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의경(劉宜慶)
인기리에 상영된 영화 <건당대업>에서 네위안(聶遠)이 연기한 진기미는 나오자마자 주저만지(躊躇滿志)한 모양으로 나타나서, 상해도독으로 추천받는 의식에서, 도성장(陶成章)반대에 부닥치자, 권총을 꺼내어 총성을 낸다. 이 희극화된 모순의 충돌은 진기미의 성격에도 부합하고,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한다.
1911년 7월초, 한번은 상해의 숭산로에서 회의를 열었다. 진기미와 도성장은 의견이 맞지 않아, 진기미가 권총을 뽑아 도성장에게 쏘려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전에, 진기미는 상해에서 돈이 급히 필요했는데, 마침 도성장이 남양에서 자금을 모집하여 돌아와 손에 돈이 있었다. 진기미는 도성장에게 혁명군비를 요구한다. 도성장은 돈을 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진기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계집질을 좋아한다. 상해에도 네가 쓸 돈이 충분하다. 내 돈은 절강의 혁명동지들이 쓸 것이다. 네가 계집질하도록 줄 수가 없다."
진기미와 도성장의 갈등이 격화된다. 그래서 영화 <건당대업>에서 장전(張震)이 연기한 장개석(蔣介石)이 도성장에게 암시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진씨가족의 이야기를 하자면, 절강 오흥(吳興)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청나라말기의 배만혁명(排滿革命)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흥의 진연우(陳延佑)는 잠사(蠶絲) 장사로 돈을 벌었다. 그는 세 아들을 위해 이런 계획을 세웠다: 첫째아들 진기업(陳其業)은 가업을 이어받아 농잠(農蠶)에 종사한다. 둘째아들 진기미는 밖으로 나가서 상업에 뜻을 두고 학도가 된다; 셋째아들 진기채(陳其采)는 공부를 하여 공명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시대는 반청의 혁명역량이 절강에서 소용돌이치는 때였고, 부친이 설계한 인생의 길은 시대의 조류에 휘말려 바뀌게 된다.
진기채는 삼형제중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다. 진기채는 16세에 수재(秀才)가 된다. 1898년 청나라정부는 일본에 군사를 배우도록 유학생을 파견하는데, 진기채가 당선된다. 1902년, 진기채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는데, 성적이 그해 졸업생중 1등이었다. 귀국후, 승진을 거듭한다. 처음에는 호남무비학당 감독(교장에 상당함)을 맡는다; 1906년 가을, 진기미는 남경신군 제9진(鎭, 사단에 상당함)의 참모장이 된다. 진기채는 30살도 되기 전에 청나라정부 군자부(軍諮府) 제3청 청장이 되어, 전국의 신군훈련과 전보을 담당한다. 그 때, 해외에 유학하여 군사를 배웠으면 전통적인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보다 더욱 승진의 고속도로를 달린다.
진기미는 원래 전당포의 학도가 된다. 그는 동생이 일본유학을 몇년 하고는 관운이 형통하여 승진을 거듭하는 것을 보고, 동생에게 자금을 도와달라고 해서 1906년 일본유학을 떠난다. 나중에 동빈학교에 들어가 군사를 배운다. 진기미가 일본유학을 떠난 것은 시대의 맥박을 제대로 밟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유학에서 진기미는 동맹회에 가입한다. 동맹회에서 진기미는 후기지수로 젊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개석을 알았고, 말그대로 장개석의 큰형님이 된다.
일본에 있는 기간동안, 진기미는 청나라조정에서 파견하여 일본에 군사를 배우러 온 황부(黃郛) 및 장개석을 알게 되고 두 사람과 금란지교를 맺어, 생사를 함께 하는 결의형제가 된다. 황부도 절강 사람이고, 1880년 항주에서 출생한다. 그러나 장개석보다 1년 먼저 진무학교(振武學校)에 들어간다. 진기미, 황부와 장개석은 결맹을 맺는다. 맹약은 "안위타일종수장(安危他日終須仗), 감고래시요공상(甘苦來時要共嘗)" 장개석은 이 맹세의 말을 두 개의 검에 새겨서, 예물로 삼아 두 맹형에게 보낸다. 이번 결맹으로 세 사람은 평생 우의를 다진다. 특히 장개석이 정치적으로 성공하는데,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나중에 진기미가 암살되고, 그의 두 조카 진과부, 진립부를 장개석에게 부탁한다. 장기석은 그들을 국민당의 권력핵심에 집어넣고, 안위를 함께 하고, 동감공고(同甘共苦)한다. 진씨의 후대를 돌봐주는 측면에서 장개석은 절대로 식언하지 않았다.
