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옛날 북경 중의(中醫)의 4가지 유형

중은우시 2013. 5. 18. 21:02

글: 장위동(張衛東) 

 

명청이래, 북경과 주변에서 의료를 행하는 자들은 대체로 4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일을 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호간에 경쟁자로 여기거나 상호간에 생존을 위하여 투쟁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의료서비스를 하는 대상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숨은규칙은 행의방식(行醫方式)이 서로 다른데서도 나타난다.

 

유의(儒醫)

 

구시대 중국은 농업사회이다. 의료를 행하는 사람은 혹은 집안대대로 불려오거나 혹은 스승이 제자를 데리고 가르치는 전승방식이었다. 북경은 수도였으므로, 문화적인 기반이 탄탄했다. 그래서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유의"이다.

 

소위 "유의"는 수대(秀才)의사이다. 그들은 고대의학경전저작을 교재로 하여, 보수를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근사(近師)'에게 문경(門径)을 얻고, 다시 '원사(遠師)'에게 '연구이론을 얻었다.

 

'근사'는 의학계의 선배들에게 배우는 것을 말한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계속 임상진료를 하는 것이며, 병리를 분석하고, 이전의 사람들이 관습법으로 전수해준 경전적인 치료를 공식으로 참고하고, 약방문을 내서 치료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선생이 '근사'이다. 이 선생은 비교적 높은 문화적인 소양과 의학경험을 지니고 있고, 심지어 어떤 질병에 대한 의학유파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제자들은 유파를 쫓아 학습한다. 그 기초위에서 다시 연구발전시키는 것이다.

 

"원사"는 어느 정도의 임상능력이 갖추어진 후, 계속하여 고인들이 남긴 의학경전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이론을 임상질병에 응용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고인의 의학이론의 임상진단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좋은 치료효과를 얻는다. 이런 경전의학이론저작을 '원사'라고 하다. 어떤 저작을 연구하고 고인과 대화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은 자주 의서에 비주를 달고 임상진료경험을 가지고 계속하여 심득을 써나간다.

 

옛날, 북경이 유생에는 두 종류의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내정 태의원(太醫院)의 의생들과 이 경로를 통하여 문경을 전수받은 의료종사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집안에서 의원을 열고 약방문을 내줄 뿐 약을 만들어주지는 않는(開方不配藥)의 수재의원이다. 이 유생의 집단은 상호간에 자주 모임을 가지고, 유행하는 질병이나 접촉하는 환자의 상황을 논의하곤 했다. 혹은 어느 의원이 질병에서 물제가 생기면 같이 해결하곤 했다. 이런 유의들이 경성에서 주류를 이루는 상황은 청나라말기까지 유지되었다.

 

한일재(韓一齋)선생은 광서연간 태의원 원판(院判) 이자여(李子餘)의 제자이다. 태의원에서 은량(恩糧)으로 있었다. 민국초기, 부우가(府右街) 석판가후통의 집에서 의원을 연다. 그는 이론을 중시했다.

 

풍제경(馮濟卿) 선생은 일찌기 태의원 이목(吏目)으로 있었다. 민국초기, 숭문문밖의 동하조 2호의 집에서 의원을 열었다. 그는 대량의 의학저작을 편찬했는데, 그중에는 <의론의언>, <난경천설>, <임증소의>, 및 문인들이 정리한 <풍제경의론집수>등이 있는데 근대유의이론의 작품들이다.

 

관월파(關月波) 선생은 태의원 출신의 유의들과는 달랐다. 그가 개설한 의원의 이름은 "낙도당(樂道堂)"이다. 일찌기 그는 사숙을 열어 사서를 가르쳤고, 고전의학서적을 '원사'로 삼아서 스스로 공부하여 임상의료를 진행한 경험이 40년을 넘었다.  그는 이론을 중시하는 동시에 임상연구를 진행했다. 간경변복수, 천화, 마진, 성홍열등 당시 전염병에 장기가 있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근대의학명가 관유파(關幼波) 선생이다.

 

청말민초에 경성의 유의들은 이들 대표인물들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매몰되었다. 서방교회의원이 북경에 들어온 후, 북경에 있던 사회명류 및 관리상인등은 서의를 믿고, 북경의 유의는 날이갈수록 지위가 열악해졌다. 그리고 민국초기에는 일반약포의 "당의(堂醫)"들과 함께 직접 약품을 판매함으로써 갈등이 생긴다 이렇게 하여 점차 강호의 분위기를 지닌 의생으로 변한다.

