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세강(程世剛)
1. 주덕(朱德)
주덕이 태어났을 때, 모친은 그를 잘 자라라고 아명으로 "구아(狗兒)"라고 불렀다. 가끔, 주씨집안사람들은 사천북부의 습속에 따라, 그를 "구왜자(狗娃子)"라고 불렀다. 4살이 되어 부친은 주씨집안의 항열에 따라 그에게 "주대진(朱代珍)"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1895년, 그의 사숙선생은 "주옥계(朱玉階)"로 개명해준다. 그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옥석과 같이 깨끗하게 살면서 뜻을 세워 옥으로 만든 계단을 올라가듯이 한걸음한걸음 위로 올라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1909년 초봄, 주옥계는 운남육군강무당에 입학한다. 강무당은 운남사람들이 만든 것이어서 운남성 사람만을 뽑았다. 주옥계는 입학신청을 하는 곳에서 등록부를 뒤져보니 몽자현(蒙自縣)에서는 아무도 신청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배우고 싶은 열망에 자신을 운남성 임안부 몽자현 사람인 '주덕(朱德)'이라고 신청한다. 주덕이 강무당에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이름을 사칭하여 입학신청한 일이 발각된다. 운남출신의 몇 교관은 즉시 이 사건을 강무당 총판인 이근원에게 보고하다. 이근원은 주덕을 만나본 후, 그가 괜찮은 인재라고 보고, 그를 제명할 생각을 버리고, 주덕에게 열심히 공부하도록 격려해준다.
2. 팽덕회(彭德懷)
팽덕회의 아명은 "진아자(眞伢子)"이고, 본명은 "팽득화(彭得華)"이다. 그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는데, 그가 장남이다. 둘째동생은 팽금화(彭金華), 셋째동생은 팽영화(彭榮華)이다. 팽득화는 친구인 황공략(黃公略)이 얘기해주어서 장사로 가서 호남육군군관강무당에 입학한다.
입학후 그는 사람들에게 이미 팽덕회로 개명했다고 말한다. 저녁에 그는 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내가 왜 팽덕회로 개명했는지 아느냐. 군자회덕(君子懷德), 소인회토(小人懷土). 군자는 덕을 품고, 소인은 땅을 품는다. 나는 돈을 벌거나 고관이 되거나 전답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도덕이 있고,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팽덕회로 개명한 것이다. 앞으로는 나를 '덕회'라고 불러라." 이때부터 팽득화는 팽덕회가 된다.
3. 임표(林彪)
임표의 본명은 임육용(林育蓉)이다. 1925년, 잉육용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포군관학교에 입학신청을 한다. 광주에 도착한 후, 임육용은 입학신청을 하지 않고, 먼저 양가사당 중공 광주구위기관으로 가서, 당조직과 연락을 한다. 가는 길에 그는 이름을 고치는 일을 고민한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인생에서, 그는 용감, 완강, 필사, 헌신의 군관학교에서 지내야 하는데 그의 이름 "임육용(어떤 때는 毓蓉으로 쓰기도 했고, 育容으로 쓰기도 했다)"은 적합하지 않았다. 너무 여성스러운 이름이다. 그를 만나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름을 듣고 여성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사실 임육용이 막 무한의 공진중학에 들어갔을 때부터 개명을 생각해왔다.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으로 "표(彪)"를 생각하다. 그러나 부친은 "표"라는 글자가 형륙(刑戮), 흉질(凶疾), 실패의 뜻을 담고 있어, 이름에 쓰기는 좋지 않다고 반대했다. 임육용이 양가사당의 대문을 들어선 후, 접견신청서를 내면서 '임표'라고 쓴다. '임표'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접견신청서이다. 나중에 임표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고, 황포군관학교 제4시 보병과의 일원이 된다.
4. 유백승(劉伯承)
유백승은 가을겨울이 교체하는 시기에 태어났다. 유백승의 조부인 유정부(劉正富)와 조모인 양씨는 그가 태어난 후 7일내에 차례로 세상을 떠난다. 유백승은 온 집안 사람들이 상복을 입고 있을 때 고고의 성을 울리며 태어난 것이다. 집안에서 그에게 아명으로 "효생(孝生)"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데, 그 의미는 태어나자마자 상복을 입었다는 뜻이다.
