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자지(李子遲)
2013년 10월 15일은 걸출한 프롤레타리아혁명가 겸 정치가이며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현임 최고지도자인 시진핑 동지의 부친 시중쉰 동지의 탄생100주년 기념일이다. 시중쉰(1913. 10. 15 - 2002. 5. 24)의 조적은 하남성 등주시이고, 섬서성 부평현 담촌진 중합촌에서 태어났다. 생전에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 중앙정치국 위원, 국무원 부총리, 전인대 부위원장등의 직책을 지냈다.
시중쉰은 두번 결혼했다. 전처 하오밍주(郝明珠)와는 1936년에 결혼했고, 1944년에 이혼한다. 장남 시정닝(習正寧), [장녀 시허핑(習和平)], [차녀 시첸핑(習乾平)]을 낳았다; 재혼한 처 치신(齊心)과의 사이에는 딸 [치챠오챠오(齊橋橋)], [치안안(齊安安)](모친의 성을 따름), 차남 시진핑, 막내 시웬핑(習遠平)이 있다. ([ ]부분은 의문이 남아있고, 최종확인되지 않았음)
시중쉰의 여러 자녀들 중 현임 중공중앙총서기, 중화인민공화국주석인 시진핑은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본문에서는 다른 잘 알려지지 않은 자녀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시중쉰의 장남인 시정닝은 시푸핑(習富平)이라고도 한다. 1941년에 태어났고, 일찌기 섬서성위 조직부 부부장 겸 청년간부처 처장, 해남성 정법위 서기 겸 사법청 청장을 지낸 바 있다. 1998년 11월 27일에 사망하니 향년 57세이다.
시정닝은 일찌기 북경101중학을 다녔고, 마오웬신(毛遠新)과 동창이며 그의 공청단입단 소개인이다. 1960년에 중국과기대학자동제어전공으로 합격하고, 졸업후에는 섬서성 호현 산골짜기의 한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일했다. 거기서 13년간을 일한다. 당의 11기 3중전회이후 막 회복된 해방군 후근학원에서는 급히 군내외에서 전문기술인원을 뽑았다. 시정닝의 여러 조건은 거기에 부합했고, 그는 선발되어 이전절차를 신속히 처리했다. 그러나, 새로운 곳으로 옮기기 전에 변고가 발생한다. 원래 시중쉰이 이 일을 알고 난 후, 아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학원으로 하여금 전근명령을 취소시키게 했기 때문이다. 시정닝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완전히 정상적인 인사이동이고, 부친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중쉰은 아들이 그로 인하여 졸업후 직장분배때 영향을 받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이번에도 섬서성위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아들에게 계속 원래 직장에서 일하도록 한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내가 막 업무에 회복하자마자 아들을 북경으로 불러들였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당의 군중내에서의 위신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1987년 해남도를 성으로 만드는 준비작업을 할 때, 시정닝은 명을 받아 해남으로 간다. 시정닝은 해남성에서 재직하는 기간동은 열심히 일을 했다. 그가 일을 한참 하고 있을 때 심장병이 발작하여 사망하게 된다. 이 돌연한 변고는 시씨집안의 모든 사람 특히 연로했던 시중쉰에게는 큰 타격이 될 것이다. 집안 사람들과 주변의 업무인원들은 그의 신체상황을 고려하여 이를 계속 감추게 된다. 오랫동안 시정닝이 오지 않고, 아무런 소식도 없자, 의문이 들었다. 그가 물어봐도, 집안사람들과 업무인원들은 모두 감추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후에 그는 다시 묻지 않았고, 아들에 대한 생각을 그저 가슴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시중쉰의 장녀 시허핑은 총명하고 예쁘며 염정문아(恬靜文雅)하여, 부친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문혁'때 박해를 받아 죽는다. 이는 시중쉰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시중쉰의 차녀 시첸핑은 1960-1965년 외교학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다. 그 후에 <국제상보>에 분배받아 일한다. 1983년, 왕광잉(王光英,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의 오빠, 전 전인대 부위원장)이 광다공사(光大公司, 현재의 중국광다집단)를 만들 때 그쪽으로 옮겨가고자 했다. 시중쉰이 이를 들은 후, 그 자리에서 왕광잉의 호의를 거절한다. 그는 말했다. "역시 그녀를 데려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너의 광대회사는 유명하고, 보는 눈이 많다. 다른 사람의 아이는 갈 수 있지만, 내 아이는 갈 수 없다!" 나중에 그는 이 일을 시첸핑에게 얘기한다. 시첸핑은 억울해하며 말했다: "나는 외국어를 배웠는데, 광다에 가면 내 장점을 살릴 수 있고, 조국의 개혁개방에 일을 할 수가 있는데 안좋을 게 뭐가 있느냐?" 시중쉰은 엄숙하게 말한다: "사람이 재능만 있다면 어디를 가도 역할을 해낼 수 있다. 그저 능력이 없을까봐 걱정할 뿐이다. 너는 시중쉰의 딸이다. '꼬리를 말고 살아야 한다(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 시첸핑은 계속하여 <국제상보>에 남아서 일했고, 나중에 여러번 출국한다. 당시 한번 출국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출국하면 저가로 가전제품을 구입해올 수 있었다. 시중쉰은 딸이 여러번 출국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녀에게 왜 여러번 나갔는지를 캐묻는다. 부녀는 이것때문에 식사자리에서 '전쟁'이 붙는다. 시첸핑은 부친에게 대들었다: "나는 기자이다. 나는 외국어를 배웠다. 출국하는 것은 업무상 필요때문이다." 시중쉰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젓가락을 집어던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디 그렇게 많은 업무상 필요가 있단 말이냐. 아무 일에나 업무상 필요라고 갖다 붙이지 말라." 시첸핑이 앞으로는 마음대로 나가지 않고, 착실하게 일하겠다고 말한 후에야 그는 화를 가라앉혔다.
이후 시첸핑은 계속 <국제상보>에서 일하며, 고급기자, 국제부 주임을 맡는다. 시첸핑의 남편인 마바오샨(馬寶善)은 1941년 산서성 태원시 고교시에서 태어났고, <법제일보> 부사장, <중국율사보> 상부부총편집, 중국행위법학회 상무부회장, 북경시법학회 이사를 맡았고, 현재는 베이징화샤이밍(華夏易明)서화원 원장, 화샤도시기자클럽 명예회장으로 있으며, 중국 "이다오서법(易道書法)"의 창시자이다다.
시중쉰의 막내아들 시웬핑은 1956년 11월생이다. 어려서 북경시81중학에서 공부한다. '문혁'때 모친 치신을 따라 하남으로 가서 중학교를 다닌다. 16세때 북경으로 돌아왔고, 한 기게공장에서 노동자로 지낸다. 1977년 해방군 낙양외국어학원에입학하고 졸업후, 군대, 대외무역 및 정부기관에서 일한다. 현재는 국제에너지절약환경보호협회 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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