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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한고조 유방의 유언 분석: 환환상구(環環相扣), 백밀무일소(百密無一疎)

by 중은우시 2013. 12. 21.

글: 하목풍(何木風)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면, 천하가 모두 그를 쳐라." ---<사기.여태후본기>

 

"여후가 고조에게 물어 말하기를: 폐하가 세상을 떠난 후 소상국이 죽으면 누가 대신합니까. 황상이 말하기를: 조참이 괜찮다.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니 답하기를: 왕릉이 괜찮다. 그러나 약간 우직스러우니 진평이 도와주면 된다. 진평은 지식이 넘치지만 혼자서 맡기는 어렵다. 주발이 중후하고 문장을 잘 모르나, 유씨를 안정시킬 자는 반드시 주발이다. 그러니 태위를 맡길 수 있다. 여후가 다시 그 다음을 묻자 황상이 말하기를: 그 이후는 그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사기.여태후본기>

 

유방이 한 유언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완벽하고 소홀한 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두 건의 유언은 한나라초기의 정국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또한 한나라의 후기발전의 지시등이기도 하다. 인사안배의 유언은 한왕조 유씨강산을 공고히 했고, 백마지맹은 유씨강산을 370년간 지속하게 만들었다. 유방의 유언중 약간은 진나라 역사에 대한 반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은 부분은 당시 형세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이다.

 

인사안배의 비밀

 

한고조12년(기원전195년) 사월중순, 62세의 유방은 침상에 누워서 사신이 도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조정내외, 황궁내외의 분위기는 아주 비정상적이었다. 황궁외의 중신들은 황제의 목숨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자주 유방의 병석에서 시중을 들던 여후는 부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루는 저녁에, 그녀가 유방에게 다가가서, 시험적으로 무슨 유언이 있느냐고 물어본다. 유방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정치가의 신분으로 계속 묻는다: "당신이 죽고 승상 소하마저 죽는다면, 누가 승상을 맡아야 하겠습니까?"

 

승상의 직위는 진나라때 이미 백관의 우두머리였고, 명실상부한 정부의 두되이다. 황제는 그저 황족의 수뇌이고, 황제가 아주 멍청하지만 않다면, 승상이 어떤 직위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승상은 황제를 위하여 일하면서, 직접 백관을 관리한다. 즉 정부이다. 만일 황제가 한 국가의 광고모델이라면, 승상은 바로 국가를 운영하는 지휘자이다.

 

그래서, 정치적두뇌가 있던 여후는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이다. 가장 핵심문제를 끄집어 냈다. 유방은 비록 곧 죽을 것이지만 머리는 맑았다. 그래서 그는 두번째 유언(첫번째 유언은 백마지맹이다)을 한다.

 

그는 여후에게 대답한다: "조참"

여후가 다시 묻는다: "그 이후에는?"

유방이 말한다: "왕릉" 그리고는 바로 보충해서 말한다. "왕릉은 약간 우직하다. 진평이 그를 도우게 하면 된다. 진평은 지혜가 넘치지만, 혼자서 중임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반드시 주발이 그를 돕도록 해야 한다. 주발에게 태위를 맡기면 된다. 아마도 왜인들은 주발에게 문재가 부족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말해서 장래 유씨천하를 안정시킬 사람은 분명히 주발이다."

 

여후는 마음 속으로 약간 불쾌했던가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묻는다. 유씨천하를 안정시키다니? 그녀는 그래서 다시 묻는다: "이들이 모두 죽으면 누가 그들을 대신하여야 하는가?"

유방은 고심막측하게 말한다: "그것은 네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유방은 너도 그때까지 살 수는 없을테니 그것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같은 해 사월 이십오일, 유방은 장락궁(長樂宮)에서 사망한다. 정치가 여후는 '비불발상(秘不發喪)'하며 이유를 총신 심이기(審食其)에게 말한다: "조정대신은 예전에 모두 황제와 대등하게 마주앉았던 자들이다. 북면칭신하는데 마음 속으로 불만이 컸다. 현재 그들이 나의 아들 유영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신하를 칭하려면 마음 속으로 분명히 불복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만일 글을 모조리 주살하고 멸족시키지 않으면 천하는 안정되지 못한다."

 

심이기는 좋다고도 좋지 않다고고 하지 않는다. 다만 곡주후 역상(酈商)은 바로 말한다. 이 일은 나중에 좋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을 것이다. 그는 심이기에게 경고하며 말한다: "태후가 만일 사람을 죽인다면 절대로 좋지 않은 일이다. 진평, 관영이 형양(滎陽)에 대군 10만이 있고, 번쾌, 주발이 연, 대에 대군 20만이 있는데, 여러 장수들이 주살된다는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병력을 연합하여 관중으로 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그때가 되어 대신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제후가 외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고조의 기업은 연기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심이기는 그 말을 듣고 사태가 아주 심각하다고 느낀다.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급히 궁중으로 돌아가 여후에게 보고한다. 여후는 역시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녀는 사정의 경중을 바로 알아차리고 처음의 계획을 수정한다.

