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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모택동비서 전가영(田家英)의 사망진상

by 중은우시 2013. 12. 21.

글: 양성만보 2010. 10. 9. 

 

 

 

전가영은 1966년 5월 23일에 사망한다. "문혁"이 시작된 후, 등탁(鄧拓)에 이어 두번째 희생자이다.

전가영은 한을 품고 죽었다. 이 점은 의문이 없다; 그리고, 전가영이 자살한 것인가에 대하여도 의문이 없다 -- 관방이건 가족이건.

다만, 최근 들어 해외의 잡지에서는 또 다른 견해를 싣고 있다. 전가영이 타살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공중앙조직부", "중공중앙당안국"등 권위있는 부서의 자료문건을 증거로 제시하여, 실로 진위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였다. 일시에 인터넷에서는 의론이 분분했고, 바이두의 '전가영'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는 "전가영의 죽음에 관하여는 의문점이 아주 많다. 관방에서는 자살이라고 하였지만, 현재 갈수록 많은 자료는 타살임을 증명하고 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상은 무엇인가?

 

전가영(1922-196), 사천성 성도시 신도구 사람이며 본명은 증정창(曾正昌)이다.

1937년, 15살의 전가영은 연안으로 간다. 그는 먼저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들어가서 다음해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가장 젊은 근대사교사가 된다. 그는 당시 <해방일보>에 많은 잡문을 보냈고, 그중 1000자의 <종후방역설기(從侯方域說起)>라는 글은 모택동이 읽어본 후 높이 평가했다. 1946년, 모안영(毛岸英)이 소련에서 귀국했을 때, 중국어기초가 떨어져서, 모택동은 자신의 장남과 같은 나이인 전가영에게 업무를 하는 빈틈에 아들의 문사과외교사를 하도록 요청한다.

1948년, 비서 호교목(胡喬木)은 전가영을 새 비서로 추천한다. 이때부터, 26세의 이 '과외교사'는 모택동의 신임을 깊이 받게 된다. 그는 주석의 비서를 맡는 외에, 중앙정치연구실 부주임, 중앙판공청 부주임도 맡았다.

 

당시 모택동의 곁에 있는 사람중에서 전가영이 맡은 일이 가장 많았다. 그는 모택동의 개인예금, 도장 및 친구와의 왕래서신을 관장했을 뿐아니라, 10여년의 심혈을 모택동을 위해 도서관을 건립하는데 쏟았다. 막 북경에 들어왔을 때 서가 10개에 불과하던 것에서 만권이 넘는 책자를 갖춘 도서관으로 늘인다. 모택동은 글이나 시사를 쓸 때 자주 고적을 인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전가영에게 찾게 하거나 확인하게 했다. 얻기 힘든 쉬는 시간에 그는 영보재(榮寶齎)등 고서점으로 가서 서화를 구매하고 수집했다. 왕왕 돌아오면 먼저 모택동에게 가져가서, 두 사람이 함께 감상하고 평을 했다.

 

1965년말, 모택동이 이야기하던 중에 <해서파관(海瑞罷官)>의 문제을 언급했다. 전가영은 기록을 정리할 때, 이것은 문예에 관한 에피소드이고, 담화주제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서 이 부분의 말을 삭제했다. 이 일로 강청(江靑)과 진백달(陳伯達)에게 트집잡히고, "모주석 저작을 함부로 고쳤다(簒改毛著)"는 죄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1966년 5월 22일, 전가영은 '정직반성(停職反省)'을 통보받는다. 다음 날, 그는 모택동의 장서실내에서 한을 품고 자결하여 세상을 떠난다. 나이 겨우 44세때의 일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모택동이 서거하기 얼마전에 자신을 18년이나 따른 이 비서를 그리워하며 몇 마디 탄식을 내뱉었다고 한다: "전가영은 기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980년, 중공중앙은 전가영의 추도회를 거행하고,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성실한 사람이고 정파(正派)의 사람이다. 혁명기골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언행이 일치했고, 표리가 같았으며, 그가 다른 사람의 주장에 부화뇌동하는 일은 거의 없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1.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당안자료

