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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무술

허세우(許世友)와 전균(錢鈞): 소림사(少林寺) 출신의 개국장군

by 중은우시 2012. 1. 21.

글: 유계흥(劉繼興)

 

1955년 중국인민해방군에서 계급을 부여할 때, 그중 2명은 '소림'출신의 개국장군이었다. 허세우 상장(上將)과 전균 중장(中將)이 바로 그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명의 장군이 한때는 같은 대군구(大軍區)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허세우가 남경군구 사령원을 맡고 있을 때, 전균이 남경군구의 부사령원을 맡은 적이 있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전균이 허세우보다 소림사에 3년 늦게 들어갔고, 두 사람은 소림사에서 5년은 함께 있다가, 같은 해에 소림사를 떠난다. 당시 절안에는 승려들이 운집해 있어, 두 '보살'은 같은 절 안에 있었지만, 서로 알지 못했다. 나중에 장정을 거쳐 연안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은 얘기를 하다가 둘이 원래는 소림사의 '형제'라는 것을 알고는 두 사람이 손뼉을 치면서 가가대소 했다고 한다.

 

허세우가 1845년 8월에 남긴 자전자료에 따르면, "나는 아홉살때부터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웠다. 주요한 원인은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먹을 곳을 찾아간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십팔반무기를 배웠고, 비첨주벽(飛檐走壁)도 배웠다. 나는 힘들게 쿵푸를 익혔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영웅호한이라고 불릴만하다고 생각했고, 장래 인간세상의 잘못된 일은 나서서 바로잡겠다고 생각했다."

 

허세우 장군은 1905년에 하남성 신현에서 출생했다. 그곳은 하남, 호북의 두 성이 만나는 대별산지역이다. 부모가 그들 형제 7명을 모두 기를 수가 없어서, 도망가는 길에 그를 소림사에 보내어 잡일을 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영상(永祥)"이라는 법명을 얻고 매일 권법을 수련하고 무술을 익혔다.

 

소림사에 있는 동안, 영상은 심후한 공력을 익혀, 팔힘이 남달랐다. 십팔반무기도 모두 정통했다. 절안에는 3미터 높이의 담이 있는데, 그는 몇 걸음에 뛰어올라가곤 했다. 그는 9칸짜리 천불대전도 손으로 처마를 잡고 한꺼번에 세바퀴씩 돌 수 있었다; 그가 담장을 뛰어다니고, 지붕과 처마를 넘나들어도 기왓장은 전혀 깨지 않았다. 뛰어내릴 때는 공중제비를 3바퀴 돌고는 가볍게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큰 벽돌도 한번에 부스러뜨렸다.

 

세월은 이렇게 흘렀다. 몇년이 지났다. 도탄에 빠진 인민을 구한다는 공산당이 허세우의 고향에 들어왔다. 하층민들을 모아서 지주와 호족에 대항했다. 허세우는 이 소식을 듣고,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했던 사부와 사형제들을 이별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허세우가 소림사를 떠날 때, 사부는 그에게 묻는다: "오늘부터 너는 정말 환속하려느냐?" 허세우가 대답한다. "소림사는 제자에게 목숨을 주었습니다. 제자는 이것을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후 나는 비록 불문제자가 아니지만, 석가(釋家, 불가)의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영상"에서 "석우(釋友)'가 된다. 나중에 아마도 '석우'의 '석'자가 너무 쓰기 어려워서인지, "사우(仕友)'로 바꾼다. 허세우(許世友)라는 이름은 모택동이 고쳐준 것이다. 모택동이 말하기를, "사우(仕友)는 너무 봉건색채가 있고, 너무 좁다. 세계의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름을 "세우"로 개명한다. (중국어로 석(釋), 사(仕), 세(世)의 발음은 모두 shi로 같다)

 