 

그래서, 그녀는 유방의 유언에 따라, 소하가 죽은 후, 조참을 승상으로 임명한다. 그후에는 차례로 왕릉을 우승상, 진평을 좌승상에 임명하고, 주발을 태위에 임명한다.

 

이제, 우리는 유방의 유언에서 언급한 몇몇 중용된 대신 및 그들의 서열순서를 보도록 하자: 조참 - 왕릉 - 진평 - 주발.

 

조참은 유방을 철저히 따른 자였다. 진군, 항우 및 반군과의 여러번의 전투에서, 그는 한마공로(汗馬功勞)를 세웠다. 다만 이것은 절대로 유방이 좋게 본 요소가 아니다. 유방이 그를 좋게 본 것은, 그가 황노지학(黃老之學)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진퇴주선의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조참이 승상의 직을 물려받은 후 무위이치(無爲而治)하며, "소규조수(蕭規曹隨)"(소하가 정한 규칙을 조참이 그대로 따르다)한다.

 

표면상으로 보기에, 이것은 황노지학과 당시의 한나라정부가 요구하는 것이다. 심층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여후가 장악한 한나라정권을 흔들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의 형세는 여후가 언제든지 궁중정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조참이후의 왕릉은 치국능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머리가 잘릴 지언정 원칙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여후는 왕왕 자식의 가족이익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그의 반대에 부닥쳐 이루지 못한다. 여후는 이런 상황하에서 진평에게 물어본다. 진평은 궤계다단(詭計多端), 보신유술(保身有術)의 자이다. 그는 여후의 모든 의견에 옳다면서 등락하고, 뒤로는 주발과 긴밀히 연락한다.

 

이것이 바로 유방의 고명한 점이다. 진평은 비록 족지다모(足智多謀)하지만, 군권이 없다. 태위 주발이 이 결점을 메워줄 수 있었다. 여후가 죽기 전에, 여후의 세력은 이미 최전성기에 달한다. 승상인 진평과 태위인 주발은 거의 배제되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후가 죽자, 여러 여씨세력들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 진평이 들고 일어난다. 보신술에 능통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여씨들이 천하를 잡으면, 진평은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즉시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태위 주발 및 유씨종실성원들과 연락하여, 신뢰불급엄이(迅雷不及掩耳)하게 여러 여씨들을 죽여버린다. 유방이 말했다: "유씨천하를 안정시킬 사람은" 분명히 주발일 것이라고. 과연 그 말대로 되었다.

 

다만, 이 인사안배에 관한 유언으로 유방은 유씨천하를 보장하는데 자신이 만만했을까? 유방은 여후를 잘 알았다. 아마도 우리보다 훨씬 깊이 알았을 것이다. 여후는 야심만만한 여성정치가이다. 이 인사안배의 망으로 유방은 여후를 묶어둘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을까?

 

견제: 뛰어난 예술

 

약간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방이 세운 인사안배유언에서 이런 결론을 얻어낼 것이다: 유방이 유언을 여후에게 남긴 것은 원래 그다지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시황이 조고에게 유언을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정보의 일방적인 전달이다. 한나라정국이 불안정한 상황하에서,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아주 높았다.

 

유영, 특히 태자로 있던 유영은 유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다. 확실하게 말해서, 태자 유영은 나약한 자이고, 유방이 그저 준 것일 뿐이다. 유영은 동년시기에 두번에 걸쳐 크게 놀란다. 첫번째는 항우의 군대가 유방의 고향을 대거 소탕할 때, 유영이 조부와 모친을 포로로 잡아간다. 당시, 어린 유영은 겨우 5살이었다. 키가 작아서 풀속에 숨어서 난을 피할 수 있었다. 다만 놀란 것은 분명하다. 두번째는 더욱 심하다. 그는 유방을 따라서 항우의 추살을 피했는데, 유방은 수레에 너무 많이 실어서 도망쳐서 목숨을 구하는데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여, 뚱뚱하고 마른 순서에 따라 유영오누이를 수레에서 밖으로 차버린다. 그것은 친아버지였다. 친아버지가 자신을 수레에서 차서 쫓아오던 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려 한 것이다. 누구도 이렇게 여러번 발로 걷어차이는 놀람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 이후 유영은 아주 고귀한 성격을 갖게 된다; 유약하고 겁이 많다. 무슨 일만 터지면 경궁지조(驚弓之鳥)가 된다.