 

1994년, 필자는 전가영의 자녀와 합작으로 <영복당내에서의 비극 일막 - 일부 가까운 사람의 전가영의 최후세월에 대한 추억>이라는 글을 써서, 전가영의 죽음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얼마동안 필자는 몇 편의 제목은 서로 다르지만 내용은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글을 계속 받아보게 되었다. 몇 건의 소위 '중공중앙'관련부서의 당안자료를 열거한 것이다. 전가영이 총으로 자살한 것에서 점점 왕동흥(汪東興)이 고위층의 지시를 받아 총살했다는 것이다. 읽어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글의 근거인 소위 당안자료에는 "중공중앙조직부(외조1997-7-0066-2)호당안", "중공중앙당안국(1980-4-0090-4)호당안", "중판(1980-5-00797)호당안"의 3종이다.

자료가 특정한 양식을 따르지 않았고, 당안원본의 사진을 증거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은 차치하고, 두서없는 문건의 내용에는 한눈에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업다. 날조한 사람이 만일 당안전문가에게 미리 가르침을 받았더라면, 이렇게 졸렬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당안자료의 의심스러운 부분은 잠시 놔두고, 내용을 보기로 하다. 소위 "중공중앙조직부당안"에 따르면, "전가영은 중앙에서 불러 그와 마지막으로 만회할 담화를 하자는 전화를 받은 후, 약 1시간 거소인 영복당에 있었다. 54형 권총으로 자살했다. 총소리에 경위가 놀랐다. 왕동흥은 경위의 보고를 받은 후, 내위(內衛) 주국화와 현장에 도착하여, 전가영이 이미 죽었음을 확인한다."

소위 "중공중앙당안국당안"에서는 왕동흥의 진술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쓰여있다: "나는 주석의 으로부터 전가영의 거소로 가서 그와 이야기를 하여, 반대편에 서지 말고, 스스로 몸을 뺄 수 없게 만들지 말라는 말을 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오월 이십삼일 오전 열시, 나와 내위는 영복당 전가영의 거소로 가서, 주석의 뜻을 전달했고, 그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당시 분위기가 격렬했고, 내위 주국화는 통제하지 못하고, 전가영에게 총을 한방 쏘았다. 나는 즉시 경위를 불러서 살펴보게 했는데, 전가영이 이미 죽ㅇㅆ다. 즉시 주석, 총리에게 보고를 하고....."

 

소위 "중판당안"의 기록은 가장 말이 되지 않는다. 소설의 대강같다: "화국봉은 당안실종사건에 관하여 1978년 7월, 두번이나 왕동흥을 추궁한다. 왕동흥은 말한다: 전가영이 당시 몸에서 권총을 뽑을 때, 나는 내위에게 손을 쓰라고 암시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일찌감치 죽었을 것이다. 오늘날 당신도 주석의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3건의 당안, 3가지 주장. 즉 전가영이 권총자살로 죽었는지, 내위가 통제를 잃고 오살한 것인지, 왕동흥이 명을 내려 사살한 것인지. 전가영이 총격으로 죽었다는 점만이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전가영의 죽음에 대하여 비교적 조사를 많이해서 내용을 알고 있는 필자가 보기에, 3가지 주장은 진상과 모두 괴리가 있다.

 

그러나, 인터넷을 찾아보면, 유사한 문장이 대량으로 전파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마 "거짓말은 멀리 가지 못한다"는 옛 철칙이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필자는 최근 다시 전가영의 죽음을 알고 있고 현장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인터뷰를 하고, 전가영이 총격으로 죽었다는 세가지 황당한 주장에 관하여, 그들과 더욱 상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문의 진술은 1994년 옛글에 대한 보충이 될 것이고, 총격설에 대한 일부 분석이 될 것이다.

 

2. 5월 22일 오후, 3인소조가 영복당에 도착하다.