1908년, 진기미는 동맹회에서 국내로 파견하고, 혁명을 일으킨다. 그가 귀국의 길로 들어선 그 순간 그는 3년후에 신해혁명이 태풍처럼 일어나서 3천년의 황제제도를 무너뜨리고 청왕조를 전복시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이전의 학도에서, 풍운을 질타하는 상해탄의 군정제일인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1909년, 진기미는 상해에 기관을 설립하고 혁명에 종사한다. 진기미는 오랫동안 사회에서 놀았기 때문에, 업무처리능력이나 교제능력이 아주 강했다. 그의 동생 진기채가 상해주둔시절 비밀방파인 '청방'에 있는 일부 호주(湖州) 고향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바 있어, 진기미는 그들을 이용하여 혁명을 전개한다. 비밀방회는 무장역량으로 삼는 것은 혁명당인의 초기 주요 전략이었다. 손중산(孫中山)은 홍문(洪門, 天地會)에 가입한 빘고, 황흥(黃興)도 가로회(哥老會)와의 관계가 밀접했다. 진기미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비밀방회에 대하여 "이흑암지경도입광명(以黑暗之境導入光明)"해야 한다고. 동맹회와 방회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는 이 반청의 혁명단체로 하여금 강호기질을 갖게 만들었다. 강호기질과 암살의 풍조는 동맹회의 태기(胎記)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국민당으로 개조딘 후, 이 태기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서 장개석은 상해탄의 자잘한 인물에서 국민당의 총재로까지 올라간다. 국민당의 생래적인 유전자는 계속하여 존재했고, 이는 현대정치의 엄격한 의미애서의 정당으로 되기 어렵게 만들었다.
주전지의 <진기미: 후기지수, 경취동남>이라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진기미는 성격이 호쾌하고, 모험을 즐긴다; 사첩(四捷, 네 가지 빠른 것. 말이 빠르고, 생각이 빠르고, 수단이 빠르고, 행동이 빠르다)으로 유명했다. 상해탄에서 아주 잘 나갔다. 그는 자주 희원(戱院), 차관, 조당(澡堂), 주루, 기원을 출입했다. 혁명성공후, 누군가 그를 "양매도독(楊梅都督)"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옛날에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가끔 화간(花間, 화류장소)을 논의하는 장소로 하였고, 나는 있는 그대로 살고 자잘한 것에 신경쓰지 않으니, 감출 것도 없다."
무창의거후, 항주, 상해 두 곳의 의거는 진기미가 조직한다. 11월 3일, 갑북순경이 앞장서서 일어나 갑북이 광복된다. 그후 상단무장이 남단에서 의거를 일으킨다. 상해도대 유연익(劉燕翼)은 삽십육계 줄행랑을 놓아 발바닥에 기름을 바른 듯이 재빠르게 조계로 숨어들어 목숨을 보전하고자 한다. 상해에서 진기미는 장거를 벌인다. 혁명당을 이끌고 강남제조총국을 공격한다. 이것은 군수기업이었고, 무기장비가 뛰어났으며, 방어가 삼엄했다. 공격에 실패하였으나, 진기미는 고담영웅(孤膽英雄)이 된다. 그는 혼자서 가서 투항을 권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붙잡힌다. 강남제조총국은 감히 진기미가 어찌하지를 못한다. 강남제조총국의 사람들은 사상이 혁명과 공화에 치우쳐 있었고, 저항은 그저 허장성세였다. 다시 일부 노동자들이 창끝을 거꾸로 들고 각로의 원군이 도착한 후, 내외에서 호응하니 총판 장사연(張士衍)은 도망치고 만다. 강남제조총국이 투항하면서, 진기미는 다시 자유를 얻고, 호군도독이 된다.
11월 4일 밤, 장개석은 결사대장이 되어, 결사대를 이끌고 절강순무아문을 공격한다. 신군의 2개 단도 동시에 행동한다. 5일, 항주성이 전부 광복된다. 동시에, 진기미가 파견한 혁명당인들의 권유하에, 강소순무 정덕전(程德全)도 11월 5일 항주에서 독립은 선언한다.
