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왕홍문(王洪文)의 최후

중은우시 2013. 9. 14. 01:17

글: 현세보(現世報) 

 

 

 

1977년 7월 중순, 중공10기 3중전회가 베이징에서 거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등소평동지직무회복에 관한 결의>가 통과되어, 등소평(덩샤오핑)은 다시 중공중앙 부주석, 중공중앙 군위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의 "삼부일장(三副一長)"의 직무를 다시 맡게 되었다. 회의에는 또한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 반당집단에 관한 결의>도 통과되었다. 이 결의에서는 "자산계급야심가, 음모가, 반혁명양면파, 신생자산계급분자 왕홍문, 국민당 특무분자 장춘교, 반도 강청, 계급이기분자 요문원의 당적을 영원히 제명하고, '사인방'의 당내외 일체 직무를 취소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980년, 왕홍문의 동생들이 진성감옥으로 가서 왕홍문을 만나보도록 허가받은 바 있다.

왕홍문은 세명의 남동생과 한명의 여동생을 두었다. 왕홍무(王洪武), 왕홍쌍(王洪雙), 왕홍전(王洪全), 왕계란(王桂蘭)이 그들이다.

왕홍문의 동생들은 왕홍문이 잘나갈 때에도 보통생활을 보냈고, 큰형,큰오빠의 덕을 입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왕홍문이 쫓겨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보통생활을 보낼 수 있었고,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다.

왕홍무, 왕홍전은 장춘 고향의 농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왕홍무는 장춘 녹원구 서신향 개원촌에서, 왕홍전은 서신향 백가둔에 살았다. 왕계란은 길림시에 살았고, 가정주부였다.

왕홍쌍은 1958년 군에 들어가, 1962년 섬서성 무공현 비행기수리공장에서 일했다.

 

왕홍문의 동생들은 통지를 받고 북경으로 간다. 그들은 진성감옥에서 큰형/큰오빠 왕홍문을 만난다. 만난 시간은 모두 4시간이다. 오전에 2시간, 오후에 2시간.

이것은 여러해만에 형제자매가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왕홍문은 동생들에게 일을 잘 하고, 모친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한다.

 

1980년말, "사인방"은 마침내 역사의 심판대에 선다.

수억의 중국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티비의 모니터에 나오는 중화인민공확구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의 '사인방'재판실황을 시청했다.

왕홍문에 대한 재판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최고인민법원특별법정왕홍문재판개황표

 

일자

1980년 11월 20일    "사인방"에 대한 기소장 낭독

1980년 11월 24일    왕홍문 "장사고장(長沙告狀)"

1980년 12월 6일      왕홍문 진의(陳毅)모함

노영에게 지시하여 기자를 파견하여 당정군지도자간부를 모함할 자료를 수집하게 한 것,

'상시연사(上柴聯司)"무투사건을 기획 지휘한 것

1980년 12월 13일     왕홍문 제2무장조직; 상해무장반란책동

1980년 12월 20일     왕홍문 법정변론

1981년 1월 25일       "사인방"  법정선고

 

평상심으로 말하자면, "사인방"가운데, 죄를 인정하는 태도가 가장 좋은 것은 왕홍문이다; 장춘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삼각눈을 뜨고 침묵으로 대항했다; 요문원은 말 하나하나를 따지며 피중취경(避重就輕)했다, 그리고 기껏해야 '착오'를 범했다고 인정할 뿐, 범죄를 범했다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강청은 '중이 우산을 든 것처름 무법무천(無法無天)했다. 법정에서 크게 소란을 피우며, <나의 한가지 견해>를 써서 대항했다; 왕홍문은 하나를 물으면 하나를 대답하고, 둘을 물으면 둘을 대답하며, 자신의 죄행에 대하여 모두 인정했고, 일찌감치 '조반사령(造反司令)'으로서의 불가일세의 기세는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최고인민검찰원 특별검사정의 기소장에는 왕홍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소했다:

"피고인 왕홍문, 인민민주독재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반혁명집단을 조직, 지휘한 반혁명집단사건의 주범이다. 왕홍문은 적극적으로 강청의 최고권력탈취활동에 참여했다."

"1966년 12월 28일, 왕홍문은 상해 강평로무투사건을 참여하고 만들어, 91명을 때려서 상해입혔다. 1967년 8월 4일, 왕홍문은 상해시유기창포위공격의 무투를 조직 지휘하여 650명을 구금하고 상해입혔다."