 

1966년 5월 5일,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가 북경에서 개최된다. 회의진행 10일째, "문혁"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오일륙통지>가 통과된다: 팽(진), 나(서경), 육(정일), 양(상공)을 반당집단으로 규정한다; 동시에 팽,육,양,전(가영)의 문제를 처리하기위한 조치를 한다. 각각 위의 4명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중앙전안소조(中央專案小組)를 성립시킨다. 비록 <오일륙통지>가 통과된 다음날 밤, 북경시위서기 등탁이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회의에서 결정된대로 착착 조치가 진행되고 있었다.

 

5월 22일은 일요일이다. 오후 3시경, 안자문(安子文)을 조장으로 하고, 왕력(王力), 척본우(戚本禹)를 조원으로 하는 중앙삼인소조는 돌연 중남해 영복당 전가영의 거소 겸 사무실로 온다. 그들의 행동은 아주 비밀스러웠고,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산보하면서 얘기하는 습관이 있는 전가영은 비서 봉선지(逢先知)와 영대(瀛臺)를 산책하러 갔고, 처인 동변(董邊)만이 집에 남아 있었다.

 

약 반시간후, 전가영이 돌아온다. 거실에 몇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의외라고 여긴다. 이것은 확실히 기괴한 조합이다: 안자문은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의 부장이가; 왕력은 당시 중공중앙 대외연락부 부부장이다; 이때는 이미 중앙정치국회의에 열석하는 중앙 사작반자(寫作班子)의 구성원이다; 척본우는 원래 전가영의 부하로, 전 중앙판공청비서실의 간부였으며, 이미 <홍가>잡지로 옮겨간지 2년이 되었다.

안자문은 동변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하지도 않고 그녀에게 말한다: "너도 고급간부이니, 앉아서 같이 들어라."

 

그리고는 문건을 읽듯이 말한다: "우리는 중앙을 대표하는 삼인소조이다. 현재 양상곤이 반당반사회주의로 선포되었고, 전가영은 양상곤과 관계가 보통이 아니니, 조사를 받아야 한다. 중앙은 전가영의 사상이 일관되게 우경이라고 생각하여왔고, 전가영을 정직반성시키기로 결정했다. 모든 문건을 내놓고, 중남해에서 이사나가라. 중판비서실의 업무는 척본우가 책임진다. 이렇게 선언한 후,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전가영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하였다.

 

왕력의 회고에 따르면, 안자문은 전가영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앙은 너의 잘못이 엄중하다고 생각하여, 현재의 업무를 맡튼 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 잠시 척본우가 책임게 하였다. 중앙은 네가 즉시 모주석에 관한 원고, 문건, 모택동선집에 들어간 편집원고, 인쇄한 것을 절이하여 모두 제출하라." 척본우는 이렇게 회고한다: 전체 담화과정에서 안자문의 태도는 부드러웠다. 단지 전가영이 잘못했다는 부분, <해서파관>의 문제만 얘기했고, 전가영이 중남해를 떠나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전가영이 당시에 보인 표졍은 무력함과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척본우는 그가 전가영의 집에서 홍기(紅機, 붉은색 전화기)로 왕동흥과 통화했고, 안자문과 전가영의 담화상황을 전했으며, 그에게 기요인원을 보내어 문건정리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왕동흥은 중판 기요실의 왕묘경(王妙瓊)을 현장으로 보냈고, 중앙경위단 정치부 판공실 주임인 장순(張純)을 보내주었다.

척본우의 기억에서 왕묘경은 개략 오후 4시경에 영복당에 도착한다. 문건은 5,6시경까지 정리했다. 안자문, 왕력은 먼저 떠났고, 척본우는 그후에 왕동흥의 사무실로 간다. 문건과 원고를 정리하여 넘겨줄 때, 척본우는 현장에 없었고, 왕묘경이 전화로 그에게 얘기했다. 다만 나중에 전가영의 친척이 왕묘경에게 상황을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녀가 영복당에 가서 문건을 정리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여기서 '나중'이라는 것은 전가영이 죽은 후를 말한다.