허세우의 소림사무공은 아주 뛰어났다. 전쟁시기에, 얼굴만한 두께의 소나무를 그가 손바닥으로 치면 껍질이 한움큼 떨어져 나갔다. 그는 말을 타고 달리다가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고 두 다리로 끼운 다음 고양이처럼 전마에서 뛰어내려 땅바닥에 내릴 수 있었다. 밤에 회의를 하다가 휴식을 할 때면, 동료들이 그에게 솜씨를 보여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숨으면 아무도 찾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회의실로 돌아왔을 때, 밝은 등불아래, 회의실의 사방을 뒤져보아도 허세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회의실 탁자 아래에서 낄낄 거리며 웃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탁자의 아래를 보았는데, 탁자의 아래쪽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해인가, 소련의 군사대표단이 남경으로 왔다. 한 소련장교가 돌로 만든 북을 들어올렸고, 다른 동료들이 그를 "대력사(大力士)"라고 치켜세웠다. 허세우는 동료들이 요청에 웃통을 벗고, 두 손으로 돌사자를 들어서 세 바퀴를 돈다. 그리하여 우레같은 박수를 받는다. 그후 그는 돌사자를 원래의 자리에 천천히 내려놓는다. 소련의 대력사도 돌사자를 들어올리려고 시도했지만, 돌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세우는 곤술(棍術), 도술, 권술과 씨름에 모두 정통했다. 그가 전수한 도술은 속도가 빠르고 변화가 많았다. 그리하여, 국민당부대가 칼을 쓸 때의 진퇴리듬과 공방초수를 완전히 돌파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부대는 육박전에서 우세를 점했다. 한번은 총탄을 다 써버렸는데, 그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4시간동안 칼을 들고 적군을 공격하여 결국 적군을  쫓아보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허세우는 용맹했고, 두려움이라곤 없었다. 그는 항상 병사들보다 앞장섰다. 그는 자주 말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등불을 불어서 끄는 것과 같다. 머리를 자르는 것은 그저 밥그릇크기의 상처가 나는 것이다." 허세우는 7번 결사대에 참전하였고, 그중 5번은 결사대장을 맡았다. 그는 7번 부상을 입었고, 그는 매번 자신의 손가락으로 총탄을 뽑아냈다. 그리고 호박을 상처에 바르고는 끝냈다(당시에 의약이 부족했다)

 

전균 장군은 하남성 광산현 전가만의 빈농집안에서 태어났다. 6세가 되던 해, 그는 지주집으로 보내어져, 소를 기르게 된다. 그는 소를 기르며 2년을 보낸다. 그러다가 주인집의 욕설과 구타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는 다시 지나가던 칠기장(漆器匠)을 따라 길거리로 나선다. 칠기장은 성격이 불같아서, 일하는게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과 발로 때렸다. 11세가 되던 해, 힘든 생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전균은 소림사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전균 장군이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소림사에 들어간 다음 날, 당직스님이 그에게 불을 피우라고 했다. 그런데, 아궁이 앞에 가니, 나무가 있는데, 두께가 밥그릇정도였다. 전균은 '도끼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당직스님은 손을 들어보이며 "이게 바로 도끼이다"라고 한다. 전균은 놀라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곧이어 당직스님은 손으로 나무를 내리쳤다. 한번 칠때마다 갈라져서 마치 면을 반죽하든했고, 마치 솜을 자르는 것같았다. 순식간에 나무는 조각조각이 났다. 이때부터 전균은 쿵푸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균이 소림사에서 5년간 생활하며, 뛰어난 무공을 익힌다. 그는 특히 "철장(鐵掌)"으로 유명했다. 그의 "주사장(朱砂掌)"이 발동되면, 맟 강철로 만든 날카로운 도끼같았다고 한다. 커다란 암석도 일장에 즉시 부숴져 버린다. 벽돌을 깨는 것은 마치 두부를 으스러뜨리는 것같았다.