 

유방은 태자에 관하여 큰 수술을 하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유영을 끌어내리고, 그가 가장 총애하는 척부인의 아들 조왕 유여의를 태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다만, 유영의 모친 여후와 여러 대신의 반대하에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유방이 보기에, 폐위되는 태자가 여후의 친아들이고 '모이자귀(母以子貴)'하므로 여후가 반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대신들까지 반대하는 것에 대하여 유방은 우울해진다. 비록 대신들이 내놓은 이유는 태자를 폐출하는 것은 국가안위에 관련되는 대사라는 것이었지만, 유방이 생각하기로 그런 이유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여후는 당연히 유영을 통제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대신들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현실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당시의 상황은 유영이 집권한 세력에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여치(여후)를 대표로 하여, 여택, 여산, 여록의 숙질을 포함하여 우리는 그들을 "후당(后黨)"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또 다른 일파는 소하를 대표로 하여, 조참, 주발, 관영을 포함하는데, 우리는 이를 "상당(相黨)"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쌍방은 모두 유방과 친밀했다. 유방은 실제로 그들을 드러내놓고 제거할 수 없었다. 다만 유방은 자신의 방법이 있었다. 이런 방법은 깡패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다.

 

"상당"을 억제하는데, 유방은 유영을 위하여 강의견인(剛毅堅忍)한 모후를 기른다. 그리고 모후의 곁에 전투를 잘 할 수 있는 '후당'이 있다. '후당'의 견제하에, 소하는 날개가 단단해지고 위망도 높았지만, 유방의 핍박하에 소하는 스스로 명성을 더럽히고, 스스로 '여민쟁리(與民爭利)'하는 오명을 뒤집어 쓴다. 그리하여 그가 백성들의 옹호를 받지 못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는 여후의 여동생을 대장 번쾌에게 시집보낸다. 소하가 지휘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일련의 조치를 통해서 유방의 구상은 완성된다.

 

첫째, 두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서로 균형을 이룬다. 누구도 상대방을 어찌할 수 없고, 누구도 상대방을 소멸시킬 수 없다. "상당"의 사람이 만일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려면 여후를 생각해야 했다; 여씨집안에서 만일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려면 반드시 승상이 무슨 태도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한나라 승상위치의 중요성이다. 그래서, 여씨가 유방의 뜻에 따라 승상을 임명한다면, 한나라는 이들 승상의 뜻에 따라 전진할 수 있었다.

 

다만, 유방의 이런 견제예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보험을 들기 전에 또 다른 보험을 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보험은 바로 이성제후(異姓諸侯)를 주살한 것이다.

 

안득맹사혜수사방(安得猛士兮守四方)

 

우리는 먼저 한고조12년(기원전195년)초부터 얘기해보자. 유방이 반란을 일으킨 회남왕 영포를 격패시키고, 화살에 맞은 상처를 안고 장안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그가 최후로 제후왕의 반란을 친히 정벌한 것이다. 다시 4개월이 지나, 그는 죽는다. 고향 퍠현을 지나갈 때, 아마도 금의환향의 생각때문이었는지, 혹은 화살의 상처로 도중에 힘이 들어서인지, 그는 내려서 성지를 전한다. 고향의 부로들과 즐거움을 함께하겠다고.

 

이 해에 유방은 이미 62세이다. 그러나 나이때문에 그가 고향사람들과 연회를 베풀며 담소하려는 흥취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고향의 모든 사람을 불러서, 술을 차리고, 돼지와 양을 여러 마리 잡는다. 모든 비용은 자신이 부담한다. 그리고 예전에 빚진 술값은 그가 몇 배로 갚는다. 십여일간 즐겁게 논 후에, 그는 떠나려고 한다. 고향사람들이 자꾸 말리자, 그는 할 수 없이 길에 장봉(帳)을 설치하고 3일을 더 마신다.

 

중국인의 고향관념은 아마도 세계최고일 것이다. 한 사람이 외지에서 성공을 거두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당초에 사나이 항우도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동으로 돌아가기를 고집했는데, 천고에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부귀해지고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 옷을 입고 밤에 다니는 격인데, 누가 알아주겠는가?(富貴不還鄕, 如衣錦夜行, 誰知之者)"

 

바로 이런 뿌리깊은 '고향'정서로 성취를 거둔 많은 중국인들도 고향으로 돌아간 후 먹고 마시며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천하를 얻은 유방은 고향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는 먼저 120명의 어린이합창단을 구성한다.  그리고 친히 "대풍기혜운비양, 위가해내혜귀고향, 안득맹사혜수사방"의 가사를 지었고, 노래를 부를 때 그는 축(筑)을 치며 친히 노래를 선창했다. 그리고 난 후에 돌연 곡을 한다. 곡을 마친 후, 다시 일어나 춤을 춘다. 마지막에는 고향에 대한 깊은 정을 토로한다: "떠돌이 인생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나는 비록 관중에 있지만, 죽은 후에 혼백은 패현으로 돌아올 것이다."