 

사람들이 오고부터 그날 밤에 동변은 전가영이 문건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여기에는 중앙을 대신하여 초안한 각종 문건원고도 포함된다. <모택동선집> 제5권 원고, 그리고 전가영이 당사연구하며 오랫동안 수집한 중앙지도자동지들의 연안 및 각 시기의 강화(講話)들이다.

동변의 회고에 따르면, 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 전가영과 그녀는 여전히 관련 문건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전가영은 서랍에서 지질이 투박한 작은 노트를 꺼냈다. 내용은 호교목이 연안에서 기록한 주은래의 정풍시기의 강화이다. 건국초기 전가영은 호교목에게서 그 필기를 빌려왔었다. 그리고 동변에게 사본을 하나 만들라고 하였다. 그는 동변에게 말한다: "이것도 내야 하는가? 내게 되면 너까지 연루시키는 것이 아니냐?" 동변이 말한다: "내라. 나는 겁나지 않는다." 전가영은 일부러 동변의 눈앞에서 들어서, 제출하는 문건더미에 넣었다.

 

약간 휴식을 취한 후, 전가영은 이전에 여러번 보았지만, 한번도 연 적은 없는 남포면(藍布面)의 상자를 꺼낸다. 그 안에 넣어둔 것은 모택동의 친필이다.

한장 한장 모두 아주 자세하고, 정갈하게 표구되어 있었다. 이것은 모택동의 비서를 맡은 후, 하나하나 수집한 것이다. 어떤 것은 모택동이 그에게 써준 것이고, 어ㄸ너 것은 모택동이 그의 앞에서 썼지만 필요없다고 버리려 한 것이다. 다만 그는 모두 버리지 않고 수집해 두었다. 왜냐하면 전가영은 모택동의 서예를 좋아했고 동시에 그는 이들 글들이 언제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택동의 <칭률.인민해방군점령남경>은 당시 모택동이 쓴 후에 만족스럽지 않다고 던져버린 것인데, 전가영이 주워서 보존한 것이다. 전가영이 수집하지 않았더라면, 세간에 모택동이 이 기세여홍(氣勢如虹)의 걸작을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전에, 전가영은 자주 이 상자를 만지면서 동변에게 말해왔다: "이것은 우리 집안의 가보이다. 국보이기도 하다." 이 때, 그는 멍하니 상자를 바라본다. 마음 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이 상자도 제출해야 하는가? 한참을 망설인 후, 상자를 원래의 자리에 놓아둔다. 아마도 그는 이것이 '문건'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가 이것을 너무 아껴서 차마 내놓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3. 5월 22일 저녁의 전화

 

저녁을 먹을 시간이 지났지만, 전가영은 전혀 식욕이 없었고, 여전히 문서와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바로 이 때가 저녁 7시경이다. 양상곤의 뒤를 이어 중앙판공청 책임자가 된 왕동흥이 서루(西樓) 소회의실에서 회의를 소집한다. 참석자는 중앙판공청의 중남해내 몇 개단위의 과장이상 간부이다. 이런 급별의 회으에 참가하는 사람은 수가 많지 않다.

왕동흥은 회의에서 중앙이 팽(진), 나(서경), 육(정일), 양(상공)을 반당집단으로 결정하였다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이부춘(李富春)이 중앙을 대표하여 각대부위 지도자들에게 얘기한 것보다 반나절이 빠른 시간이다. 그는 동시에 전가영이 정직조사를 받고, 척본우가 승계하여 비서실의 업무를 지휘할 것이라는 등의 결정을 얘기한다. 이어서 전가영의 각종 잘못과 그 본인이 전가영과 투쟁한 것을 이야기했다.

 

어떤 글에서는 이 회의를 중앙판공청의 전가영에 대한 비투회(批鬪會)로 전가영이 이 회의에서 엄중한 비판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이 회의가 전가영의 자살을 촉진한 요소중 하나라고 얘기한다. 실은 그것은 그랬을 것이라는 수준이 이야기일 뿐이다. 밤 12시가 지난 후, 전가영의 집에 있는 전화기가 돌연 울린다. 이것은 척본우가 건 것이다. 동변은 뭐라고 하는지 똑똑하게 듣지 못했다. 다만, 전가영이 수화기를 던져버리는 소리는 듣는다. 동변이 궁금해하는 눈빛을 보내자, 전가영은 화를 내며 말한다: "척본우가 저 잘난줄 아는구만. 지가 뭐라고. 나는 서명하러 가지 않을 거다."