 

당의(堂醫)

 

북경의 약업(藥業)은 계속하여 자신들의 업종에 종사했다. 모든 약포(藥鋪)는 자신들의 경영방식이 있었다. 그들은 약재를 판매하면서 도매도 했다. 일반적으로 서학년당(西鶴年堂), 동인당(同仁堂)등 대형약포에는 인삼녹용전문매대를 두었고, 인삼, 녹용, 우황, 사향, 구보, 호골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약포도 있었다. 이런 약포는 모두 "삼국자(蔘局子)"라고 불렀다. 그들은 약재창고를 중시했다. 사향, 우황등은 땅 속에 보관했다.

 

저명한 중국화화가인 오경정(吳鏡汀), 오광우(吳光宇)의 조상은 바로 인삼녹용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던 약포를 운영했다. 당시 동융선, 석비후통일대에서는 모두 알고 있는 오가삼국자(吳家蔘局子)이다. 이처럼 귀한 약재를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약국은 일반적으로 간판을 내걸지 않고, 모두 가정을 중심으로 영업했다. 외관상 보기에는 그냥 주택일 뿐이다.

 

탕제음편(湯劑飮片)은 "생약(生藥)"이라고 부른다. 포제(炮制)한 후에는 "숙약(熟藥)"이라고 부른다. 환(丸), 산(散), 고(膏), 단(丹)등은 "성약(成藥)"이라고 부른다. 이런 류의 약방의 성분비율 및 제작공법은 모두 약방에서 가지고 있다. 일반 의원들은 대부분 잘 모른다. 약포의 점원은 모두 경성공상업의 학도전수방식으로 그들은 약방에 따라 약을 만들 뿐이다. 일반적으로 병을 진단하는 것은 배우지 않는다. 환,산,고,단등을 만드는 기술은 약국의 최고급 업무이다. 이들 약방점원은 모두 점포에서 청소부터 시작하여 약재가 든 서랍을 여닫는 조수를 거쳐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이다.

 

옛날에 약은 팔아도 병을 진단하지는 않는다(賣藥不診病)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경성의 약포장궤와 주인은 중약의 매매만 했고, 환자의 질병을 봐주지는 않았다. 각 업종에는 모두 자신의 규칙이 있다. 피차간에 매매장사를 보호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첫째, 약국은 환자들이 일부러 진귀한 약재를 팔아서 폭리를 취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아도 되고, 둘째, 환자와 약국간에 불필요한 오해와 골치거리를 만들지 않을 수 있었으며, 셋째, 약을 조제할 때, 감독이 가능해서 잘못만드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일찌기, 약국에서 약을 마들 때 약을 각각 싸서(包) 나누었다. 종이에는 약효와 주치료공능을 표시한다. 일반적으로 약포를 개설하려면 반드시 좌당응진(坐堂應診)의 의원이 있다. 이처럼 약포에서 진료를 하는 의사가 두번째 유형의 의사이다. "당의"

 

명청시기에, 북경의 당의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명의(名醫)가 돌아가면서 당에 나가 진료를 해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한 곳의 약포에 있는 보통의원이다. 이런 당의는 경성의약계의 중견역량이다.그들은 견식이 넓을 뿐아니라, 각과목의 잡다한 증세에 능했고, 삼교구류 각계층의 환자들을 다룰 줄 알았다. 임상분야에도 폭넓은 경혐이 있다. 그러나 당의의 문화수준은 차이가 컸다. 심지어 어떤 의원은 일반적은 상용글자도 모른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은 학도출신의 의원도 있다.

 

"유의"와 "당의"를 비교하면, 유의는 이론과 사상을 중시하고, 당의는 임상과 치료효과를 중시한다. 옛날, 그들은 상호간에 왕래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청나라말기이래로 서의가 북경에 들어오자, 적지 않은 '유의'가 '당의'에 종사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하여 북경의 '당의'는 오히려 전성기를 맞이한다. '당의'에 진료과정에서 이론을 중시하는 풍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향의(鄕醫)

 

명청아래 경성에서 의료에 종사하는 자들은 대부분 가전방식으로 의료에 종사했다. 이런 가정은 대대로 의원을 지냈다. 그리고 약포에 가서 약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대부분 스스로 각종 약제를 만들었다. 일반적인 두통, 해열같은 계절적인 증세를 치료했다. 이런 류의 의원을 세번째 유형 즉 '향의"라고 한다.