 

금의환향했으니, 자연히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고 싶을 것이다. 유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풍읍이 그를 배반했던 원한을 대거 보복한다. 원래 유방의 조상은 풍읍에 살았다. 나중에 패읍으로 이주한 것이다. 거사후, 유방은 스스로 패공이 되었고, 병력을 이끌고 풍읍을 점령한다. 그리고 옹치(雍齒)에게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옹치는 배반하고 위나라로 귀순한다. 그리하여, 고향으로 영광스럽게 돌아와서 그는 패읍의 부세를 면제시켜주었지만, 풍읍에는 같은 대우를 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 보복이라기 보다는, 그가 고향에 대하여 보여준 황제의 권위라고 할 것이다.

 

유방의 귀향은 한나라초기정국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먹고 마시고 자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대풍가>때문이다. 문자각도에서 보자면, 이 3구의 가사는 중국문학에 기록될 만하다. 그러나 유방은 문사의 재목이 아니었다. 그가 <대풍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특정한 환경속에서, 그의 주관적인 내심과 객관적인 현실이 부닥치면서 진심이 용솟음쳐 나온 결과이다. 우리는 항우가 죽기 전에 쓴 <해하가>를 기억한다. 이 두 수의 노래는 무장이 자신의 비범한 인생역정의 마지막 순간에, 눈앞의 처지에 대하여 느낀 강렬한 체험과 앞날을 바라보면서 느낀 우환과 곤혹을 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유방의 <대풍가>는 승리자의 노래라고 말한다. 만일 그 뜻을 자세히 음미해 본다면, 발견할 수 있다. 이 노래는 기실 승리자의 비가(悲歌)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 "안득맹사혜수사방"은 유방 본인이 스스로 7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경험의 집결이다. 우리는 한나라초기 정국이 제후반란의 현실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유방이 얼마후 정치유언을 남기게 되는 사상적 기초이기도 하다.

 

"맹사"는 누구인가? 바로 그들 제후왕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들 제후왕을 죽여버렸는데, 왜 당초에 그들을 제후왕에 앉혔는가?

 

모든 사정은 진시황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맹사는 모두 죽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진시황26년(기원전221년) 분봉과 군현의 문제를 둘러싸고, 진제국의 대신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진시황은 최종적으로 이사가 제안한 군현제를 실시한다. 이유는, 천하가 힘들게 전쟁을 계속한 것은 제후왕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유방은 항우와 싸우는 4년동안, 분봉제를 실시한다. 한 사람이 아무리 멍청해도 똑같은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이다. 유방이 분봉제를 취한 것은 확실히 부득이한 조치였다. 항우와 대항할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그는 중병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을 제후에 봉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한신, 팽월등 8명의 이성(異姓王)을 봉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군현제도 실시한다. 항우와 천하를 쟁탈하는 동시에, 그는 이미 자신의 영토에 18개군을 설치했던 것이다.

 

즉, 유방은 처음에 이성왕에게 분봉하지 않을 것을 생각했다. 이것은 천하를 안정시킨 후에, 하나하나 이성왕을 주살한 이론적 기초이다. 유방은 원래 깡패이다. 그는 전통의식과 규범의 속박을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분봉을 실시한다. 당연히 정치적인 필요가 있으면 제후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

 

초한상쟁의 두 주인공 항우와 유방중 유방이 전통의식과 규범의 속박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봉한 왕은 일정한 규칙과 제도에 의하여 분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완전히 정책과 책략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확실하게 말해서, 이들 왕에 봉해진 사람들은 완전히 유방의 하나의 도구이다. '왕'이라는 존귀하고 권위있는 글자도 유방이 입에서 나오는데로 줄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연왕 장도는 멀리 유연의 땅에 있었다. 영지를 차지하고 지켰다. 유방과 항우가 싸울 때, 그는 현명하게도 유방의 편에 선다. 유방은 자연히 그의 제후왕지위를 인정해주었다. 조왕 장이는 조의 땅에서 상당히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서, 유방이 조의 땅을 평정한 후 그를 왕으로 세운다. 한왕신은 원래 보통의 한장(韓將)이었다. 비록 주도적으로 유방를 쫓아서 한중으로 왔지만,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지는 못했고, 무슨 공을 세운 기록도 없다. 유방이 그를 한왕에 봉한 것은 그가 한왕의 후손이라는 신분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를 보내어 한의 당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유리했다. 이 세 사람의 공로는 근본적으로 조참, 주발등 한나라초기의 공신들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유방은 그들을 왕에 세운다. 그중의 비밀은 일목요연하다.