 

이에 대하여 척본우는 몇번 필자에게 얘기했다. 그는 그날 밤에 전가영에게 주도적으로 전화를 걸지 않았다. 전가영이 그에게 걸어온 전화이고, 그에게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한 것이라고. 그리새 왕묘경을 불러서 같이 전가영의 집에 갔다는 것이다. 전가영이 일부 남겨둔 문건을 내놓았다. 문건인수인계는 비서 봉선지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그는 동상(東廂)으로 가서, 봉선지를 찾았다. 전가영은 이 기회에 즉시 척본우에게 가서 누가 그를 해친 것인지 물었다. 다만 척본우는 바로 며칠 전에 전가영의 문제를 대하는데 있어서 비판을 받고, "소자산계급온정주의"로 질책받았으므로 무슨 말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척본우는 이렇게 말했다. 전가영은 그에게 은혜가 있었다. 그는 전가영에게 불경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글에서 그는 일찌기 필자와 전가영 자녀가 공동으로 쓴 글에서 전화수화기를 던졌다는 서술은 '추리소설'같다고 평가한 바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하여 관련인사를 찾아 척본우의 말을 확인해 보았다. 몇몇 관련인사는 모두 척본우가 그날 저녁에 영복당에 온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전가영의 부인 동변(생전의 회고), 전가영의 당시 비서인 봉선지는 모두 그날 밤 척본우와 접촉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왕요경도 전씨가족이 이 일에 대하여 물었을 때, 그도 그날 저녁에 척본우와 함께 영복당에 간 기억이 없다고 하였다.

필자가 확인한 결과를 그 자리에서 척본우에게 얘기했다. 그러나 척본우는 여전히 자신의 기억을 고집했다.

 

4. 5월 23일 오전, 영복당에 방문자가 있었다.

 

1966년 5월 23일, 동변은 전가영의 침실로 갔는데, 그는 침대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너의 상황은 주석도 모두 알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처가 위로하자, 전가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 듯이 보였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수십년동안 같이 살면서 전가영은 자신의 처를 잘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관념과 자강불식의 정신을 아주 존중했다. 비록 그녀도 혁명에 참가한이 여러 해가 된 노간부이지만, 장기간 종사한 것은 부녀공작이었다. 자신은 중앙핵심부서에서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을 접촉했고, 평상시에 동변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일부 깊이 있는 얘기를 처와 나눌 수가 없었다. 이러한 수난에 이러한 배경에 대하여 몇 마디 말로서 처에게 알아듣게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의 엄무성격은 그가 어떤 문제에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이해와 소통을 구할 수 없다는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특수한 상황하에서는 내심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내심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와 처연함은 얼굴에 드러나게 할 수도 없었다.

 

동변은 <중국부녀>잡지와 전국부련기관 두쪽에 모두 일이 있어서, 전가영이 직면한 문제를 그다지 복잡하고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동시에 남편의 심경이 전날 저녁보다 많이 평온해졌다고 여기고 급히 출근한다.

동변이 떠난 후, 전가영은 죽기 전의 그 오전을 어떻게 보냈을까?

섭영렬(葉永烈)은 <모택동의 비서들. 비서 전가영>에서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이 조용한 가운데,전가영은 '영복당' 소원(小院)안에서 혼자서 인생의 마짐ㄱ 오전을 보냈다." "조용하게, 전화소리도 울리지 않았고, 찾아온 사람도 없었다...그는 이미 중남해에서 축출된다는 명령을 받았다. 누가 그에게 전화를 걸 것인가? 누가 감히 그를 찾아롤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진실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전가영에게 전화를 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날 오전, 확실히 누군가 영복당의 전가영 숙소를 찾아왔다. 그는 바로 전가영이 연안에 있을 때 함께 일을 하고, 해방후에도 관계가 친밀했던 친구 하균(何均)이었다.

