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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증국번)

증국번(曾國藩): 개명후 관운이 형통하다

by 중은우시 2013. 11. 30.

글: 이자지(李子遲)

 

증국번(1811년 11월 26일 - 1872년 3월 12일). 한족, 호남성 누저시(婁底市) 쌍봉현(雙峰縣) 하엽진(荷葉鎭) 천평촌(天坪村)(청나라때 옛 소속은 호광행성 장사부 상향현) 사람이다. 만청의 중신으로 상군의 창립자이며 총사령관이다. 청나라때의 군사가, 이학가, 정치가, 서예가, 문학가, 학자이며, 만청산문 "상향파(湘鄕派)"의 창시자이다. 관직은 양강총독, 직예총독, 태자태보, 무영전대학사, 봉1등의용후에 이른다.

 

증국번의 이름은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아명은 "관일(寬一)", "관자(寬仔)", "관아자(寬伢子)", 초명은 "자성(子城, 혹은 子誠)", 자는 "벡함(伯涵, 혹은 伯函)", 호는 "척생(滌生)"이다; 공자의 주요 제자중 하나인 산동 가상(嘉祥)의 증참(曾參)의 제70대손이다(증국번의 집안은 차례로 산동 가상에서 강서 길안, 호남 다릉, 호남 형양 당복, 호남 형양 백과, 호남 상향 하엽당으로 이주했다). 파명은 "증전예(曾傳豫)"라고 부른다; 호남 상향 사람이어서 후대인들은 그를 "증상향(曾湘鄕)"이라고도 불렀다; 전후로 태평천국, 염군(捻軍)을 진압하며 두 손에는 무수한 사람의 선혈을 묻혔다(기실 그 본인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심지어 큰 동물도 죽여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별명으로 "증체두(曾剃頭)", "증도시(曾屠屍)"등을 붙였다; 사후에 조정에서 시호로 "문정(文正)"을 내렸다. 그래서 후인들은 그를 "증문정공(曾文正公)"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증국번(曾國藩)"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얻은 것인가? 기실 그의 이름중 나중에 가장 유명해지고, 아는 사람이 가장 많은 이름인데, 가장 늦게 정해진 이름이기도 하다. 이전에, 출생때부터 그는 아명, 초명, 자, 호, 파명으로 불리웠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도광18년(1828년), 28살이 된 그는 회시에서 제38명으로 공사(貢士)가 된다. 얼마후 다시 전시에서 삼갑(三甲) 제42명으로 동진사(同進士)가 되고, 조고(朝考)에서 제1등 제3명(도광제는 친히 제2명으로 올린다)이 되어, 한림원 서길사가 된다. 이때 비로소 이름을 "국번"으로 개명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의 이 이름은 그의 은사, 귀인, 청나라조정의 중신인 목창아(穆彰阿)가 그에게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목창아(1782-1856), 자는 자박(子朴), 호는 학방(鶴舫), 곽가씨(郭佳氏), 만주 상남기 사람이다. 경성 만주족 관료가정 출신이며, 부친은 광태(廣泰)이고, 관직은 일찌기 내각학사, 우익총병까지 이른다.  가경10년(1805년) 진사가 된다. 역대이래로 내무부대신, 보군통령, 병부상서, 이부상서, 무영전대학사, 군기대신등의 직위를 거친다. 한때 그의 권력은 천하를 뒤흔들었다. 아편전쟁때 금연운동을 저지하고, 임칙서등 저항파를 모함했다. 영국, 미국등 침략자들과 의화를 추구하고,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여, 나중에 삭탈관직된다.

 

목창아는 장기간 재상의 직에 있으면서 대권을 좌지우지했다. 황상에 대하여는 아부하고 영합하며 총애를 받았고, 부하에 대하여는 당파를 만들어 자신에 반대하는 자들을 배척했다. 그는 각종 과거시험기회를 이용하여, 제자를 모으고, 당파를 결성하여 아주 큰 정치세력집단을 이룬다. <청사고>에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가경제때 이래로, 향시를 세번, 전시를 다섯번 주재한다. 무릇, 복시, 전시, 조고, 교습서길사산관고차, 대고한첨에서 어느 한 해도 시험을 주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국사, 옥첩, 실록의 여러 관(館)에 모두 총재를 맡는다. 제자와 부하들이 중외에 널리 퍼져 있고, 저명인사들도 많았다. 한때는 "목당(穆黨)"이라고 불리웠다." 이 사람은 역사상 아주 복잡한 인물이다. 장점과 결점, 성적과 죄과, 후인의 포폄은 모두 아주 두드러진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그는 조정에 한족대재자 증국번을 추천했고, 그것만 해도 큰 공로이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당초 증국번이 회시, 전시에 당당히 합격한 후, 은사이며 주시험관 목창아를 찾아가서 배알하고 감사인사한다. 유쾌하게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후, 목창아는 그의 원래 이름인 "소성"은 너무 자잘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에게 이름을 고쳐주겠다고 말한다. 증국번은 자연히 그 말을 듣고 기뻐서 급히 말한다: "중당대인께서 내려주십시오" 목창아는 증국번을 한참동안 바라본 다음 정중하게 말한다: "족하(足下)는 지금 한림인데, 우리 조의 재보지신(宰輔之臣)은 거의 이 곳에서 나왔다. 족하는 한 사람의 명사(名士), 재자(才子)로 한계를 짓지 말고, 뜻을 세워 국가동량지재가 되도록 하라. 노부가 생각컨데 족하는 "국번"으로 개명하는 거이 좋겠다. "국가번리(國家藩籬)"의 뜻이다.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증국번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감사했다. 자리에서 떠날 때, 목창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절을 한다.

 

그 이후, 증국번은 정식으로 "국번(국가의 번리, 즉 조정중신)"을 이름으로 쓴다. 그리고 목창아라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만주족 고관에 잘 보였기 때문에, 졸지에 운명이 바뀌고, 관운이 형통하며, 비황등달(飛黃騰達)한다. 증국번은 대기만성형이다. 과거 10년동안 이름없던 지방의 선비였으나, 목창아를 알게 되면서, 그의 추천으로 짧은 10년만에 6품에서 신속히 정2품까지 승진한다. (예부, 병부, 공부, 이부의 사부 시랑), 나중의 휘황한 사업에 양호한 기초를 닦는다. 증국번은 일생동안 큰 성취를 이루는데, 그의 은사인 목창아의 발탁, 제휴 및 그의 개명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