 

"향의"의 의미는 북경에서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대대로 어느 지역에 거주하면서 의료에 종사하는 가정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사부로부터 배우는 기간이 끝는 후 자신의 집에서 의원을 열고 의료에 종사하는 의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의와 구분되는 것은 약방문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병자의 증상에 따라 치료를 한다. 많은 경우 자신이 만든 약품 혹은 자신이 혼합한 각종 음편,탕제를 주는 것이다. 대대로 의료에 종사했으므로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는 비방이나 치료수단이 있었다.침구, 발관자외에 소아식적, 내적등을 치료하기도 했다. 중풍, 반신불수등 질병에 대하여도 가전의 경험으로 침구치료를 하여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었다.

 

청나라말기, 사회경제는 극도로 결핍되고, 서방의 선진적인 과학기술이 북경으로 전래되어 들어오자, 많은 상류계층은 중의에게 가서 진료를 받지 않으려 한다. 이때의 유의는 생활이 곤궁하여 부득이 당의로 전업한다. "향의"는 내과, 외과, 잡과, 가정병상등 새로운 질병치료방법으로 가전의 비방을 결합하고, 유의,당의의 경험이론까지 흡수하고, 혹은 서방교회의원의 경영방식을 본받기도 한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이름의 진료소를 연다. 그러나 이때의 "향의"는 이미 엄격한 의미에서의 향의는 아니었다.

 

민국연간, 경성에서 마지막 남은 향의는 회교 민중들 사이에서 전해진다.그중 가장 뛰어난 분야는 외과뿐이다. 그러나 치료효과는 당시 어떠한 의술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선무문외 향로영 유운봉(劉雲峰)과 유소봉(劉小峰) 부자의 의원은 각종 농창을 치료하는데 뛰어났다. 상소운(尙小雲)이 만든 영춘사경극과반의 교의(校醫)도 맡았다. 그들 유씨집안은 이미 근 백년동안 대대로 의료에 종사해왔다. 그 후손들은 모두 듣고 본 것이 있어서 약방을 낼 수 있었고, 의학문화수준도 계속 올라가서 점차 당의로 넘어갔다.

 

정덕은(丁德恩)은 원래 이름이 경삼(慶三)이다. 의덕이 고상하여 사람들이 그를 "정삼팔(丁三巴兒)"이라고 불렀다. "팔(巴兒)"이라는 것은 북경에서 회민에 대한 존칭이다. 즉 "어르신"이라는 뜻이다. 그는 숭문문밖의 양시구에 "덕선의실"을 열었고, 각종 외과 및 피부과 질병을 치료했다. 스스로 만든 백강단(白降丹), 홍승단(紅昇丹)등의 성약도 치료효과가 현저했다. 서의의 소염제와 맞먹을만했다. 가격은 합리적이었고, 부근민중에게는 무료로 진료를 해주었다. 그의 진료소에는 작은 목루(木樓)가 있었다. 그리하여 "외과소루정(外科小樓丁)"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장삼팔은 비록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외과정종>을 외울 수 있었고, 여러해동인 질병치료경험을 정리하여 <덕선의실양과효광>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자주 약을 나눠주고 무료진료를 했다. 당시 향의의 외과수술은 아직 원시수준이어서, 진료소는 항상 돈을 내서 환자들에게 밥을 먼저 먹인 후 수술을 했다. 가끔 환자의 종기를 뽑아내는게 순조롭지 않으면, 이 정삼팔은 깨끗한 물로 입을 헹군 후 종기를 빨아서 빼내곤 했다. 이런 원시적인 치료방법은 환자들이 그를 구성(救星)으로 여기게 만든다. 정덕은 선생의 제자중 근대의학사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합예천(哈銳川), 조병남(趙炳南)등은 모두 중의 피부과와 외과의 대가이다.

 

옛날 북경근처 및 관상(關廂), 촌진(村鎭)에는 모두 많거나 적거나 향의들이 분포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며 몇 대에 걸쳐 의료에 종사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현지민중의 진료를 책임졌다. 의료종사자들의 문화수준이 높지 않고 대다수는 경험으로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역대이래로 유의, 당의들의 존중을 받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많은 다른 유형의 의원들은 이 유형으로 들어와서 의학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영의(鈴醫)

 

경성의 의원중 또 하나의 유형이 있다. 그들은 왼손에 작은 약상자를 들고, 오른 손에는 둥근 모양의 찬령(串鈴, 방울)을 든 강호낭중(江湖郎中)이다. 이것이 바로 네번째 유형인 "영의"이다.

