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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중국으로 돌아온 모리슨문서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이양(李楊) 

 

1894년 2월 11일, 모리슨(George E. Morrison, 중국명 莫理徇, 1862-1920)은 모친이 부쳐준 40파운드를 가슴에 품고, 과피모(瓜皮帽)와 가짜 변발을 하고 상해에서 출발하여 장강을 거슬러 오라갔다. 중국내 첫번째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이날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한 외국인이 교만한 심리를 극복할 수 있고, 변발을 끌고 여행하기를 원한다면, 쓰는 여행비는 단지 유럽인 복장을 하고 쓰는 것의 4분의 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가 190센티미터인 이 오스트레일리아인은 그후 이십여년동안, 중국의 정치중심 북경에서 활약한다. 화려한 영문으로 모두 일백만자의 일기를 쓴다. 그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영원히 극동현대사의 재미있고 직접적인 기록이다. 역사학자에게 큰 참고가치가 있다."

 

110년의 시간이 흐른 후, 2004년 3월, 청말민초의 중국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치를 지닌 문건이 북경으로 운송되어 왔다. 이미 고인이 된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계 역사학자 낙혜민(駱惠敏) 교수의 미망인 헬렌 여사는 국가청사편찬위원회 주임 대일(戴逸)에게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모리슨이 쓴 원고의 복제본 및 그들 부부가 진지하게 읽고, 정리, 연구한 성과 합계 150상자를 기증했다.

 

모리슨은 청말민초 중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1897년에서 1912년까지 그는 영국 <타임즈> 북경주재기자로 있었다. 기자로서 모리슨은 무술변법, 의화단운동, 신축조약, 청말신정, 러일전쟁, 서태후와 광서제의 장례식과 신해혁명의 모든 역사과정을 직접 겪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그는 제1기 민국정부의 초청을 받아, 1912년부터 1920년까지 원세개를 포함한 4명의 총통의 정치고문을 지낸다. 국민정부의 정치고문으로서, 그는 중국정부의 일본 '이십일조'에 대항하는 정치술수를 도와주고, 중국이 연합국으로 제1차세계대전에 가입하도록 추진하였으며, 원세개의 칭제에 반대했다.

 

1920년 5월, 모리슨은 영국에서 죽느다. 죽기 전에 그는 중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지금 150상자의 모리슨문서는 바다를 건너 북경으로 운송되었다. 이 "죽어도 중국에서 죽겠다"는 중국통은 마침내 그가 "이처럼 자상한 중국인들 사이"로 돌아왔다.

 

중국학자는 일찌감치 모리슨의 연구가치를 인식했다. 그러나 원시자료가 결핍되어, 관련연구는 시종 전면적으로 전개되지 못하였다. 2002년 8월, 청사편찬공정이 시작된다. 국가청사편찬위원회는 미국, 일본, 러시아, 영국, 독일에 5개의 "해외공작참"을 설립했고, 해외에 흩어진 문헌, 자료를 수집했다. 모리슨문서는 국가청사편찬위원회의 주요 목표중 하나가 되었다.

 

모리슨이 남긴 자료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시 미셀도서관에 보관된 모리슨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도쿄 동양문고에 보관된 외국어서간에 보관되어 있다.

 

모리슨은 역사감이 많고, 일처리가 자세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는 일부러 그의 일기, 회고록, 통신, 비망록등 문자자료와 사진, 명함, 표증(票證) 및 각종 실물자료를 남겼다. 모리슨문서는 255상자, 장정된 책과 주머니를 포함한다. 그중에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료가 많다. 예를 들어, 당시의 여관장부와 입풀금장부가 있다. 그가 소장한 청말의 초표(鈔票)중 1장은 1906년 손문이 서명하여 발급한 것이다. 당시 의거군이 군수물자를 구매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가 수장한 중외인사 명함은 당시 거의 모든 북경사교계의 명사를 포괄하고 있다. 대홍첩자(大紅帖子)로 인쇄한 명함을 빽빽하게 붙인 두 권이 포함된다. 모리슨문서의 사진은 39책(합)이다. 그중의 주체부분은 수천점의 옛날 사진이다. 대부분은 중국과 관련이 있다. 모리슨이 사망한 후, 그의 처는 유언에 따라 그의모든 문건, 서신, 일기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시의 미셀도서관에 기증하고, 모리슨문서라 칭한다.

 

모리슨자료의 또 다른 부분은 그의 개인 장서이다. 모리슨이 <타임즈> 기자를 맡은 이후, 중국에는 그가 필요로 하는 중국을 소개한 도서가 출판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1897년부터, 그는 아시아, 특히 중국과 관련한 외국어서간, 소책자, 도적등등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왕푸징대가의 그의 집에 방화설비를 갖춘 도서관을 건립한다. 모리슨은 모두 2.4만책의 도서를 소장했고, 110종의 정기간행물과 보표(報表)를 보관하여,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개인도서관이 된다. 이를 모리슨문고라고 불렀다. 1917년, 모리슨은 그의 개인장서를 3.5만파운드에 일본 미쓰비시회사 이와사키 히사야(巖崎久彌) 남작에게 매각한다. 이것은 오늘날 일본동양문고의 기초가 된다.

 

이들 진귀한 문헌은 자연히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주목하는 목표가 된다.

 

대인(戴寅)은 국가청사편찬위원회 편역조 구성원이다. 그는 모리슨문서를 중국으로 운송해오는 중임을 맡았다. 편찬위원회가 대인에게 이 업무를 맡긴 이유는 그가 여러해동안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한 경험이 있는 것외에 그가 대일(戴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대씨집안과 모리슨문서의 기증자인 낙혜민은 20여년ㅇ에 이르는 우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