"1976년 왕홍문은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함께 전국에서 새로운 동란은 만들었다. 왕홍문은 노영을 지시하여 일부 성으로 살마을 보내어 그들의 의도에 따라 새로 나와서 업무를 맡은 지도자간부를 모함하는 자료를 만들었다."

"왕홍문은 장춘교와 함께 상해를 기지로 하여, 그들이 직접 통제하는 '민병무장'을 건립했고, 여러번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에게 '민병무장'의 발전을 가속화하도록 지시하고 상해무장반란을 책동했다."

"피고인 왕홍문은 <중화인민공화국형법> 제98조의 반혁명집단조직,영도죄, 제92조의 정부전복음모죄, 제93조의 무장반란책동죄, 제101조의 반혁명상해죄, 138조의 무고죄를 범했다."

 

1980년 12월 20일 오전, 왕홍문은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 제1재판정에서 최후진술을 한다. 그는 자신의 죄행을 인정했다:

"나는 최고인민검찰원 특별검찰청의 기소장에서 나에 대하여 제기한 범죄사실, 그리고 대량의 증거는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법정조사과정에서, 나는 이미 사실대로 대답했다. 오늘 이 기회에 나는 법정에 입장을 밝히겠다. "문화대혁명"활동중, 나는 임표, 강청 반혁명집단의 반혁명활동에 참가했고, 이 집단의 주요구성원이 되었으며, 엄중한 죄행을 범했다. 여러해 동안의 반성과 진술을 거쳐, 특히 공안예심과 검찰원의 조사과정에서 나는 점차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을 인식하게 되었고, 나 개인이 이 집단 내에서 범한 죄행의 심각성도 깨닫게 되었다. 최고인민검찰원 특별검찰청이 기소장에서 대량의 사실, 확실한 증거, 충분한 설명을 보면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의 반혁명죄행은 극히 엄중하다. 우리 국가에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을 끼쳤다. 정말 죄가 많고, 죄가 크다. 나는 이 집단내의 중요구성원으로서 나의 범죄행위는 대량이며 엄중하다. 마찬가지로 당과 국가에 중대한 손실을 끼쳤다. 특히 나는 주은래총리, 진의 동지등 중앙의 일부지도자들을 모함하는 엄중한 죄행을 저질렀다. 군중을 진압한느 엄중한

죄행을 저질렀다. 방파무장을 조직하고. 민병무장반란을 선동하는등 엄중한 죄행을 저질렀다. 나는 여기서 전당, 전군과 전국인민에 죄를 인정한다. 나는 이미 느끼고 있다.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에 깊이 발을 담구었고, 죄행이 엄중하여 완전히 입장을 바꾸는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다만 나는 입장을 바꾸기로 결정했고, 자신을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충심으로 정부가 나에게 자신을 개조하여 새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희망한다.

 

1981년 1월 23일,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왕홍문에게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피고인 왕홍문을 무기징역에 처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한다."

왕홍문은 특별법정의 판결에 복종하겠다고 표시하고, 최후진술에서 자신의 태도를 나타낸다.

왕홍문이 왜 무기징역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국제신문계> 1996년 제5기에 오수권(伍修權)의 장편회고록 <회고와 회념>에서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임표,강청 반혁명집단의 주범의 양형과 판결의 내막, 그중에서도 왕홍문에 관련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980년, 중국정치생활의 대사건은 바로 임표, 강청반혁명집단 10명주범에 대한 공개재판이었다. 6월 중앙에는 팽진 동지가 주재하는 재판공작지도위원회(영도소조라고도 함)를 성립시킨다. 중앙의 재판업무에 대한 당내지도기구이다. 나는 이 영도소조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인방"과 임표반혁명집단을 재판하는 것은 당과 인민의 일치한 요구였다. 1980년 9월, 전국인대상임위원회는 특별결정을 통과시켜, 임표,강청반혁명집단사건을 재판하는 최고인민검찰원특별검사청과 최고인민검찰원특별법정을 성립한다고 선포한다.

어떻게 재판하고 형을 내릴 것인지의 문제에서,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가볍게 하자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중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중하지도 경하지도 않게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도처에서 모두 죽여야한다는 소리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압력이었다. 전체 재판관회의에서, 모두 강청, 장춘교등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백성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모두 사형판결을 준비했다. 그러나 여러번 생각해본 후에 역시 그래서는 안된다고 결정한다. 하나는 국내외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고, 다른 하나는 후대인들이 어떻게 볼 것인지를 생각했다. 의분정서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충분히 자신의 의견을 진술한 후, 금방 각 재판관의 지지를 받아낸다. 마지막으로 당중앙의 동의도 받았다. 강청, 장춘교를 사형에 처하지만 2년간 유예한다는 것이다. 다른 주범은 각각 무기징역 혹은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것이다. 왕홍문은 아직 젊었고, 그 자신도 일찌기 말한 바 있다. 10년이후 다시 보자고. 그에 대하여 경하게 판결하는 것은 작용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지위는 가장 높았고, 죄행과 영향도 강청과 장춘교에 바로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기징역으로 했다. 요문원은 원래 중하게 판결해야 했다. 나중에 그가 한 선전활동의 많은 것은 위에서 지시하여 그가 한 것이라는 것을 고려했다. 그를 중하게 처벌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20년유기징역으로 했다.