연안에서 중공중앙선전부에 있을 때, 하균은 전가영과 함께 일했다. 그리고 양가령의 같은 교동(窖洞)에서 생활했다. 함께 모안영이 중국의 상황과 당내상황에 익숙해지도록 도와준 바 있다. 전가영이 모택동의 정치비서를 맡고 있을 때, 하균은 주덕의 정치비서를 맡고 있었다. 해방후, 그들의 업무는 같은 대원락(大院落)내에서 이루어졌고, 수시로 교류하고 있었다.

 

5월 23일 오전 8시경, 하균은 출근하는 길에 영복당을 들른다. 전날 저녁 왕동흥이 전가영의 정직반성결정을 선포하였으므로, 그는 급히 전가영을 찾아가서 상황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균의 원래 뜻은 옛친구를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은 모두 산우욕래(山雨欲來)의 짙은 안개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이 풍파가 누구에게 미칠지 어느 정도로 미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이전에 그렇게 자주 만난 두 사람이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한 두마디를 교환할 뿐이어서, 더욱 처량한 분위기였다.

여러해 이후, 하균은 전가영이 당시에 한 한 마디 말을 기억해낼 뿐이었다: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士可殺而不可辱)". 내부사정을 아는 인사는 말한다. 하균은 이 말이 강청, 진백달의 가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바로 얼마전, 전가영은 하균과 함께 중남해의 동문을 나서, 고궁호성하를 따라 왕푸징 고서점으로 간다. 가는 길에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강청, 진백달이 날이 갈수록 기세를 올리는 것에 대하여 그들은 형세가 앞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감하고 마음 속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하균은 전가영의 집에 잠시 앉아 있은 후 몸을 일으켜 떠나려 했다. 그러나 전가영이 그에게 좀 더 앉아있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앉은 후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하균이 다시 떠나려 했으나, 전가영이 다시 만류한다. "이러기를 서너번 했다." 마지막에, 하균은 출근시간이 많이 지났고, 반드시 처리해야할 일도 있어서 작별을 고했다. 전가영은 하연을 영복당 밖으로 따라나왔고, 거의 그의 사무실에 도착할 때쯤 돌아갔다.

그날 오전에, 전가영의 비서 봉선지는 일이 있어 외출했고, 영복당에 있지 않았다. 영복당의 원내에는 전가영의 전직공무원(專職公務員) 진의국(陳義國)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을 끓여놓고, 방을 청소한 후에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방(耳房)으로 돌아가서 전가영이 일이 있어 부를 때만 나왔다.

 

평소의 영복당에는 손님이 오지 않으면 조용했다. 전가영의 몇 아이는 모두 학교에 갔다. 평소에는 영복당에 살지 않는다. 하균이 떠난 후, 전가영이 무엇을 했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만일 정말 총격설이 서술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날 오전의 영복당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업다. 자살이건, 오살이건 아니면 고의총살이건. 최소한 여기에서 총소리는 전혀 울리지 않았다.

 

5. 영복당내에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영복당은 중남해의 핵심부위에 위치해 있고, 몇십걸음 밖은 서루(西樓) 업무구역이다. 영복당의 서문은 서루 업무구역 동쪽입구의 높은 계단과 비스듬히 마주하고 있다. 이곳에 경비초소가 있다. 그리고 영복당과 이웃하여 멀지 않은 곳에 육정일, 호교목, 동필무등이 거주하는 집이 있다. 영복당내에 총소리가 났다면 반드시 이 곳들에도 들렸을 것이다.

하물며, 중남해는 총소리에 특별히 민감하다. 장제춘(張際春, 중앙선전부 부부장, 국무원 문교판공실주임을 역임하였으며, '문혁'때 박해받아 사망함)의 아이가 엽총으로 중남해에서 까마귀를 쏜 적이 있는데, 총소리가 한번 울리자, 즉시 여러 쪽의 경위가 모두 몰려온 바 있다. 그후 이것은 중남해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큰 사건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만일 1966년 5월 23일 오전에 영복당내에서 만일 진짜 총소리가 났다면, 전가영의 죽음은 즉시 비밀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날 오전에, 영복당내에서는 총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점심을 먹을 때, 공무원 진의국은 주방에서 요리를 해서 전가영을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전가영이 식사하러 오지 않았다. 전가영은 미리 외출한다는 말도 없었고,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바로 비서실 부주임 진병침(陳秉忱)의 사무실로 가서 '주임이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보고한다.

