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송(宋), 명(明) 두 왕조는 왜 같은 부락에게 멸망했는가?

중은우시 2013. 12. 2. 21:21

글: 정만군(程萬軍)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든지, 항상 천적은 중원왕조와 병존하고 있었다. 이 천적은 때론 국경선을 맞닿고 있는 부락이거나, 이웃의 오랑캐국가이다. 특히 양송이래, 천적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뱀이 코끼리를 삼키는(蛇呑象)"의 '화이지변(華夷之變)'이 연이어 일어났다.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에 중국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천적은 넷이다. 그들은 각각 흉노(匈奴), 돌궐(突厥), 몽골(蒙古), 여진(女眞)이다. 앞의 둘은 중원한족왕조와의 전쟁에서 서로 이기고 지면서 개략 균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뒤의 둘은 중원왕조에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대체하여 중국을 통치한다.

 

몽골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원나라를 건립한다. 건주여진(만주족)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건립한다. 7개의 중국대통일완조중에서 그들은 2개를 점했고 전후로 중국을 4백년이나 통치한다. 용맹스러움으로 따진다면, 여진이 돌궐보다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다. 그들이 싸운 것은 같은 민족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온다. 당당한 서북돌궐제국은 중원으로 진격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보잘 것없어 보이는 동북의 한 유목민족 여진은 한족의 두 왕조를 멸망시킨다. 후자가 전자보다 용맹하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적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같은 민족인데, 왜 당태종때는 세계를 주도할 수 있었지만, 송휘종은 "상대방은 칼이 되고, 나는 도마위의 고기가 되었을까?"

 

미국작가인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을 없앨 수는 있다. 그러나 패배시킬 수는 없다. 헤밍웨이의 이 말에 대응하는 중국의 옛 말이 있다: "삼군이 총사령관을 빼앗길 수는 있지만, 필부가 뜻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중국과 외국의 이 두 마디 말은 모두 한 가지 이치를 말해준다. 하나의 민족에 있어서 진정한 실패는 군사상의 실패가 아니라, 정신적인 소멸이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송,명의 멸망원인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말한다: 양송은 여진,몽골의 손에 망했다. 그것은 "농경문화가 유묵문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빛났던 한,당문명은 '농경문명'이 아니란 말인가? 왜 용맹한 흉노, 돌궐의 손에 멸망하지 않았단 말인가?

 

확실히, 송나라때 소위 "화하문명이 정복되는" 역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농경'때문은 아니다. 정신이 소멸한 결과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상무정신(尙武精神)'의 소멸을 이야기한다. 이 원인은 세상이 모두 알고 있다. 무장 조광윤이 병력을 이끌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송태조가 된 후, 다른 사람이 자신이 한 황위찬탈모델을 본받을까봐, '숭문억무(崇文抑武)'국책을 실시한다. 부귀는 책 속에서 구해야 한다. 이때부터 한족은 상무정신에서 멀어지고, 문약해진다.

 

시대를 긋는 송나라역사를 되돌아보면, 당연히 조광윤이 '한아지약(漢兒之弱)'을 연 개창자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숭문억무"는 한족의 "상무정신"에 확실히 살상력이 있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을 송나라이래 화하가 쇠락한 유일한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이지도 않고, 전면적이지도 않다.

 

송나라가 군사실력이 조금도 없는 나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송나라때 장수들은 하나같이 유목민족의 맹장을 상대할 담량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때에도 "장시기찬호로육(壯士飢餐胡虜肉), 소담갈음흉노혈(笑談渴飮匈奴血)"한 전신 악붕거(岳鵬擧, 악비)도 있고, "팔백리분휘하자(八百里分麾下炙), 오십현번새외성(五十弦翻塞外聲)"의 문무쌍전(文武雙全) 신기질(辛棄疾)도 있다. 북송 건국초기, 송나라군대는 서하를 상대하며 군사적으로 우위에 섰다. 거란에 대하여는 대등한 수준을 유지했다; 중대하게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은 여진이다;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은 몽골이다. 만일 송나라군대가 안된다면, 여진이 오기 전에 거란의 손에 망했을 것이다. 하필 호랑지사가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를 보면 송나라군대의 전투력은 점진적으로 쇠퇴하는 과정에 있었다. 송군의 쇠퇴를 불러온 것은 먼저 병도(兵道)가 강하지 않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민족정신의 여성화에 있었다. 송,명 두 왕조는 유학으로 나라를 세우고,유가는 '이학(理學)'을 받아들여 개조되었다. 그리하여 국민정신이 전면적으로 여성화한다. 한혼실혈(漢魂失血, 한족의 혼은 혈기를 잃었다). 오랑캐문화와 중원문화의 융합은 차단된다.

 

이런 모든 '실책'은 조씨와 주씨가족이 "내부의 적을 경계하지, 외부의 적을 경계하지 않은" 좁은 생각때문이다. 송명군대의 기능은 주로 외적을 막는 것이 아니라 국내백성을 겁주는데 있었다. 송명의 경제성과는 세계에서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한 때는 성당(盛唐)과 나란히 얘기될 정도이다. 다만,개별적인 성취만으로는 전체 문명정신의 손실을 메울 수 없다. 민족정신으로 말하자면 돈이 있는 송,명 사람들은 기세를 올리며 살지를 못했다.

 

대명왕조때의 중국을 얘기하면서 혈성이 있었다고 말한다. 송나라처럼 금전으로 구차하게 평안을 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양한처럼 미녀를 주고 평화를 구걸하는 치욕적인 기록도 없다고 한다. 다만, 이 한족왕조는 결국 외족의 손에 멸망한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중국명왕조를 망하게 만든 내부원인은 극도의 황권과 환관의 난정이다. 사서에서 이는 충분히 언급하고 있다. 다만, 다른 왕조와 비교하면 명나라에는 또 하나의 해가 있었다. 송나라와 대동소이하게, 그것은 정치에서 문화까지 '혈기를 잃은 것'(失血) 내지 "패혈(敗血)"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창백한 '청류지해(淸流之害)'이다. 명나라말기 '청류대신"은 혈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삶을 탐하고 죽음을 겁냈다. 한간(매국노)가 연이어 나온다. 만명때는 공리공담의 분위기가 아주 심했다. 넘울 탓하며 죽지 않는 자가 많고, 죽음으로 항쟁한 자는 적었다.

 

패혈의 대명왕조는 마찬가지로 외적의 보복을 당한다. 건주여진이 산해관을 들어서자, 맨날 '대의'를 부르짓던 청류들은 만청의 칼부림아래 기개를 드러낸 경우가 드물었다. 외적이 쳐들어오니, 청류여자 이향군(李香君)은 순국을 할 생각을 품었지만, 재자인 애인 후방역(侯方域)은 매국하여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옛 한족의 옷을 벗고 새 만주족의 옷으로 갈아입고", 맢장서서 "체두변발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청류'의 기개는 청루(靑樓)만도 못했다. 이렇게 정신을 비교하면 탄식밖에 나오지 않는다.

 

"혈성을 잃은" 송나라이래 한족집단이 소멸하는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피가 없는데 혼이 어디에 있겠는가? 북송은 여진에 전복되고, 남송은 몽골에 잠식된다. 비록 주원장이 한 때 복국에 성공했지만, 3백년후, 여진의 일개 갈래인 건주여진이 다시 화하왕조를 멸망시키고, 전중국을 통치한다. 근 1억인구의 민족이 연이어 수십만 인구의 동일한 부락에게 멸망당한 것이다. 이는 패혈퇴화한 민족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