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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리잔슈(栗戰書): '대내총관(大內總官)'의 30년 관료의 길

by 중은우시 2013. 4. 1.

글: 신당인

 

중공국가주석 시진핑이 취임한 후, 중공중앙판공청주임으로 임명되어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11번째 중남해 '대내총관'이 된 리잔슈는 자연히 매체의 촛점이 되었다. 소식에 따르면, 그는 일찌기 관료사회에서 아주 잘나갔다고 하지만, 그는 30년의 관료생활에서 주변으로 밀려나 힘든 적도 있었다.

 

1983년 하북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리잔슈는 정과장급에서 파격적으로 허베이성 우지(無極)현위대리서기, 서기로 발탁되면서 정계의 고속도로를 달리게 된다. 1985년, 리잔슈는 지급시(地級市) 시장에 상당하는 행서전원(行署專員)이 되고, 1년도 되지 않아 1986년 4월 공청단 허베이성위서기가 된다. 1990년 11월, 허베이성 청더(承德)지위 부서기, 청더지구 행서전원이 된다. 1993년 4월, 리잔슈의 정치역정은 다시 한번 돌파구를 맞이한다. 그는 부성장급인 허베이성위 상임위원, 성위 비서장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리잔슈는 성위 비서장의 위치에서 다른 사람에게 공격을 당해 아주 낭패하게 되고, 차관급의 직위에서 15년이나 배회한다. 보도에 따르면, 리잔슈는 비서장의 직에서 면직된 후, 허베이 고위정계에서 돌연 밀려나 버린다. 아무런 실권이 없는 상임위원이 되어, 그저 성위 농촌공작영도소조의 부조장이라는 명목상의 직위만을 보유한다. 리잔슈의 정치역정은 완행도로를 탄다. 이 일이 그에게 준 타격은 상당히 컸다.

 

1998년 7월, 리잔슈는 산시(陝西)로 옮겨간다. 직위는 여전히 성위 상임위원, 농촌공작영도소조 부조장이다. 이 기간동안 그는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재직연구생으로 있었다. 리잔슈가 허베이 정계를 떠난 지 3개월후, 청웨이까오(程維高)는 허베이성위 서기직을 면직당하고, 인대 상임위원회 주임의 직만 맡는다. 2003년에 이르러 그는 철저히 관계에서 물러난다.

 

2000년 12월, 리잔슈의 행정직무는 정상궤도에 접어든다. 그는 산시성 조직부장을 맡고, 그 후 시안시위서기, 성위부서기등의 요직을 맡는다. 2003년 12월 리잔슈는 헤이롱장성 부서기로 옮겨간다. 1년도 되지 않아, 리잔슈는 헤이롱장성위 부서기, 부성장이 된다. 2008년 8월에 이르러 장관급의 헤이롱장성 성장이 된다. 이에 그는 15년에 걸친 차관급의 역정을 끝낸 것이다.

 

헤이롱장성 성장부터 시작하여 리잔슈는 다시 관료사회의 고속도로를 탄다. 2010년 8월 중국공산당은 그를 꾸이저우성위 서기로 옮긴다. 2012년 7월, 리잔슈는 중앙판공청에서 부주임을 맡아 상무업무를 주재하고 후진타오의 '대내총관' 링지화(令計劃)이 각종 직무와 업무를 인수인계받기 시작한다. 9월에는 정식으로 중앙판공청 주임이 된다. 11월, 중공18대때 중공핵심인 정치국 위원에 오르고, 동시에 중앙서기처 서기가 된다.

 

리잔슈는 1983년 7월부터 1985년 10월까지 허베이성 우지현위대리서기, 서기를 맡았는데 그 기간동안 시진핑도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우지현과 30킬로미터 덜어진(개략 북경 북오환에서 남오환에 이르는 직선거리) 허베이 정딩(正定)현위 서기를 지냈다.

 

분석에 따르면, 시진핑이 2007년 정치국 상임위원에 승진한 후, 후계자가 되었을 때부터 그를 마음에 두었다고 한다. 리잔슈는 시진핑의 아주 중요한 인물중 하나이다. 2011년 5월 8일에서 11일까지, 시진핑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서기처 서기의 신분으로 꾸이저우를 시찰한다. 4일동안, 리잔슈는 모든 업무를 내려놓고, 모든 일정을 함께 한다. 이 기간동안 시진핑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공중앙판공청은 중공고위층의 '신경중추'였고, 민간의 속칭이 '대내총관'인 중앙판공청 주임직은 직접 중앙고위지도자를 위하여 일할 뿐아니라, 중공의 전체 당에서 위의 뜻을 아래에 전하는 역할을 하고, 중추핵심무서의 연락업무를 협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