 

소위 "영의"라 함은 그들이 오른 손에 들고 있는 '환형찬령"을 마리킨다. 이 찬령은 태상노군의 손에 쥐어져 있는 환자(環子)와 비슷하다. 다만 중간에 몇 개의 철단자(鐵蛋子)를 더하여 오른 손으로 머리 위에높이 들고 왼쪽으로 돌리면, 방울에서 '디링, 디링'하는 독특한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다른 어떤 장삿꾼들이 내는 소리와도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번 들으면 낭중(의원)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낭중이 손에 든 환형찬령은 보통이 아니다. 이것은 당나라의 약왕 손사막이 전해준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손사막은 장안을 나와 입산수련하러 가는 길에 호랑이가 잎을 벌린채 무릎을 꿇고 손사막에게 치료를 부탁했다고 한다. 원래 호랑이의 입안에는 뼈조각이 걸려 있었다. 손사막은 즉시 약보따리에서 동환(銅環)을 끄집어내어 호랑이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고정시키고, 손을 호랑이 입에 넣어 그 뼈조각을 끄집어냈다. 호랑이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손사막을 따라 입산한다. 후인들은 손사막이 호랑이를 치료한 것을 기념하여, 쇠 또는 구리로 만든 환형찬령을 만들었고,이름을 "호함(虎銜)"이라고 붙였다. 민간의 말로는 "호탱자(虎撑子)"이다.

 

이런 류의 영의는 민국시기 경성에서 소실된다. 그러나 외성주변 혹은 교외 향진에서는 가끔 나타나곤 했다. 그들은 떠돌이식의 행의방식을 취하였다. 원래 자신의 장사술을 가지고 있어, 다른 유형의 의원들과 장사로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른 유형의 의원들이 병이 들면 이런 영의들에게 치료를 받았다. 이것이 소위 "의불자의(醫不自醫)" 즉 의사가 자기 병은 못고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성의 의료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업방식은 상호간에 제약하면서 상호간에 협조하는 순환구조가 생겨났다.

 

영의는 통상적으로 문화수준이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병을 진료한 경험은 아주 풍부했다. 급증, 외고, 정골등 분야에서 신속한 효과를 나타냈다. 이것은 장기간 머물면서 약을 쓰며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하여 이들 영의는 병을 진료하는데 즉시 효과를 발휘하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또 다른 영의로는 수의(獸醫)가 있다. 당나귀, 말, 노새, 소, 낙타, 양, 돼지, 개 및 닭, 오리, 거위등을 모두 치료했다. 그리고 동물에 물린 상처 및 홍상(紅傷, 刀傷)을 잘 치료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약상자는 백보상과 같았다. 어떤 병을 만나더라도 이 작은 약상자로 모두 처리가 가능했다.

 

유의명가인 섭천사(葉天士)는 한 때 구승(狗蠅, 개에 기생하는 이)이 코를 뚫고 들어가는 병때문에 조급했다. 각종 의학서적을 뒤져보았지만 치료방법이 없었다. 집게로 끄집어내려고 했지만 아예 효과가 없었다. 그 구승은 죽어라 콧구멍 속으로 파고들었다. 명의 섭천사가 초조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영의가 찬령을 울리며 지나갔다. 섭선생은 사람을 시켜 그 영의를 부른다. 그리고 이런 급증에는 어떻게 대응하면 좋은지 물어본다. 그 말을 듣고 영의는 웃으며 말한다: "뜨거운 개털을 콧구멍에 넣으십시오. 구승은 따뜻한 개털의 냄새를 맡으면 바로 바깥으로 기어나와서 개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개털을 끄집어내면 됩니다." 이 치료방법은 과연 효과가 좋았다. 섭선생은 백배 감사하며 많은 돈을 그 영의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영의는 떠날 때 이렇게 말한다: "견식은 깊고 얕음이 있고, 각 업계는 고저가 있다. 돈과 재물은 분토와 같으니, 인정이 제일이다." 그리고 그후 동종업계끼리 병을 치료해준 것에는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북경에서 의원간에는 서로 치료해주고돈을 받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해방초기의 공사합영전까지 지속되었다.

