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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중화문명(II): 역사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3. 8. 5.

글: 이중천(易中天) 

 

문명은 야만에서 왔다.

야만시대의 인류는 세계각지에 분산되어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죽었다. 그들이 건립한 것은 먼저 "문화점(文化點)"이다. 이것은 바로 "원시군(原始群)"이고, '아담의 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다. 만일 이런 문화가 존속하고 발전한다면, "문화면(文化面)"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씨족"이다. '여와복희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면이 자신의 분열과 확산을 거쳐 상호 영향과 융합을 거치면 "문화편(文化片)"이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부락"이다. "염황의 시대"라 칭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편이 이주, 연합, 겸병, 전쟁을 거쳐 "문화권(文化圈)"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바로 "부락연맹"이다. "요순의 시대"라 부를 수 있다. 이때 안전, 자유 및 신분동일성을 위하여, 무리지어사는 인류는 취락을 도시로 바꾸고, 부락을 국가로 바꾼다. 야만시대에서 문명시대로의 과도가 완성된 것이다.

 

이 과정을 간단히 말하자면, 점, 면, 편, 권, 국이다. 분수령은 국가의 탄생이다. 혹은 문명의 표지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표지는 도시이다. 이를 경계로 하여, 인류역사는 둘로 나뉘어진다. 이전을 "사전사(史前史)"라고 부르고, 이후를 "문명사(文明史)"라고 부른다.

 

시간이 시작되었다. 성공과 좌절, 영광과 굴욕, 승화와 타락도 시작되었다.

 

역사연표를 보자

 

인류는 모두 칠천년의 문명사를 지니고 있고, 삼대(三代)로 나눌 수 있다. 제1대는 직접 원시사회에서 탄생한 것으로 서방학술계에서는 '고대문명(古代文明)"이라 칭한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이집트와 수메르이다. 모두 5천여년이전에 발생했다. 수메르는 나중의 아카드, 바빌론, 앗시리아를 더하여 통칭하면 '메소포타미아'이다. 메소포타미아는 그리스어로 "두 강의 사이"라는 뜻이다. 즉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사이를 말한다. 그래서 수메르, 아카드, 바빌론, 앗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이라고 부른다.

 

수메르와 이집트는 인류문명의 '선구자'이다. 서광이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과 나일강유역에 처음 비칠 때, 세계의 절대다수의 지역은 아직도 원시상태였다. 개략 1천년이 지나서, 하라파문명이 인더스강유역에서 나타난다; 다시 오백년 내지 팔백년이 지나서, 크레테와 하(夏)문명이 에게해와 황하유역에서 출현한다. 하라파, 크레테는 중국과 기본적으로 동시대이고 '같은 나이대의 사람'이다. 그때 이집트인은 일찌감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세웠고, 수메르인은 그들의 사시(史詩)를 읊고 있었다.

 

문명으로서 크레테는 미노스라고도 부른다. 하라파는 인더스강이라고도 부른다. 인더스강문명은 인디아문명과는 다르다.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전자는 드라비다인들이 창조한 것이고, 후자는 아리아인이 창조한 것이다. 그 사이에 수백년의 공백이 있다. 수메르, 이집트, 하라파, 크레테, 하, 여기에 중미의 내력불명의 올멕(Olmec)문명을 합하여 6대고대문명이라고 편의상 부르기로 한다.

 

제2대는 "고전문명"이다. 그중 인더스강과 갠지스강유역이 인디아문명, 중미의 마야문명, 그리고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모두 기원전에 발생한다. 이들은 "후래인(後來人)이다; 비잔틴, 일본, 아랍, 러시아는 기원후에 발생한다. "젊은이"이다.

 

제3대는 "현대문명"이다. 주로 서방을 가리킨다. 이는 문명사상의 "신신인류"이다. 그 공과는 아직 평가를 기다려야 한다. 그 앞날도 예측하기 힘들다.

 

이것이 바로 "삼대문명(三代文明)"이다.