 

한제국이 처음 건립되었을 때, 천하는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유방의 뼛속에 있는 깡패기질이 발동한다. 한고조5년(기원전202년) 이월초사흘에 즉위하고 한고조12년(기원전195년)사월이십오일에 장락궁에서 병사한다. 유방은 이 7년간 너무나 바빴다. 그들 이성왕에게 죄명을 뒤집어씌우고, 그들을 제거하느라 바빴다. 이 7년의 기간동안, 반란을 평정하거나 반란자들을 처벌한 일은 매년 모두 있었다. 어떤 때는 한 해에 여러 건이 있었다. 이들 반역자들은 지난날의 항우와 다르다. 모두 유방 자신의 신료였다. 그리고 많은 경우는 그를 도와 항우를 이겨 천하를 얻게 해준 공신이다. 어떤 경우는 심지어 그의 직계심복이다. 그를 배반할 만한 사람은 다 배반했다. 그가 핍박해서 배반시킬 사람도 다 배반했다.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사람도 배반했다. 유방은 이 7년동안 살아도 죽은 것만 못했다. 옛날에 그와 항우가 대신할 때 그 종용회햬(從容恢諧)한 모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제후왕의 반란을 유방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평정했다. 선후로 정벌하거나 처리한 제후왕은 임강왕 공환, 연왕 장도, 한왕신, 조왕 장오와 조상(趙相) 관고(貫高), 대상(代相) 진희(陳豨), 제왕에서 초왕으로 옮기고 다시 회음후로 폄하된 한신 및 양왕 팽월, 회남왕 영포, 연왕 노관이 있다. 이 기간동안, 유방은 분노에 휩싸여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말을 타고 전쟁터에 나서면서 고생을 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흉노에게 7일간 포위되어서 하마터면 죽을 뻔도 한다; 조나라땅을 지나갈 때, 하마터면 다른 사람에게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다. 영포를 칠 때는 빗나간 화살에 맞아서 상처를 입는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큰 풍랑을 견딜 수 있을까? 아마도 한고조 유방일 뿐일 것이다.

 

쓸데없는 말을 필요없이, 한나라초의 공신은 수량에서나 질에서나 역대왕조중 최고이다. 유방은 단시 이들을 일종의 도구로 생각했다. 그래서, 유방이 온갖방법으로 핍박하여 이들 제후왕은 부득이 반란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한왕신은 바로 전형적인 사례이다.

 

앞에서 이미 얘기한 것처럼 한왕신을 세운 것은 완전히 유방이 한의 땅을 안정시킬 고려때문이었다. 천하가 안정되자, 한왕신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졌을 뿐아니라, 한왕조의 강병이 주둔하는 곳에 있으므로, 항상 유방의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먼저 흉노가 변경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한왕신에게 변방을 지키게 한다. 한왕신의 재능은 자연히 흉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흉노와 화의를 구한다. 유방은 크게 웃으며, 이를 핑계로, 한왕신을 태원군으로 보낸다. 태원군은 병력도 양식도 없다. 그리고 흉노를 막는 중임도 져야 한다. 한왕신의 처지는 사형수와 다를 바 없었다. 한신, 팽월, 영포는 모두 유방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죽인 것이다.

 

역대이래로 개국황제는 대거 공신을 살륙했다. 그러나 유방보다 더 잔인한 사람은 없다. 나중의 주원장만이 그를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이다. 유방은 주원장과 마찬가지로, 황제로 올라가는 길에서 단결하는 것만이 역량을 발휘했다. 그래서 대오에 들어있는 인원의 성분이 복잡했다. 한약을 다리는 것처럼, 많은 한약재를 모두 솥 안에 넣고, 다 끓인 후, 약재는 버려진다. 끓인 약즙만 마신다.

 

유방은 초나라를 배신하고 한나라에 의탁한 제후왕 예를 들어, 연왕, 한왕, 조왕등과 연합했고, 그들에게 봉해준 나라를 인정하고 그 영토를 떼어주어 칭웅하게 한다. 항우에 대한 항장은 회유할 수 있다. 한신을 제왕에 봉하고, 팽월을 양왕에 봉하며, 영포를 회남왕에 봉한다. 그가 전국을 통일하기 전에, 그가 건립한 62군중 중앙이 직접 통제하는 것은 15군에 불과했다. 이성왕들은 유방의 황권에 대하여 큰 위협이었다. 이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이런 특정한 역사조건에서 유방은 이성왕에게 주살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크게 "안득맹사혜수사방"이라고 외친다. 기실 가장 근본적인 고함은: 이들 맹사는 가장 적합한 사방을 방위할 재목이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백마지맹(白馬之盟)

 

이어서, 그는 다시 자신의 제국에 또 하나의 보험을 든다. 한고조12년(기원전195년) 삼월 중순, 유방이 사망하기 1개월전에, 유방은 중병에 걸린 몸을 이끌고 조정중신과 그이 부인 여후를 한 곳에 모은다. 그리고 백마를 한 필 죽이고, 하늘에 맹세한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 역사상 영향이 아주 깊은 백마지맹이다.