유백승이 시기를 잘못 잡아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는 부친 유문병(劉文炳)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첫아들이었다. 유문병은 10년간 공부해도 성공하지 못하여 글을 버리고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실의에 빠져있는 수재였다. 그는 학문은 지니고 있었으나 관직에 나가지는 못했다. 고향인 포리(浦里)에서 '니각문인(泥脚文人)'으로 유명했다.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를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는 관념이 지배할 때이므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유문병은 <순자.권학>에 있는 문구를 떠올린다: "시고무명명지지자, 무소소지명(是故無冥冥之志者, 無昭昭之明)" 이렇게 하여 유백승에게 "유명소(劉明昭)"라고 이름을 지어준다. 유씨가족의 족보에서 항렬의 순서는 "국정문명태, 천조영치안(國正文明泰, 天朝永治安)"이다. '명소'는 바로 이 '명'자 항렬에 맞는 이름이다. 이것이 유백승의 최초 이름이다. 부친은 나중에 그에게 '백승(伯承)'이라는 자(字)를 지어준다. '백'은 장남이라는 뜻이고, '승'은 자식이 부친의 기업을 잇는다는 뜻이다.
5. 하룡(賀龍)
하룡의 아명은 '장장(長長)'이다. 하룡이 5살에 입학할 때 '평헌(平軒)'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11살때, 집안이 가난하여, 부모는 그에게 다시 '진가(振家)'라는 이름을 붙이다. 그가 가업을 진흥시키기를 바란 것이다.
18세때, 하룡은 손중산의 중화혁명당에 가입한다. 그후 운경(雲卿)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이 이름의 유래는 <상서대전>에 나오는 <경운가>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상고시대 순임금이 치수를 잘한 우임금에게 선양할 때 백성들과 신하들이 함께 불렀다는 노래이다. 가사는 "경운찬혜, 명명천상, 찬연성진(卿雲燦兮, 明明天上, 燦然星陳)...."이다.
하씨족보에 따르면, 하룡은 '문(文)'자배이다. 본명은 "하문상(賀文常)"이다. 나중에 그의 부친대의 사람들은 "문상" "운경"이라는 이름으로는 그들의 기대를 모두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새롭게 더 의미가 깊은 이름을 지어주고자 하다. 그의 숙부인 하사규(賀士奎)는 글방선생이었다. "운경, 문상에서 운(雲)과 장(長, 常과 같은 발음)의 뜻을 따서 구름 속에서 긴 사람(윗사람)이라면 당연히 용(龍)이다. 용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있고, 올라갈 수도 있고, 내려갈 수도 있다. 크면 구름과 안개를 내뿜고, 작으면 몸을 숨긴다. 올라가면 우주의 사이를 날아다니고, 내려가면 파도의 속으로 숨는다. 용은 시세의 변화를 탈 수 있고, 사람이 뜻을 얻어 사해를 종횡하는 것과 같다. 내가 보기에 용을 위주로 하여 다시 글자를 하나 지어서 이름을 지으면 좋을 것같다." 그러나 무슨 글자를 추가할 것인가? 그들은 논의를 계속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곁에 있던 하문상이 이렇게 말한다: "제 생각에는 그냥 '용'자 하나만 쓰면 될 것같습니다. 말하기도 좋고, 기억하기도 좋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하룡'이라고 부르게 된다.
6. 진의(陳毅)
진의는 5살때 학교에 들어간다. 부친인 진창례(陳昌禮)는 학명으로 세준(世俊)을 지어준다. 호는 중홍(中弘)이라 한다. 그가 재지가 출중한 인물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진의는 어려서부터 근면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기억력도 좋았다. 책을 몇번 읽으면 외워버렸다. 그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시사와 바둑을 좋아했다. 성도의 덕승향에서 고등소학교에 다닐 때에는 소순(蘇洵)을 아주 좋아한다. "소노천(蘇老泉)의 글을 읽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고 말한 바 있다. 북송의 문학가 소순은 자가 명윤(明允)이다. 진의는 '명윤'을 거꾸로 하여, '진윤명(陳允明)'이라는 이름을 잠시 사용한 적도 있다.
진의가 15세때 성도갑종공업직업학교에 입학한다. 18세때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증자의 글인 "사불가불홍의(士不可不弘毅)"라는 글에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는 중국인민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자면,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데, 그 임무는 무겁고도 멀다. 단지 홍(弘)만으로는 부족하고, '의(毅)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름을 진의로 개명해버린다. 호는 '중홍(中弘)으로 하여 이름의 '의'와 연결되도록 했다. 그는 프랑스유학생으로 뽑힐 때 '진의'로 서명한다.