 

삼대문명에는 3개의 대표자가 있다. 제1대를 대표하는 것은 중화문명이고, 제2대를 대표하는 것은 이슬람문명이며, 제3대를 대표하는 것은 서방현대문명이다. 제2대문명중에서 마아,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비잔틴은 속속 퇴장했고, 인디아, 일본, 러시아는 세계적인 보편성이 없다. 제1대문명의 선행자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사라졌고, 같은 나이대의 크레테, 하라파, 올멕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 것은 중화문명밖에 없다.

 

육대고대문명중 중국만이 그 성과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그러나 사실이다.사실상, 하상주에서, 원명청까지, 다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명이었다. 단지 이 민족은 계속하여 커졌고, 심지어 피가 섞였지만; 이 문명은 계속 발전하며, 얼굴을 성형했다; 다만, 시대간의 연결이 되지 않거나 공백은 없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것은 옛날부터 있었을 뿐아니라, 기본적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가국일체(家國一體). 하나라가 그러했다; 조상숭배, 상나라때 있었다; 종법제도, 서주때부터 명청 심지어 민국까지 이어졌다. 언어문자, 생활습관, 인간관계, 문화심리는 시종여일하거나, 만변불리기종(萬變不離其宗)했다. 그리고 누구이든지간에, 이 문명에 속하기만 하면 해외로 나가거나, 고향을 떠나거나, 국적을 바꾸거나, 외국인에게 시집을 가더라도 여전히 Chinese이다. 결국은 조상을 인정하고 돌아온다. 마음 속에는 영원히 "중화의 목소리가 팽배하다"

 

소위 "중화문명중단"이라는 말은 어떻게 나온 말인가?

 

그러나, 중단된 적은 없다. 다만 쇠약해갔을 뿐이다. 변이되었을 뿐이다. 751년, 탈라스전투 그리고 4년후의 안사의 난이 아마도 하나의 분기점일 것이다. 대당제국은 대외적으로 아랍에 패배하고, 대내적으로 번진할거로 망한다. 중화문명의 외부로 향한 눈길을 다시 거두어들여졌다. 하나라의 질박함, 상나라의 현람함, 주나라의 유아함, 한나라의 강인함, 당나라의 개활함은 이제 모두 명일황화(明日黃花)가 되었다. 시대의 기풍은 송나라의 섬세함, 원나라의 공령(空靈)함을 거쳐 명나라의 세속, 청나라의 광강(官腔)에 이른다. 춘추전국의 백가쟁명, 위진육조의 사상해방의 풍광은 자연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명말청초이후 아편전쟁이전까지, 중화에는 사상가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인류문명에 대하여 더 이상 그럴듯한 공헌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아도취에 빠져서 핵주기(核舟記), 병매관(病梅館), 비연호(鼻煙壺), 그리고 삼촌금련(三寸金蓮)에 빠졌다. 그저 <홍루몽>과 납란사(納蘭詞)만이 민감하게 말세의 만가를 불렀다. 그것은 일종의 "잠을 자도 재미없고, 취해도 재미없고, 꿈에서도 언제 사교에 가보았던가(睡也無聊, 醉也無聊, 夢也何曾到謝橋)"의 무력함이었다.

 

내리막길에서 아무도 브레이크를 걸지 못했다.

당연히, 이 내리막길은 완만하게 1천여년간 내려갔다. 그동안에 전혀 힘을 쓰지도 못하고, 우여곡절도 있었다.

바로 중화문명이 롤러코스트처럼 흥성의 극을 달리다가 쇠망하는 날에, 이슬람문명은 번성했다. 830년부터 930년까지 즉 중국의 당말오대시기에, 아랍제국을 할리파의 대도와 창도하에, 다른 민족에 대하여 대규모의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번역소개활동이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역사에서는 "백년번역운동"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러한 장거로 고대그리스의 전적이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고, 유럽의 굴기에 가로등을 켜줄 수 있었다. 즉, 르네상스시기의 위인들이 고첨원촉(高瞻遠矚)할 수 있었고, 지식의 프론티어에서 앞으로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세계거인의 어깨위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제2대문명의 대표자이다.  