 

백마지맹은 모두 2가지 내용이다: 하나, (대신들에게 맹세한다) 나라는 영원히 존속하며, 후예들에게 은혜를 베푼다(한나라가 존속하는 한, 대신들 및 그 자손은 영원이 먹고 마실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둘,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면 천하가 그를 함께 친다. 만일 공로가 없이 후에 오르게 되면, 천하가 모두 죽인다. 즉, 황족성원이 아니면 왕에 봉해질 수 없고, 군공이 없는 자는 후에 봉해질 수 없다.

 

유방의 이 방식은 아주 고명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고 초한지쟁을 일으킨 동고동락한 포의장상들 및 그 자손의 운명과 한나라제국의 운명을 긴밀하게 연결시킨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유씨통치를 유지하도록 후회없이 분투하게 한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백마지맹의 두 내용은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한나라제국은 공신제후들을 후대하는 것은 과거공로에 대한 보수뿐아니라, 다시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되면 천하가 모두 그를 친다"는 기초위에서이다. 후자는 유방이 백마지맹을 한 최종목적이다.

 

백마지맹은 이때부터 한제국(동한을 포함하여)의 상방보검이 된다. 누구든지 한제국에 대하여 딴 생각이 있었으면 이 검병하에서 여러번 생각해야 했다. 얼마후, 이 검병은 작용을 발휘한다. 유방이 죽은 후, 여후가 그녀의 친척을 왕으로 봉하려 할 때, 승상 왕릉이 즉시 튀어 나와서, 큰 소리로 외친다. 그리고 진평과 주발을 질책한다: "너희는 당초 고조와 피를 꽂아 맹세한 일을 잊었는가, 현재 고조가 국었고, 여후는 조고의 맹세를 어기려 하는데, 너희는 제지하지 않았다. 나중에 저승에 갔을 때, 너희은 고조를 무슨 면목으로 만날 것인가?"

 

비록 여후의 제안이 최종적으로 강제통과되었지만, 왕릉의 이 태도는 아주 중요하다. 왕릉의 이런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여씨들에게 분봉한 행위는 영원히 위법한 것이 된다. 이런 전제는 장래 여씨들을 주살하는데 현실적인 기초가 된다.

 

여후는 자연히 백마맹세의 중요함을 알았다. 임종전에, 그녀는 자신이 이미 왕으로 봉한 두 친척에게 말한다: "노황제가 당초에 노신들과 약속을 했다.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면, 천하가 모두 그를 친다고. 나는 곧 죽을 것이다. 너희는 반드시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사정은 과연 그녀가 생각한대로, 주발이 군영에서 팔을 들어 소리치자, 여씨는 순간적으로 와해된다.

 

여러 해 이후, 한경제의 왕황후는 한경제를 교사하여 자신의 오빠를 후(侯)에 봉하도록 교사한다. 당시 승상을 맡고 있던 주아부(周亞夫)는 백마지맹을 꺼낸다. 한경제는 할 수 없이 그만둔다. 한성제때, 외척 왕씨가 정권을 잡는다. 대신들은 유방의 백마지맹을 꺼내고 음양오행설을 꺼내들어, 결국 분수를 지키지 않는 외척대장군, 대사마 왕봉(王鳳)을 사임시킨다. 이렇게 보면, 백마지맹의 맹세내용은 유씨정권을 유지보호하는 호신부이다.

 

"동한"에 이르러, 백마지맹은 여전히 작용을 발휘한다. 한장제때, 황제는 여러번 황태후의 형제를 후에 봉하려고 한다. 이 노태후는 백마지맹을 이유로 완곡하게 거절한다. 한안제때, 조양후 유호의 종형인 유환이 한안제의 유모 왕성의 딸 백영을 처로 삼고, 유호의 작위를 넘겨받는다. 당시의 대신 양진은 상소를 올려서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한고조와 대신간에 백마지맹이 있었다. 공신이 아니면 봉하지 않는다. 유환은 공이 없다. 어찌 작위를 얻을 수 있습니까." 한영제때 황제는 환관들에게 작위를 함부로 내린다. 대신 여강이 상소하여 말한다. 그의 근거는 여전히 유방이 군신들과 맺은 백마지맹이다.

 

사실상, 백마지맹의 작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왕망의 탁고개제(托古改制)때 '왕조'를 건립하고자 할 때, 그때문에 미쳐버린 농민과 지주들은 모두 '한후(漢后)'의 명의로 거병한다. 이들이 이렇게 한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백마지맹의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된 자는 천하가 함께 친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가장 강대한 조반대군인 녹림군이 제기한 구호는 "유씨중에서 인망이 있는 사람을 세운다"였다. 그리고 밥통 유현을 황제로 삼는다. 누군가 유현에게 당초 유방이 제후를 대거 봉하자고 건의했을 때, 밥통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당초 고조가 말했다.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우리는 말했다. 유방은 신이 아니다. 예언가도 아니다. 그는 대신들과 백마를 죽여 맹세했는데, 큰 원인은 진나라가 망한 역사를 귀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성제후왕이 기본적으로 다 없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공훈이 탁월한 포의장상공신을 기초로 한다. 이것은 바로 유방(현재 우리가 말하는 위대한 인물)이 유씨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취한 마지막 영향이 큰 전략적 조치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마지막 유언에서 한나라강산을 유씨로 유지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다.