 

1천여년동안, 소림사 방장당(方丈堂)의 앞에 있는 동료방(東寮房)의 문앞에는 높이 200킬로그램짜리 향운배(響雲排)가 걸려 있다. 미번 온 절의 승려들이 모여서 불사를 하거나 말을 전할 때면, 집사승려는 향운배(響雲排)를 쳐서 통지한다. 전균은 일찌기 이 향운배를 이용하여 팔힘을 길렀다고 한다. 떼어내는데 소리 하나 나지 않게 하는 것을 기준으로 연습했다고 한다. 수년간 매일 이렇게 수련하니, 나중에 전균은 한 손으로 떼어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에는 거친 숨소리도 내지 않고 평소와 똑같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운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높이 걸려있고, 매일 구름위에까지 울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1927년 전균은 동필무의 소개로 설산초지에서 입당선서를 한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그는 당이 이끄는 혁명군대에 참가한다. 이때부터, 호북, 하남, 안휘의 숭산준령에서, 그리고 설산초지에서, 힘들게 전투를 하면서 보냈다. 그의 일신무공은 그를 강철탑과도 같은 강건한 몸을 만들어주었고, 그는 전쟁중에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일반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어려움에 닥치더라도, 그는 이를 해결하고 승리를 거두곤 했다. 그래서 군내에서 '상승장군'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전균은 소림사에서 무공을 익혔지만, 군내외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소수의 고위장군들을 제외하고는 그가 무술에 뛰어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적었다. 이렇게 된 것은 만일 너무 드러내게 되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모두 찾아와서 비무를 해보자가 할까봐서이다. 그렇게 되면 동지들이 다칠 수 있었다. 그는 자주 말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은 무술을 할 줄 모르는 사람과는 다르다. 어떤 때는 손을 쓸 때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의도가 전혀 없는데도 결과는 생각과 다르게 나올 수 있다. 과거에, 어떤 때는 전투의 필요때문에 나는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무공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동지들간에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겨뤄보자고 하더라도 나는 그저 겸양하며 피하곤 했다." 당연히 어떤 때는 솜씨를 드러내보이기도 했다. "무한의 번사공장에서 일할 때, 하루종일 힘든 일을 한 노동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일이 끝난 후, 그는 운기하여 경공(硬功)을 보여준다. 그는 세 명의 사내들을 자신의 배 위에 서로 끌어안고 서게 했다. 그 후에 그가 기합을 발하자, 세 사내는 모조리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건국이후, 전균은 가끔 '주사장'을 보여주곤 했다. 그가 남경군구 부사령원으로 있을 때, 한번은 그가 강소성북부로 민병업무를 시찰하러 갔다. 저녁에 휴식을 취하는데, 간부들이 모두 그에게 '돌맹이격파'의 실력을 보여달라고 청한다. 강소북부는 평지여서 적당한 돌맹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 절인채소를 눌러두는 청석을 찻았다. 이 청석은 약 10킬로그램정도 되었다. 매끈하고, 물기도 묻어 있었다. 그 돌맹이를 가운데 있는 탁자에 놓았다. 전균 부사령원이 과연 이걸 격파할 수 있을까? 맨손으로 돌맹이를 격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몰래 귓말로 하고 있는데, 전균이 탁자 앞으로 간다. 돌맹이를 바로 놓은 후, 오른 손을 들어서 내리친다. 펑하는 소리가 나더니 청석은 세동강이 난다. 부서진 자잘한 돌조각은 1장이나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전균의 쿵푸실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다: 상해연안반전에서 회의에 참가한 남경군구의 부사령원 3명 장재천, 왕필성, 도용이 아침산보를 마친 후, 함께 앉아서,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었다. 돌연, '아이쿠'라는 소리가 났다. 도용 부사령원은 자신의 몸이 돌연 큰 손 하나가 엉덩이를 붙잡아 들어올려진 것을 느꼈다. 곁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나머지 두 부사령원이 놀라서 쳐다보니 도용 부사령원이 보이지 않았다. 급히 머리를 들어서 정신을 차려보니, 원래 그들에게 몰래 다가와서 도용을 한 손으로 들어올린 '대역사'는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철장장군'이자, 나이 칠십된 절강성군구사령원 전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