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운중군(雲中君)
도연명은 행택현령의 자리에서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그리고 채국귀은(採菊歸隱)의 길을 선택한다; 시선 이백은 재주가 넘쳤고, 원대한 포부가 있었으며, 인구에 회자되는 많은 시가를 남긴다. 관료로서는 뜻을 펼치지 못했고, 최종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왕유와 두보도 관직에서는 실패자이다. 대문호인 소동파는 재덕을 겸비했지만 관료로서는 어려움이 많았고 소인의 질투를 받아 여러번 좌천되고 유배된다. 한때는 당시로서 만황의 땅인 해남도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문인이 아무리 우울하게 지내더라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례는 많지 않다. 만일, 한신, 악비와 원숭환등 무장과 비교한다면 결말은 훨씬 행운이다.
역사상 무장으로 선종한 경우는 많지 않다. 많은 명장들은 아주 참열(慘烈)하게 죽었다. 진시황 시대의 명장 몽염은 지록위마의 조고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한신은 제후를 병합하고 항우에게 승리하는 과정에서 유방을 위하여 한마공로를 세운다. 그러나 한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룬 후 여후에게 죽임을 당한다. 만일 그가 항우의 수하로서 집극랑중으로 계속 지냈다면, 그렇게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한왕조의 역사상,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천한2년의 가을이다. 이릉과 흉노의 악전고투이다. 이릉은 당시 겨우 오천의 보병을 이끌고 사막을 깊이 들어가 흉노 팔만기병과 싸웠다. 쌍방은 "끌어오고 싸우면서 연속 8일간 싸웠다." 피를 뿌리면서 백여리를 달렸다. 한나라군대는 절반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흉노군은 만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를 보면 한군과 이릉이 용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긴급한 순간에 사전에 약정한 총사령관 이광리(李廣利)의 한군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오지 않았다. 양식도 끊어지고 절망에 처해 있을 때 이릉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따라 생사를 같이한 부하들을 쳐다본다. 팔이 없거나 다리가 다쳐 이미 전투력을 상실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계속 싸우는 것은 그냥 죽는 것에 다름이 없었다. 이릉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지만, 2천여명의 수방을 입은 병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장검을 버리고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한 후, 병사를 이끌고 투항한다.
이 소식이 경성에 전해지자, 조야를 한바탕 뒤흔들게 된다. 이 때누구도 그의 집안이 큰 공신집안이라는 것을 언급할 수 없었다. 가련하게도 이씨일문은 대대로 충신양신을 배출했지만 순식간에 신패명열(身敗名裂)하게 된다. 처자식과 식구 수십명은 한나라황제의 명으로 참수된다. 후세이 무장들이 이 대목을 읽을 때면, 이릉이 억울하다고 얘기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대송왕조에 이르러, 천고충신 악비가 탄생한다. 송태조는 사대부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송고종은 그러나 무장에 대하여는 전혀 관대하지 않았다. 악무목(岳武穆, 악비)은 등에 '정충보국" 네 글자를 세기고, 고국강산을 수복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갈음도두혈(渴飮刀頭血), 곤수마안교(困睡馬鞍橋)"하며,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이기고, 금나라군을 대파한 적이 있다. 북벌의 성공이 가까웠고, 나라를 되찾고 치욕을 설욕할 희망이 보이는데,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린 혼군간신에 의하여 '막수유'의 모반죄로 풍파정에서 처결당한다. 악비부자와 명장 장헌(張憲)은 동시에 죽임을 당한다. 비록 그후 간신 진회는 응보를 받았지만, 악명은 천년에 걸쳐 전해지고 있다. 다만 악무목은 죽었다가 살아날 수는 없지만, 후세의 충신의사들은 모두 이 사건을 안타까워한다.
명나라의 원숭환은 원래 국가를 보위하는 동량지재이다. 기지다모(機智多謀)하여 여러 번 청나라군대를 격파한 바 있다. 그러나 청태종 홍타이시의 이간계에 당하여 의심많은 숭정제는 그를 능지처참의 형에 처한다. 일대명장이 이렇게 산채로 살이 발려 죽은 것이다.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충신용장의 결말을 비교하자면, 송태조의 "배주석병권"은 아주 인자했다.