그러나, 역사는 알 수가 없다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맞다. 이슬람문명이 양날개를 펼치고 자유롭게 비상하고 있을 때, 유럽대륙은 아직 중세기의 몽매한 상태였다. 국왕과 귀족은 심지어 낫놓고 기역자도 몰랐다. 그러나, 서방현대문명이 후발제인(後發制人)으로 풍운을 몰고 올 때, 이슬람세계는 우리 중국과 마찬가지로, 세계대다수민족과 마찬가지로 망연하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전혀 알지를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르네상스로 고대그리스의 불꽃을 이어받아 새로운 시대의 횃불을 켠 서방세계가 나중에 글로벌문명의 발언권을 장악하게 될 줄은. 설마 하늘아래에 정말 "세상은 돌고 도는 것(風水輪流轉)"이라는 말인가?

이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계산을 한번 해볼 필요가 있다. 이리두유적부터 계산하나면 중화문명은 3700년이다. 메디나에서 건국한 때로부터 계산해보면, 이슬람문명은 1400년이다; 단테와 보카치오로부터 계산하면, 서방현대문명은 660년이다. 후기지수일수록 더욱 기세가 대단했다. 이것은 정말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長江後浪推前浪)"이다. 그러나, "앞물결이 모래사장에 부닥쳐서 없어졌다(把前浪拍在沙灘上)"는 것은 아니다. 그저 "릴레이바통을 넘겨주고, 뒤에온 사람이 앞서간다(傳遞接力棒, 後來者居上)"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중화,이슬람,서방현대문명은 3개시대를 대표한다.

 

여기서 약간 회고해보는 것이 좋겠다.

모두 알다시피 세계적인 문명이 출현한 것은 기원전200여년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로마는 지중해의 패바였고, 진한은 대중화를 통일하여 당시 최대의 양대문명권이 된다. 다만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로마문명은 몰락한다. 그래서 한나라와 로마의 양웅대치는 당문명의 독점오두(獨占鰲頭)로 바뀐다. 당나라때의 장안은 모든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고 사해가 주목했고, 팔방에서 내조했다. 그리하여, 한당7백년은 세계문명의 중화시대라 할 만하다.

 

중당이후, 당송문명과 이슬람문명이 일월제휘(日月齊輝)한다. 다만, 중국은 "석양이 좋았던 것이고(夕陽無限好)", 이슬람은 "초생달이 한창일 때(新月正當時)"였다. 알라와 선지자들의 목소리는 녹색의 샘물과 같이 전체 서아시아, 아프리가 절반, 일부 남아시아를 적신다. 그 후에 바다를 건너 인도네시아까지 간다. 이 공전의 성황은 수백년 심지어 천년이상 계속되었다. 시간의 길이는 한,당에 못지 않았다. 전체 중세기는 모두 이슬람시대이다.

 

사실상 1792년의 오스만제국이 크리미아를 할양하고나서야, 이슬람문명은 진정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바로 이 해에, 건륭제는 <십전기(十全記)>를 써서, 그의 "십전무공"을 자랑했다. 기실 이 때,영국은 일찌감치 명예혁명을 완수하고, 미국과 프랑스도 전후로 <독립선언>과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확실히 만일 서방이 흥기하기 전에 중화문명은 늙었지만 그래도 힘이 남아 있었고, 이슬람문명은 발전을 계속하며 멈추지 않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 후의 세월은 아무런 논쟁의 여지없이 서방현대문명의 시대이다.

 

강산은 각각 인재를 배출하여 각각 수백년을 호령했다.

삼대문명은 전부후계(前赴後繼)하였고, 삼대문명은 차제휘황(次第輝煌)했다. 다같은 세계적 문명이었지만, 로마문명은 암연신상(黯然神傷)했고, 중화문명은 원원류장(源遠流長)하다. 여기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지는 않을까?

당연히 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