 

이상의 4가지 의원은 공동의 조사(祖師)를 모신다. 즉 닫태종이 칙봉한 약왕 손사막(孫思邈)이다. 유생의 조사는 편작(扁雀), 장중경(張仲景)이고, 당의는 앞의 몇 사람이외에 동한의 명장 배동(裴彤)을 모신다. 향의는 일반적으로 화타(華佗)를 많이 모셨다. 이슬람교신도는 우상을 모실 수 없다. 경건한 교도들은 코란을 들었다. 손사막은 영의의 적계 조사이고, 화타도 그들이 반드시 제사지내야 하는 조사였다.

 

"유의"는 약을 쓸 때, 약방문만 내지 약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진료습관이다. 그들은 큰 증세가 없으면 양생을 위주로했다. '조원기, 양태화(調元氣, 養太和)"하는 것이 유의가 추구하는 경지였다. "당의"는 사도간에 서로 전해졌다. 장기간 남녀의 각종 잡병을 치료하는 것이 장기였다. 약을 쓰는데 경험이 풍부했고, 침구등 기법도 능했다. 임상분야에서 당의는 경험이 풍부하고, 환, 산, 고, 단등 성약에도 많은 성취를 이룬다. 경험으로 약을 쓰고 진료하므로 기본적으로 안정되었다. 그래서, 병을 볼 뿐 이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그들의 진료습관이었다. "향의"는 청나라이래 외과가 많았고 일부 역병도 치료했다.의원가문 혹은 도제식 수업방식을 취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약을 만들고 치료효과를 내는 것을 중시했다. 문화수준으로 보면 어느 한 과목에서 경험을 전수한다. "일초선, 흘편천(一招鮮, 吃遍天)"이 그들의 행의습관이었다. "영의"는 생활이 빈곤하고 치료하는 병세는 급증이 많았다. 이런 의원들은 생활이 힘들었다. 비록 여러 질병을 치료한 경험은 있지만, 일단 조금만 잘못하면 책임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이들 의원들은 말재주가 뛰어나다. 소위 "선생의 손(재주)은 배울 수가 있지만, 선생의 입(말재주)은 배울 수가 없다" 병을 치료할 때 자주 궁불랍만(弓不拉滿), 화불대언(話不大言)한다. 효과를 보면 그기서 멈추고 돈을 받아 떠난다. 나중에는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고, 치료되는 병도 없다는 결과가 나온다. 결론적으로, "영의"의 최종결말은 짝퉁약을 파는 것이다. 가짜약을 파는 강호유의들은 바로 '영의'의 사업방법을 전승받은 것이다. 이들은 민중을 해치는 자들로 되었다.

 

옛날의 이 몇 가지 유형의 의원간에는 서로 선순환관계가 있었다. "유의"의 환자는 귀족계급이다. "당의"의 환자는 사회일반민중이다. "향의"의 환자는 대부분 인근주민이나 전문과목의 병때문에 찾는 것이다. "영의"는 진료를 받을 수 없거나 진료받지 못한 하층민중의 시급한 병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유의"는 약을 짓지 못하고, "당의"는 칼을 쓰지 못하며, "향의"는 목숨을 구하지 못하고, "영의"는 돈을 받으면 바로 도망친다. 이것은 비록 당시 사회의 이 네 가지 의원에 대한 개괄이지만,그들이 사회에서 서로 보완작용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노신은 이렇게 말한다. "중의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사기꾼이다."

 

"유의", "당의", "향의"와 "영의"는 청나라이래 경성의 준의료종사자이다. 기타의 수생(收生), 정골(正骨), 방혈(放血), 발관(拔罐), 수각(修脚), 발아(拔牙), 간향(看香), 도신(跳神)등은 당시의 의학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그때 약업에 종사하는 정규 약포이외의 나머지는 모두 "야약(野藥)"으로 취급했다. 약포에서 팔지 않는 성약, 예를 들어, 고약, 환산등은 '몽사행(蒙事行)"으로 간주되었다. 기실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정식의원 및 약방이 환자가 가야하는 곳이고, 시장이나 다단계방식으로 구매한 약품은 대부분 문제가 있다. 이런 것들은 "야약"이라고 불러야 한다.

 

민국이래, 서의는 교회병원에 속했다. 소위 유학후 귀국한 의학박사의 진료소가 계속 나타난다. 그리고 일부 중서의를 결합한 진료소 혹은 중의서치(中醫西治)의 진료실도 나타난다. 북경의학계는 중의의원을 평가할 아무런 기준도 없었다. 이때의 민국정부는 중의를 폐지하는 문건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당의가 발기하고 약행의 각계가 유의 명류들과 연합하여 남경정부에 처원한다. 중의가 존재할 필요성과 표준을 만들어 진료소를 개설하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