 

절름발이의 일막

 

한 왕조는 왕왕 전왕조의 정치득실을 귀감으로 삼는다. 한왕조도 예외는 아니다. 유방은 이성왕을 폐위시키는 동시에, 동성왕을 대거 봉한다. 동시에, 그는 또한 진왕조의 군현제를 실시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서한은 "군", "국"이 병존하는 정치제도를 실시한 왕조이다. 이것은 주로 유방의 역사에 대한 견해에 기인한다. 그는 주왕조는 분봉으로 멸망했고, 진왕조는 분봉하지 않아서 멸망했다고 보았다. 만일 봉국이 너무 많으면, 도처에 황족구성원이 있어, 진승,오광이 성공적으로 의거를 일으킬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유방은 절충적인 방법을 생각한다. 한편으로 진왕조의 군현제를 유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주왕조의 분봉제도를 회복시킨 것이다.

 

동시에 규정한다. 봉국과 현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봉국은 독립적인 행정권과 군권을 가진다. 명목상, 그것은 현과 같이 중앙정부의 영도하에 속한다. 그러나 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국과 중앙정부간에는 이심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여러 사람에게 발견된다. 한경제에 이르러, 대신 조착(晁錯)은 봉국의 면적을 축소시키자고 극력 주장한다. 그리고 봉왕의 권력을 감소시키자고 주장한다. 후원3년(기원전141년), 이 주장은 마침내 한왕조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칠국지란을 일으킨다.

 

이 칠국은 당시에 모두 제국의 동쪽에 있었다. 그리고 실력이 상당히 웅후했다. 그들이 반란을 선포하고, 실천을 개시하자, 제국의 절반은 즉시 상실된다. 한경제는 크게 놀랐다. 그는 확실히 자신의 적수가 이렇게 강대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맹랑함을 후회하여, 지신의 조상 유방이 한 이 분봉제동 대하여 통한해 마지 않는다. 당시, 칠국이 제출한 두 가지 구하는 하나가 조착을 죽여라, 하나는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라. 한경제는 모두 받아들였다. 조착은 저잣거리에서 참형당한다. 그를 따라간 사람은 그의 삼족이다.

 

칠국연합군은 중앙정부의 굴복으로 행동을 중지한 것이 아니라, 이번 사건을 이끈 유비(劉濞)는 솔직하게 말한다; "나 자신은 황제가 되고 싶다". 그의 군대가 낙양에 가까워졌을 때, 제국에서 잘 싸울 수 있는 주아부를 찾아낸다. 그는 예전에 유씨강산을 공고히 만든 주발의 손자이다. 2개월만에, 주아부는 오초연군의 양식보급로를 차단하고, 오초연합군은 기근으로 철수한다. 주아부는 그 뒤를 쫓는다. 오초연합군이 대패하다. 오초연합군은 반군의 주력이다. 오초연합군은 패배하고, 오초 두 나라는 멸망한다. 나머지 각 봉왕은 자살하거나 피살당한다. 기세가 대단했던 칠국의 난은 순식간에 평정된다.

 

칠국의 난이 비록 평정되었지만 이것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만일 칠국연합군의 우두머리 유비가 잘못 지휘하지 않고 강퍅자용(剛愎自用)하지 않았다면, 누가 축록에 성공했을지는 말하기 어렵다. 만일 유비의 반란이 정말 성공했다면 중극은 전국시대의 할거국면으로 접어들었을 것이고, 서로 병합하며, 전쟁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그의 실패는 유방이래의 분봉제를 끝냈고, 서한왕조는 순조롭게 병목을 돌차하여, 통일형세는 더욱 공고해진다.

 

한경제는 이 기회에 각 봉국의 행정권과 군권을 회수한다. 봉국의 대권을 장악한 사람은 더 이상 '봉왕'이 아니다. 국상(國相)이다. 국상은 중앙정부가 직접 파견한다. 중앙정부는 점차 진정한 대통일정부로 된다. 나중에 한무제가 건공입업(建功立業)하는데 견실한 기초를 세운다.

 

이것은 아마도 유방의 가장 절름발이인 전략배치일 것이다. 그는 당싱 이것이 유씨강산을 공고히 하는 조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절름발이조치는 하마터면 그가 힘들게 만든 기업을 무너뜨렸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한왕조의 운명일 것이다.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어떤 때는 하나의 사건의 성패가 크거나 작거나 '운명'이 작용한다. 사정도 그렇고, 사람도 더욱 그렇다.