진기미의 창의하에 강소절강연합군을 조직하여 남경을 공격한다. 강소절강연합군은 12월 2일 남경을 함락시킨다. 손중산은 나중에 이렇게 평가한다: "한구(漢口)를 잃자, 영사(英士, 진기미의 자)는 상해를 얻어서 이를 막아냈고, 상해를 가지고 남경을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한양(漢陽)을 잃자, 우리 당은 다시 남경으로 이를 막아냈다. 혁명대국은 이로 인하여 더욱 떨칠 수 있었다."
조조와 마찬가지로, 진기미는 난세에 세를 얻어 올라갈 역량이 있었다. 혁명연대에는 자주 비상수단을 써야 한다. 한손으로는 명취(明取)하고 다른 한손으로는 암살(暗殺)한다. 두 가지 수완이 모두 아주 강경했다. 자신의 상해 및 강소절강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진기미는 혁명당 내부 및 방회의 경쟁상대방을 제거하거나 쫓아버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광복회의 영수 도성장(결의동생 장개석이 친히 기획 조직했다)을 암살하고, 남경의 공격에 공로가 있는 민군 참모장 도준보(陶駿葆)를 총살하고, 같은 청방의 거물이며 당시 양주도독으로 있던 서보산(徐寶山)을 폭사시키고, 강남제조총국을 공격할 때 그의 생명을 구해준 바 있는 이섭화(李燮和)를 죽이려고 시도한 일들이 포함된다. 이섭화는 놀라서 상해를 떠나버린다. "2차혁명"후, 진기미는 다시 상해진수사 정여성(鄭汝成)을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일련의 수단을 완성한 후, 진기미는 한 때 일세를 풍미한다. 그는 손중산에 의하여 "혁명의 최고공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중에 장개석은 심지어 "진기미가 없었다면 국민당도 없었다."는 말까지 하게 된다.
권력과 명예의 최고봉에 도달하 후, 진기미는 신속히 추락한다. 어떻게 하더라도 숙명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마도 역사의 인과응보인지, 진기미는 암살을 당해 죽는다. 1916년 5월 18일, 진기미는 상해 프랑스조계 사포사이로(지금의 담수로) 14호의 일본교민 산전순삼랑(山田純三郞)의 집에서 총격을 당해서 죽는다. 흉수는 도망친다. 당시 진기미의 죽음은 원세개가 보낸 사람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었다. 나중에 진상이 드러났는데, 주모자는 당시 혁명에 같이 참가하고, 방회에 같이 속해 있던 장종창(張宗昌)이 시킨 것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장종창이 진기미에게 손을 쓴 것은 풍국장의 지시를 받아서라고 말해진다(당시 장종창은 풍국장의 수하였다). 또 다른 일설에 따르면, 동문인 서보산의 복수를 한 것이라고 한다.
손중산은 비통해 한다. 그리고 "실아장성(失我長城)"이라고 탄식한다. 5월 20일, 그는 황흥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사(진기미)는 혁명주의에 충성했고, 일을 함에 용맹하고 날카로웠으며, 백절불굴의 의지가 있었다. 국민당에 더 없는 인재였다." 4일후, 그는 일본친구 전중의일(田中義一)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진기미군은 상해에서 국사를 위하여 온 몸을 바쳤다. 비록 여러번 좌절을 겪기는 했지만, 그는 용맹하게 정진하였으니, 실로 나의 동지들이 찬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문을 친히 쓴다. "살아서는 인걸이요 죽어서도 귀웅이다". 호주 벽랑호반에는 지금도 손중산이 친히 쓴 묘비가 있다. 그리고 "성인취의(成仁取義)", "기장산하(氣壯山河)"등의 방표(坊表)가 서 있다. 이를 보면 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높고, 그의 죽음을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기미가 죽은 후 1주년이 되었을 때, 그의 유체는 상해에서 고향 호주로 옮겨서 매장된다. 손중산, 황흥, 장태염등이 모두 만련을 써서 애도한다. 장개서이 써준 만련은 이러했다:
천도무지(天道無知), 고사공십년구우(苦思公十年舊雨)
중원다고(中原多故), 내괴여만리장성(乃壞汝萬里長城)
진기미는 비록 희생되었지만, 그의 정치생명은 큰형의 두 아들인 진과부, 진립부가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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