 

당시 비서실에서 행정을 주관하는 과장도 진병침의 사무실에 있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진의국에게 계속 찾아보라고 하고, 동시에 각자 전가영이 갈만한 곳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전가영의 행방이 불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약간 황당해졌다. 왜냐하면 전날 저녁 그들은 모두 왕동흥이 소집한 회의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전가영주임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쁜 상황으로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다시 한동안 시간이 흐르자 진의국이 와서 보고한다: 영복당 원내 모택동서재안에 사람이 있는 것같다. 그러나 서재 안이 너무 어두워서 낮에도 들어가려면 불을 켜야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진병침은 행정간사 한 사람을 데리고 진의국을 따라 서재로 간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그들이 열쇠를 부숴서 열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병풍뒤의 광경에 그들은 졸지에 놀라서 멍해진다....

 

6. 시신에 총상흔적은 없고, 현장에 핏자국도 없었다.

 

확실히, 전가영이 그곳에 목을 맨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현장에 도착한 사람은 누구도 감히 전가영을 풀어서 끌어내릴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즉시 왕동흥에 전화를 하여 상황을 보고한다. 왕동흥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영복당에 도착한다. 척본우의 회고에 따르면, 왕동흥은 이전에 인민대회당에서 정치국회의에 참석하고 있었고, 그가 증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왕동흥의 지시하에, 비서실이 사람은 전가영을 풀어내렸다. 전가영이 입은 것은 얇은 와이셔츠였다. 몸은 이미 굳어 있었다. 왕동흥은 전가영의 몸에 물건이 없는지 검사하도록 지시하고, 비서실 행정주관은 와이셔츠의 주머니에서 홍색연필로 쓴 유서를 발견한다. 글은 길지 않았다. 현재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부분은: "당이 문제를 분명히 할 것으로 믿고, 원침해저(寃沉海底)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이다.

 

이때, 영복당내에는 이미 7,8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전가영이 목을 맨 밧줄에서 끌어내려지는 과정을 목격한다. 만일 진상이 소위 "중공중앙조직부당안"에 기재된 것과 같다면, 그들이 목도한 것은 분명 다른 장면이었어야 한다. 총으로 자살했으면, 죽은 사람의 몸에 반드시 총상흔적이 있어야 한다. 현장에 혈흔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살은 한 발이면 치명상이고, 여러발을 쏘아서 자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살자는 총구를 어디로 향하겠는가?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어느 한 곳을 향한다. 그것은 가장 드러난 곳이다.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부위이다. 그러나, 전가영의 시신에서 총상흔적이 없을 뿐아니라, 현장에 핏자국도 없었다.

필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총으로 자살하는 것과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것은 정치적인 면에서나 윤리적인 면에서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총으로 자살한 장면을 목을 매어 자살한 장면으로 위장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만일 현장이 조작된 것이라면, 한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그것은 전가영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모살당한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특정환경하에서, 총소리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은 차치하고라도, 모살한 후 현장이 핏자국을 깨끗이 정리하고, 유체의 총상흔적을 잘 처리하고, 다시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위장하고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헛점이 드러나지 않으려면, 단지 한 두 동작이나 한 두사람의 행위로 단시간내에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비서실의 사람은 사방으로 전가영을 찾으러 다녔는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영복당의 모든 구석구석을 다 뒤져 보았다. 만일 핏자국을 정리하고 현장을 위장하는데 조금만 실수가 있었더라도 사람들에게 의심을 샀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모살을 연상하지 않았다.

 

7. 모살설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전가영이 자살한 일은 그 후에 주은래에게 보고된다. 전화는 영복당의 전화기로 걸었다. 주은래는 나중에 이 상황을 당시 아직 남방에 있던 모택동에게 보고한다.