7. 나영환(羅榮桓)
나영환의 부친인 나국리(羅國理)는 족보의 항렬을 따라 그에게 "신진(愼鎭)"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는 아회(雅懷), 호는 종(宗人)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나종인'이라고 불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청나라정부가 멸망한다. 용기가 오색기로 바뀌었다. 1914년, 나영환의 집에서 사거리반대편에 있는 사당에 학교를 열었다. 나씨악영소학(羅氏岳英小學)이었다. 학교가 열리자, 나국리는 나종인을 사숙에서 고등소학교 1학년으로 보냈다. 악영소학의 첫번째 교장은 나병문(羅炳文)이었는데, 나종인이라는 이름은 듣기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국리는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나병문은 고민하다가 종이를 하나 꺼내서 "영환(榮桓)"이라는 두 글자를 적어준다. 그리고 이렇게 해셕해주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환환어정(桓桓於征)'이라고 했다. 환환이라는 것은 위무(威武)를 말하다. '정'은 정벌을 말한다. 내가 보기에 이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아주 건장하게 생겼다. 지금은 국가에 여러가지 일들이 많이 있으니, 이 아이가 나중에 무를 익혀서 전쟁에서 공을 세울지 알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종인은 나영환으로 이름을 바꾼다.
8. 서향전(徐向前)
서향전의 두 형의 이름은 "은창(銀倉)", "은복(銀福)"이다. 조모는 그에게는 아명으로 "은존(銀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뜻은 너무나 분명하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기를 바란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잘 쌓아두어서 후손들에게까지 복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서향전의 부친은 마을에서는 학문이 가장 뛰어난 수재였다. 그는 스스로를 독서인으로 생각해서, 이름을 아주 중시했다. 당연히 부르기도 좋고, 뜻도 문아하면서, 깊은 뜻을 담고 있어야 했다. 그는 여섯번째로 출생한 이 아이에게 학명과 , 자 및 호를 지어준다. 이렇게 하여 어린 '은존'은 가보에 오르는 이름과 호를 자지게 된다. 이름은 "서상겸(徐象謙)'(여기서 '겸'은 주역의 육십사괘중 하나로 육십사괘중 유일하게 육효가 모두 길한 괘이다)으로 하고 자는 자경(子敬)으로 한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혁명의 무리들은 세 종류로 나뉜다: 어떤 사람은 변절하여 투항한다. 동지의 머리를 적에게 바친다. 어떤 사람은 동요하여 퇴각한다. 혁명대오를 떠나 다른 일을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몸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고, 전우의 시체를 묻은 후, 비바람을 맞으며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서향전의 세 종류의 사람을 비교한 후, 첫번째 사람은 부끄럽고, 두번째 사람은 서글프며, 세번째 사람이 존경할만하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는 결심을 굳힌다.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희생을 무서워하지 앟으며 뜻을 세워서 계속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리하여 그는 '상겸'을 '향전(向前)'으로 바꾼다.
9. 섭영진(聶榮臻)
섭영진의 외할아버지는 그의 부친인 섭사선(聶士先)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각만 해서는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책을 뒤져보아라. 책에서 복있는 이름을 골라라." 섭사선 부부는 사숙에서 몇년간 공부한 바 있다. 그날 저녁에 섭사선의 집안에 있는 책 <잡지삼자경>을 가져와서, 아들의 이름을 고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고민하면서 그 책을 모두 뒤적였다. 그래도 바라던 이름을 정하지 못한다.
다음 날, 섭사선은 먼저 장인의 집으로 가서 계속 책을 뒤진다. 어느 순간, 그는 <수신보(隨身寶)>라는 책을 의자에 앉아서 뒤적였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섭사선은 얼굴에 웃음을 띈다. 몸을 일으켜 장인의 곁으로 가서, 책의 글자를 가리키며 자신의 뜻을 장인에게 말한다. 장인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인다.
섭사선은 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처인 당씨의 방에서 책의 마지막 구절을 가리키며 말했다: '백복병진득쌍전(百福騈臻得雙全)' 이 말은 아주 길하다. 집안이 족보에 따라 아들의 항렬은 '영'이니 그에게 '영진'이라고 하고, 자는 '복병(福騈)'이라고 하자. 어떠냐?" 당씨도 기뻐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럼 우리 아이의 아명도 이 책에서 따오자. 그를 '쌍전(雙全)'이라고 부르는게 어떻겠는가?" 섭사선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다. 다른 원수와 다른 점이라면 섭영진은 '영진'이라는 이름을 평생동안 사용하고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
10. 섭검영(葉劍英)
섭검영이 부친인 섭찬상(葉鑽祥)에게는 8명의 자녀가 있었다. 섭검영은 둘째이다. 부친은 이 아들을 아주 좋아해서, 섭씨족보에 따라 그에게 "섭의위(葉宜偉)"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1917년 여름, 섭검영등 몇몇 학생들은 한여름의 더위를 무릎쓰고, 기차를 타고 중국서남의 곤명으로 간다. 취호서안 승화포에 있는 운남강무당에 입학하기 위해서이다. 섭검영은 운남강무당에 들어간 후, 큰 뜻을 품고 문무를 익힌다. 혁명의 선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결심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의위'에서 '검영'으로 바꾼다. 백성을 위한 날카로운 검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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