서달, 남옥과 호유용등은 주원장을 도와서 강산을 차지한 후, 비록 모두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결국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교토사, 주구팽"의 결말을 벗어나지 못했다.
만일 무장들의 결말은 아주 비참했지만, 전사한 병졸들은 더욱 비참하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 중국대룍의 한 구순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부친과 형님은 망국노가 되지 않기 위하여 국군장병으로 둘 다 항일전쟁에서 희생되었다. 그와 동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항전승리를 맞이할 수 있었다. 다만 2년후 그의 동생은 국공내전때 전사한다; 내전이 끝난 후, 그의 두 조카도 소위 '항미원조' 전쟁에서 희생당한다; 외롭게 홀로 살아남은 그는 비록 이런 고난을 견뎌냈지만, 국군에 참가한 경력으로 인하여, '문화대혁명'시기에 여러번 홍위병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았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호철불타정(好鐵不打釘), 호인부당병(好人不當兵)". 다만 병황마란의 세월에 많은 사람들이 군인이 된 것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유일한 예외라면 대당의 군신 이정(李靖)이다. 그는 현명한 군주를 만나 비록 여러번 무고를 당했지만, 선종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천고일제 이세민은 시종 그를 신임했고, 질책을 하기는 해도 죄를 묻지는 않았다. 당시의 어사대부 소우(蕭瑀)는 이정과 사이가 나빴다. 일찌기 이정이 군대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탄핵한 바 있고, 돌궐의 힐리가한의 아장(牙帳)을 돌파할 때, 일부 진귀한 보물을 병사들이 약탈한 바 있어 조정에 엄벌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태종은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특별히 사면하고 조사하지 못하게 했다. 당태종은 그의 공로가 크다고 보아 좌광록대부를 추가로 부여하고, 견 일천필를 내리고, 실제 봉호를 추가로 주어 오백호에 이르게 하였다. 나중에 이정이 무고를 당한 것을 알고는 다시 견 2천필을 하사하고, 병부상서에서 우복야로 승진시킨다.
나중에 이정이 토곡혼으로 진격할 때, 이주자사 고증생은 염택도총관으로 있었는데, 제 기한내에 도착하지 못하여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리하여 이정의 질책을 받자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는다. 전투가 끝난 후, 광주도독부 장사 당봉의와 결탁하여 이정이 모반하려 한다고 무고한다. 당태종은 사실을 확인한 후 진상을 파악한다. 그리고 고증상을 무고죄로 사형에서 감형시켜 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그후 이정은 군공으로 위국공에 봉해지고, 정관17년에는 장손무기등 24명과 함께 능연각에 화상이 걸리고 대당의 공신으로 모셔진다. 그는 79세때 병없이 사망하니 무장중에는 아주 특이한 사례라 할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 제31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병(兵)이라는 것은 불상지기(不祥之器)이고, 군자지기(君子之器)가 아니다. 부득이한 경우에 써야 한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멀리있는 사람이 귀순하지 않으면, 인,의,예,악으로 그들이 따르게 해야 한다" 이를 보면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성인들은 무력을 쓰지 말라고 하였다. 소식은 <유후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필부는 욕을 당하면 검을 뽑아서 일어나 싸운다. 이것은 용기라 할 수가 없다"라고 하여 그런 이치를 명백히 했다. 은인자중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반드시 배워야할 덕목이다.
우리처럼 우매한 자들은 한신처럼 백전백승, 용병여신의 문도무략을 가지지도 못했고, 악비처럼 일마당선, 만부막적의 신용을 지니지도 못했다. 그저 도연명의 촌야채국(村野採菊)을 배우고, 소식의 종채팽조(種菜烹調)를 배우고 제갈량의 "청경우독(晴耕雨讀)"을 배운다. 달빛과 별빛을 보고, 해가 지고 해가 뜨는 것을 보는 것이 세간의 허명을 쫒아 작은 이익을 다투는 것보다는 낫다. 싸우는 마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면 세상에서 진퇴가 자유롭다. 얻어도 담담하고, 잃어도 태연하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둔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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