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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젊고 예쁜 여치(呂稚)는 왜 나이든 유방(劉邦)에게 시집갔는가?

by 중은우시 2014. 1. 15.

글: 이치아(李治亞) 

 

계속하여 이해가 안되는 일이 있다. 젊고 예쁜 여치가 왜 나이든 유방에게 시집을 갔을까? 부친 여공(呂公)의 한 마디 말로 자신의 혼인대사를 결정짓는다면 그것은 너무 경솔한 일이 아닌가?

 

여치는 유방에게 시집갈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방은 행실이 좋지 않았다. 유방은 직위도 없고 권한도 없으며 그저 백수로 노는 자였다. 자주 여자들과 어울려서 결국 결혼도 하지 않고 사생아를 낳는다. 이름은 유비(劉肥)이다. 비록 사수정장(泗水亭長)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지마관(芝麻官)에 불과하다. 무슨 빛나는 앞날이 있을 수 있겠는가?

 

둘째, 나이차이가 너무 크다. 낭재여모(郎才女貌)라면 어울리는 한 쌍이다. 유방은 비록 초혼이지만, 여치보다 15살이나 많았다. 이렇게 많은 나이차이는 여치가 혹시 유방의 어떤 점을 탐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느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당시 유방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술마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허풍떠는 재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점이 없었다. 여치는 화용월태이고 나이도 묘령이었다.

 

셋째, 지위가 어울리지 않았다. 여치는 집안이 부유했고, 부친은 현지 현령과 친한 사이이다. 여씨집안은 원수를 피해서 패현으로 이사왔고, 패현의 관리들은 상사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속속 여씨집안이 이사온 것을 축하하러 찾아간다. 주리(主吏) 소하는 손님의 좌석을 배치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일꾼들에게 하례(賀禮)가 1천동전이 되지 않으년 당하(堂下)에 자리를 안배하라고 했다. 사수정장 유방은 패현의 여러 관리들은 별로 대단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헌례에 "하전일만(賀錢一萬)"이라고 적어낸다. 기실 그는 돈을 아예 가져오지도 않았다. 귀한 집 규수인 여치는 그저 부친이 유방의 앞날이 대단히 좋다는 말을 듣고, 유방과 함께 살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넷째, 여치는 지서달리(知書達理)하는 지식여성이고, 유방은 아예 글을 읽지 않은 무지랭이이다. 문화수준에 차이가 컸다.

 

다만, 여치는 전혀 망설임없이 유방에게 시집간다. 이를 보면 여치는 유방이 자신이 마음 속에 생각한 진명천자(眞命天子)라고 여긴 것같다. 결과도 확실히 그러했다.

 

첫째, 당시 남자들이 아주 적었다. 특히 기개있는 남자는 적었다. 대부분의 장정들은 붙잡혀서 장성을 쌓거나, 아방궁을 짓는데 끌려갔다; 유방은 비록 나이가 많지만, 제왕의 기운이 있었다. 비록 역경에 처해 있지만, 사람을 잘 알아보는 여치에게는 진흙속에서 찾아낸 진주와도 같았다.

 

둘째, 유방은 활달하고 시원시원했으며 부하중이 사사(死士)가 있었다. 유방은 일찌기 신릉군을 존경하였다. 일찌기 걸어가서 방문한 적도 있다. 신릉군이 죽는 바람에 그만둔다. 나중에 신릉군의 문객 장이(張耳)를 사귀는데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다. 이는 다른 자잘한 인물들과 비교해서 유방의 뛰어난 점이었다.

 

셋째, 여치는 자신의 부친을 믿었다. 여치의 부친은 안목이 뛰어났다. 한번도 잘못 본 적이 없었다. 여치는 부친이 자신의 평생행복을 위하여 결정한 것이라고 믿었고, 자신을 불구덩이속으로 밀어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도 유방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넷째, 진왕조에서 비빈을 뽑을까 걱정했다. 당시 진이세는 궁전을 확충하고, 천하에 널리 미혼여자를 구했다. 적지 않은 여자들은 궁중에 후궁으로 뽑혀가지 않기 위하여, 적막한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하여, 통상적으로 급히 시집을 가곤 했다.남편이 확실히 있는 것이 궁중에 들어가서 적막하게 일생을 보내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다섯째, 유방은 나이가 많아서, 징발될 연령을 넘어섰다. 나이가 젊은 남편을 만나서 생과부로 지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유방에게 시집간다면, 비록 논밭에서 일을 해야 하고, 물레를 젓고, 절구를 찌어야 하지만, 어쨌든 가족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그외에 유방은 현지지방에서 호소력이 있었다. 여치의 가정은 원래 약간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패현에서 하루빨리 정착하고 융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여섯째, 여치는 자신의 안목이 독보적이었다. <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유방과 여치는 한 신비한 노인을 만났고, 점을 쳤다. 여치와 한쌍의 자녀가 유방때문에 말할 수 없이 부유하게 된다는 말을 듣는다. 유방이 망탕산으로 도망쳐 갔을 때, 여치는 자녀를 데리고 산 속에 숨어있는 유방을 찾아간다. 이유는 유방이 가는 곳에는 머리 위에 오채(五彩)의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