 

바로 한고조12년(기원전195년) 사월, 유방이 중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할 때, 여씨는 부부의 정에 기하여, 궁밖에서 의사를 불러서 그의 병을 진료한다. 진단후, 그는 이 의사에게 묻는다.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 의사가 대답한다.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 의사는 원래 과찬으로 여겼다. 생각지 못한 것은 유방이 침상에서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소리친다: "어르신은 평민의 몸으로 삼척의 검을 들고 천하를 취했다. 이것은 운명이다. 현재 나는 곧 죽는다. 이것도 운명이다. 설사 편작이 살아 있어도, 그가 운명과 싸울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을 마치고, 그는 의사를 쫓아버린다.

 

"운명"이라는 글자를 유방이 말을 하면 더욱 설득력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만일 진말농민의거가 아니었다면, 만일 진승의 그 "왕후장상에 씨가 있느냐"는 고함이 무수한 포의로 하여금 '평민은 왕후와 관련이 없다'는 짐을 지고 그의 대오에 참가하게 만들었다. 그가 어떻게 항우를 격패시키고 천하를 얻었는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평민이 왕이 된 사례는 없었다는 것이다.

 

실사구시적으로 말해서, 이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깡패와 사생아라고 부른 '황제'는 그런대로 일을 잘 했다. 기원전206년, 유방은 함곡관을 격파하고, 자영은 지도(軹道)의 곁에서 맞이하며 투항한다. 천하통일한지 16년만에 진왕조는 멸망한다. 4년후, 유방이 제후를 모아서, 항우를 해하에서 포위공격한다. 서초패왕은 오강에서 자결하고, 초나라는 망하고 한나라는 흥한다. 천하는 이렇게 일단 안정되었다.

 

다음 해, 황제 유방은 낙양 남굼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놓고, 여러 신하들에게 이런 문제를 묻는다: "내가 천하를 얻은 것은 무엇때문인가? 항씨가 천하를 잃은 것은 무엇때문인가?" 진,초는 흥하는 것도 순간이고 망한 것도 순간이었다. 설사 유방과 같은 초망출신이어도 제국의 흥망의 변화와 장치구안의 도리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찌기 진나라를 이긴 초기, 유방은 진나라가 망한 원인을 "가혹한 법"으로 규정한다. 고기, 왕릉이 성패의 관건을 현실적인 물질이익자극으로 보았을 때, 유방은 스스로 인재를 잘 썼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린다.

 

폭력으로 구정권을 전복시키고 나면 적나라한 폭력으로 신정권의 합법성을 증명할 수 없다. 이와 동시에, 출신이 미천한 통치자도 반드시 간편하고 쉬운 사상체계를 이용해야 한다. 시정을 지도하는 방침을 제정하고 집행해야 한다.

 

이 때, 소하가 일어선다.

 

유방은 제후와 바쁘게 주선하고 있을 때, 한제국의 내정은 모조리 소하가 책임진다. 소하는 진나라관리출신이다. 직업배경은 필연적으로 그의 집정사상에 영향을 준다. 동시에, 소하는 진나라가 법으로 통치하는 고압적인 정책이 가져온 극단적인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 한제국의 통치질서를 재건하기 위하여, 소하는 자신이 가장 잘아는 진나라제도, 진나라법률에서 많은 것을 흡수한다. 다만 착안점은 백성을 안심시키고, 민생을 휴양시키는데 두었다. 그 제도건설은 최대한 사회조건과 군중심리에 적응했다. 당연히, 소하의 집정은 스스로 시정방안을 생각해내고, 이론의 지도를 구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직업본능적인 반응과 경험적인 감지이다.

 

나중에 조참이 소하를 대신하여 승상이 된다. 후중장자(厚重長者)를 뽑아서 관리로 삼고, 관대하게 다스리게 한다. 청정무사(淸靜無事)를 중요하게 여긴다. 조참의 정치노선은 명확하다: 엄격하게 소하가 계획한 전장제도를 따른다. 최대한 문제를 적게 발생하게 하고, 극력 사회모순을 격화시키는 것을 회피한다.

 

이 점에서 보면, 유방의 임명은 얼마나 영명했는가. 이것은 그가 자주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쓰는 것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바로 이런 고첨원촉(高瞻遠矚)의 두 가지 유언은 한왕조의 역사에 칠왕지란을 있게 했고, 한왕조 4백여년의 유씨강산을 있게 했다.

 

당연히, 칠왕지란을 놓친 것 이외에, 개국황제 유방의 유언은 또 하나의 헛점이 있다: 그가 선택한 후계자는 '불요천하(不擾天下)'하는 무위정책으로 대한제국을 다스린다. 그러나 이것은 장기적인 계책이 아니다. 제국이 일정한 단계로 발전한 후,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자연히 유방이 말한 것처럼, 이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저 칠십년도 지나지 않아, 한왕조를 쇠락하게 만드는 한 황제가 태어난다. 그는 바로 한무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