 

1981년 1월 25일 오전, 제1법정과 제2법정의 10명주범은 모조리 끌려나온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판결을 듣는다. 10명의 피고는 확실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를 빨리 알고 싶어했다. 강청은 비록 평소에는 기세등등했지만, 이 날을 조용했다. 내가 "피고인 강청을 사형에 처한다"고 읽을 때, 내가 "2년간 집행을 유예한다"는 말을 읽기도 전에, 그녀는 급히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강청에 대한 판결을 다 읽은 후, 법정경위가 그녀에게 수갑을 채운다. 이때 재판장에는 파격적으로 열렬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강청은 몸부림치면서 반동구호를 외치려 하였고, 머리는 흐트러졌다. 나는 강청이 소란을 피우려는 것을 보고 즉시 명령을 내렸다: "사형범 강청을 끌어내라!" 당시 나는 너무 흥분했다. 그래서 한 마디를 빼벅었다. 마땅히 그 앞에 먼저 강청이 법정규칙을 위반하였고, 법정질서를 파괴하여 법에 따라 그녀를 끌어낸다는 말을 해야 햇다. 모든 판결이 선고된 후, 강화 정장이 10명 죄인을 끌고가 형을 집행하라고 선포할 때, 전체 법정에는 승리를 기뻐하는 물결이 일었다.

 

이개월 칠일간 42차에 걸쳐 개정된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의 주범에 대한 공개재판은 이렇게 끝났다. 판결후의 국제여론을 보면 그때 제대로 판단하고 처리하였다.

"사형집행유예" 2년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당시 우리는 초보적으로 생각했다. 1983년 1월 25일, 두 사건의 주범에 대한 판결선고 2년후, 최고인민법원 형사재판정은 하나의 '재정'을 선포한다. "임표,강청반혁명집단의 주범 강청, 장춘교를 법에 따라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 원판결의 정치권리 종신박탈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들이 "사형집행유예'기간에 '항거하지 않고 악랄한 정상을 개조하였으므로"라고 설명했다. 기실 당연히 "개조를 받아들이는 실제행동은 없었다"고 해야겠지만, 그들을 감형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1981년, 왕홍문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모친 왕양씨가 뇌일혈로 장춘에서 사망한다.

"사인방"가운데, 왕홍문이 가장 젊었다. 그리고 신체가 가장 좋았다. 다만, 아마도 '사인방'중 그의 경력이 가장 짧고, 심리감내력이 가장 약해서인지, 그는 옥중에서 아주 고민하고 탄식을 했으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침중한 심리적 압력으로, 왕홍문은 병에 걸려 쓰러진다.

왕홍문의 동생 왕홍쌍에 따르면, 왕홍문은 1986년부터, 진성감옥을 떠나, 공안부 소속의 북경 부흥의원에 들어간다. 그는 장춘교와 같은 병동에 있었고, 의료조건도 괜찮았다.

 

1992년 8월 5일, <인민일보>는 왕홍문이 병사한 소식을 전한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신화사 북경 8월 4일전

임표,강청반혁명집단 주범 왕홍문이 간병(肝病)으로 1992년 8월 3일 북경에서 병사했다.

왕홍문은 58세로 1981년 1월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당했다.

왕홍문은 1986년 병을 앓은 후 병원으로 보내어져 치료받았다.

 

북경팔보산빈의관 화화공(火化工) 단월충에 따르면, 왕홍문이 죽은 후, 팔보산으로 보내어져 화장한다. 왕홍문을 배웅한 사람은 왕홍문의 처와 왕홍문의 형제였다. 단월총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형제는 그와 아주 닯았다."

이제, 왕홍문은 일생을 마쳤다.

이제 왕홍문의 처와 3명의 자녀는 상하이에서 보통공민으로 생활하고 있다. 왕홍문의 처인 최근제(崔根娣)는 왕홍문의 형제와 자주 연락한다. 그리고 여러번 상하이에서 동북고향으로 찾아가서 그들을 만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