 성지나 중요공문에 찍지 절대로 서예작품에 찍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옥새를 찍더라도 '복'자의 좌하방에 찍지 '복'자의 정상방에 찍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복'자의 정상방에 찍은 것은 "홍운당두(鴻運當頭), 복성고조(福星高照)"의 뜻을 담고 있다. 황태후는 이 '복'자를 받고는 병이 나았다. 그리고 15년후에 75세의 고령으로 선종한다.


강희제가 심혈을 기울여 쓴 이 "복"자는 의도했건 아니건 여러가지 기록을 세우게 된다. 


먼저, '복(福)'과 '수(壽)'의 두 자는 글자모양이 많이 다르다. 그래서 자고이래로 어느 서예가도 '복'과 '수'를 합쳐서 한 글자로 쓴 경우는 없었다.


강희제가 어필로 쓴 '복'자의 오른쪽은 바로 왕희지(王羲之)가 <난정서(蘭亭序)>에서 쓴 "수(壽)"자를 쓰는 방식으로 썼다. 이렇게 하여 현존하는 역대 서예작품중에서 유일하게 '복', '수'가 같은 글자안에 있는 '복'자가 되었다. "복중유수(福中有壽), 복수쌍전(福壽雙全)"이라고 할 만하다. 


다음으로, 이 복자는 '다자(多子), 다재(多才), 다전(多田), 다수(多壽), 다복(多福)'의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고금에 유례가 없는 '오복합일'의 복자이다. 


셋째, 이 '복'자는 글을 쓸 때 민간에서 풍만하고 정방(正方)형으로 쓰는 것과는 달리, 글자모양이 가늘고 길다. '마른(瘦)' 서체이다. 그래서 '길고 가는 복(長瘦福)' 즉, 장수(長壽)의 복이다.


즉 이 '복'자를 쓴 때로부터 시작하여, 청나라에서는 매년 황제가 '복'자를 쓰는 관례가 생긴다. 효장태후는 임종전에 손자 강희가 보내준 진귀한 '복'자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석비에 새겨서 궁내에 세워두라고 명한다. 그런데 건륭시기에 이 '복자비'가 신비롭게 실종된다.





1962년, 주은래 총리가 공왕부를 중수하도록 지시할 때, 고고학자는 의외로 화원의 비운동(秘雲洞)에서 실종되었던 '복자비'를 발견한다. 주은래는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중화제일복(中華第一福)'이라 명명한다. 


황궁에 보관되어 있던 '복자비'가 어떻게 하여 화신(和)의 저택에 와 있을까(공왕부는 원래 건륭제의 총신이었던 화신의 저택이었다). 야사를 보면, 화신이 궁중에서 훔쳐내서 복자비를 비운동안의 석벽에 넣어둔 것이라고 한다. 이 석벽에는 '수(壽)'자가 숨어 있어서 비의 '복'자와 합쳐, "복중유수(福中有壽), 수중유복(壽中有福)"의 풍수길지가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런 야사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황궁은 경비가 삼엄한데, 화신이 이렇게 큰 석비를 훔쳐내온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다시 말해서 화신의 저택은 여러번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찌 복자비가 발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료기재에 따르면, 건륭제가 강희제의 '복자비'를 자신의 총신에게 하사했고, 화신은 사람을 시켜 수천 개의 태호석(太湖石)을 가져와서 화원의 중축선에 쌓아서 '거룡(巨龍)'을 만들고, 그는 '복자비'를 용혈에 모셔놓고 '동천복지(洞天福地)'라고 했다고 한다. 가경제가 즉위한 후 여러번 '복자비'를 궁중으로 되가져 오려고 생각했으나, 용맥을 건드려 대청강산의 뿌리가 흔들릴까 우려하여,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