왕력을 회고에 따르면, 그날 그는 인민대회당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개략 오후 2시경, 그는 전가영자살소식을 전해듣는다. 삼인소조의 구성원중 한 명으로서 그는 통지를 받은 후, 중남해로 가서 이 돌발사건의 처리에 참가한다. 안자문은 개락 왕력보다 늦게 통지를 받았고, 명을 받들어 이 돌발사건을 처리하는 책임을 진다.

 

전가영의 부인 동변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오후 3시경 통지를 받는다. 그녀는 당시 집으로 일찍 돌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의 전회기가 돌연 울렸다. 그녀가 전화를 드니, 건너편에서는 조직부부장 안자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에게 즉시 중남해 서루 회객청(會客廳)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서루 회객청은 유소기(劉少奇) 동지가 손님을 만나던 곳이다. 왜 나를 그곳으로 오라고 하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동변은 개략 전가영에 관련된 일이라고만 추측했고,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차는 벌써 중남해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루 회객청에 들어서자, 안자문, 왕동흥, 왕력등이 이미 실내에 있는 것이 보였다. 안자문은 조직을 대표하여 동변에게 직접 선언했다: "전가영은 외죄자살(畏罪自殺)했다." 이 믿기 어려운 소식은 하늘에서 천둥이 내려치는 것같았다. 동변은 만장심연으로 빠지는 듯했다.

 

관련책임자는 동변에게 반드시 시신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고, 계속해서 물었다: "전가영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한 것이 없는가?" "병원으로 가서 검시를 해야할까?" 동변은 이때 머리가 텅 빈 것같았고,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모든 것은 조직에서 결정하면, 나는 조직의 결정에 따르겠다."

서루 회객청에서 영복당 거소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서루 영업구역의 동문을 나서서 높은 계단을 내려가면 비스듬히 보이는 곳이 바로 영복당 서문이다. 그러나, 동변은 자신이 어떻게 걸어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외죄자살"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영복당내에 평소에 모택동의 도서를 놓아두는 서방(西房)의 안에, 전가영은 편평하게 누워있었다. 몸에는 여러해동안 써온 파란색 침대보가 덮여 있었다. 누군가 동변의 팔을 끌어 앞으로 향하게 해서, 그녀에게 자세히 보도록 하고, 자살사실을 인정하게 했다.

침대보를 들추자, 동변은 전가영의 딱딱하게 굳고 이미 푸르뎅뎅해진 얼굴이 보였다. 생기에 넘치던 그 얼굴에는 무한한 고통과 비분을 감추지 않고 그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실성통곡한다...

이에 전가영의 시신을 본 사람은 이미 10명이 넘어선다. 그들은 모두 전가영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만일 모살이라면, 확실히 현장에 오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전가영의 유체를 본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이 일을 책임지고 처리하는 사람은 동변에게 병원으로 데려가서 검시할 것인지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 동변에게 그의 시신을 자세히 보라고 끌어당길 이유도 없다..이런 처리방식의 세부상황을 보면 확실히 모살이라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필자는 지금도 분명히 기억한다. 그날 정오12시경, 학교에서 중남해로 돌아와서 점심식사를 할 때, 서대조의 후통을 돌아 영복당 서쪽의 통로앞을 마주했을 때, 나는 한 눈에 서복당 서문앞에 위병이 한 명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전에 그 길에는 보초를 서지 않았다. 당시에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인상이 매우 깊었다. 나중에 같이 식사를 하던 전가영의 비서 봉선지의 아이도 식당으로 왔다. 그는 조용히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가 사는 집에 위병이 지키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다고. 그는 다시 후분으로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후분도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고. 우리는 당시에 모두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누구도 전아저씨에게 일이 터졌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전가영의 자녀는 여러해후 필자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그들의 집은 그날 저녁에 중남해에서 이사나왔다. 1주일후, 중남해에 살던 중앙판공청의 비서실 간부가정은 모조리 중남해에서 이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