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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증국번)

신비한 태평천국의 성고(聖庫): 증국번이 3일간 수색해서 찾지 못하다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문사열독(文史悅讀) 

 

 

 

신비하게 소실된 성고의 자금

 

- 천경성이 함락될 때, 태평천국은 얼마나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는가?

- "성고"에 산처럼 쌓여 있던 금은보화는 그냥 사라졌단 말인가?

- 민간의 소문에 따르면, 이들 금은보화는 남경성내에 묻혀 있다. 이것은 근거없는 소문인가 아니면 근거가 있는 말인가?

 

역사상 최대규모의 농민의거인 태평천국운동이 실패한 것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거액의 보물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유감스럽다.

 

태평천국은 남경에서 10년간 나라를 경영해왔다. 각지의 기진이보를 약탈하여 궁안에 모아두었다. 각 왕부에도 금은보화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는 날, 증국번은 하나도 획득하지 못했다고 보고한다. 태평천국의 보물은 얼마나 될까? 어디로 갔을까? 갑자기 오리무중에 쌓인 것같다.

 

증국번의 상소문에는 3일동안 수색했지만 보물창고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남경 부자묘 첨원에 있는 태평천국역사박물관에서 기자는 태평천국사전문가인 장철보 연구원을 만났다. 기자가 온 이유를 들은 후, 장철보는 웃으면서 말한다: "태평천국이 보물을 숨겼다는 주장은 여러개의 버전이 있다. 이 문제를 확실히 하려면, 먼저 천경함락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1864년 여름, 증국번이 동생 증국전이 이끄는 상군이 천경을 함락시킨다.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고, 동치제는 크게 기뻐한다. 당시의 청정부는 국고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재정이 부족했다. 군수품도 제대로 보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경을 함락시킨 후, 태평천국의 재물로 시급한 불을 끄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략 1개월후, 증국번이 상소문은 동치황제를 크게 실망시킨다.

 

장철보는 증국번의 이 상소문을 보여준다. 상소문의 개략적인 뜻은 이렇다: "여러 해동안, 중국과 외국에서는 홍수전이 아주 부유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금은을 바다처럼 많이 가지고 있고, 온갖 보물이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본인은 증국전과 일찌감치 협의를 해 두었다. 성을 함락시킨 후, 창고를 봉쇄시킨 후, 돈과 재물이 많으면 호부로 보내고, 적으면 남겨서 군용으로 쓰고, 난민을 구제할 생각이었다. 우리는 삼일간 수색을 해보았지만, 잔류반군은 스스로 홍수전의 천왕부를 불태워 버렸다. 삼일후, 우리가 자세히 물어봤지만, 소위 전고(錢庫)는 아예 없었다."

 

증국번의 상소문이 올라간 후, 조정은 금방 비복을 내려 태도를 보인다: 성안을 조사했지만 무슨 재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중앙정부로 올릴 필요가 없다.

 

이렇게 일은 끝이 난다. 그러나 이 논리대로라면, '중국와 외국에 널리 알려진' 태평천국이 부유했다는 것은 그저 소문일 뿐이다. 증국번형제가 원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전고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설마, 이렇게 간단한 것일까?

 

태평천국에 "성고"가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장철보는 이렇게 분석한다: "태평천국시기에 '성고'제도를 시행했다. 이 성고는 국고에 상당한다. 그래서 증국번이 전고가 없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성고"제도는 민중들이 재물을 개인적으로 보관할 수 없도록 하고, '천조성고'에 바쳐서 보관하게 하여 통일적으로 분배하는 것이었다. 이 제도를 관철, 집행하기 위하여, 태평천국은 엄격한 법률을 제정한다. 구체적인 집행기준은 5냥은자를 한도로 하여, 5냥이상의 재물을 보관하는 것은 범죄이며, 심지어 사형에까지 처해졌다.

 

1853년, 태평천국이 천경에 도읍을 정한 후, 더더욱 <천조전무제도>를 반포한다. 여기서 추가로 '성고'제도를 명확히 한다. 전체 성의 주민과 군대에 공급하는 '성고'는 재물이 많았을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성고내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재물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간첩 장계경(張繼庚)이 청나라군대 총사령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약간 엿볼 수 있다.

 

장철보는 이렇게 소개한다: "장계경은 강녕 사람이다. 당시 많은 정통적인 독서인들과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에 대하여 극단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다."

 

장계경은 도광연간에 진사에 급제한다. 나중에 호남포정사 번탁의 막료가 된다. 당시 남경이 태평군의 포위공격을 받을 때, 강녕포정사는 장계경이 인재라고 생각하여 급히 그를 자신의 집으로 부른다. 그에게 태평군에 대적할 대책을 내도록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장계경이 온 후에, 한편으로 적극 사병을 모집하고, 다른 한편으로 남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한 계책을 내놓는다. 얼마후, 남경성은 태평군에 함락된다. 장계경 본인도 함락되는 성안에 있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태평천국에 귀순했지만, 실제로는 태평군에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안과 밖에서 호응하여 성밖의 청군이 천경을 함락시키도록 도와주려 한 것이다.

 

장계경이 태평군내부에 섞여 들어가서, "동왕은 월인(광동사람)을 후하게 대하고 상인(호남사람)에게는 박하게 대한다"는 말로 수영장병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동왕 양수청이 적시에 그들의 거동을 발견하여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잠복해 있던 몇달의 시간동안, 장계경은 청군 강남대영의 총사령관 향영(向榮)에게 7통의 서신을 보냈다. 태평천국의 성내 정부기구, 재산배치, 지형건축 그리고 병력배치까지 보고한다. 첫번째 서신에서는 장계경이 명확히 말한다. 태평천국이 남경을 점령할 때, 대량의 은량을 운송하여 성고에 보관했으며, 모두 1800여만냥 백은이 있다고. 몇달 후에는 단시 800여만냥이 남았다고. 장계경은 향영에게 건의한다. 일단 청군이 성내로 들어오면 즉시 사람을 보내어 성고를 봉쇄하여 돈과 재물이 유실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몇 달 후, 장계경의 또 다른 서신에서도 다시 성고의 상황을 보고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장계경의 보고는 작용을 하지 못한다. 1856년, 태평군이 청군이 강남대영을 격파하고, 천경의 3년간 포위망을 풀어버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3년동안 성고는 재물의 측면에서 태평천국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장계경의 기록에 따르면, 성고의 장소는 수서문(水西門)의 등롱항(燈籠巷)에 있다.

 

누가 등롱항이 '성고'를 텅텅 비게 만들었는가?

 

원래, 성고는 비록 확실히 존재했지만, 실제로, 태평천국 후기에 성고제도는 명존실망(名存實亡)으로 명목만 남아 있었다.

 

1856년, 태평군이 청군의 강남대영을 격파한 후, 천경성내에는 내분의 '천경사변'이 일어난다. 태평천국이 상승하다가 쇠락하는 전환점이 된다. 1864년 천경함락후, 충왕 이수성은 청병에 체포된다. 그는 감옥 속에서 진술서를 쓰는데 이렇게 말한다: "천경사변후 국고에 은미(銀米)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양식을 가져다가 난민을 구제했고, 부대도 먹을 것이 없어서, 집안의 여인들의 악세사리를 팔아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남경대학 역사과의 모가기(茅家琦)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천경사변'이전에 성고제도는 이미 파괴되었다. 장계경이 향영에게 보낸 또 다른 서신에서, 이런 말이 있다: "성고는 앞의 구월에 보고할 때 아직 800여만이 있었는데, 현재는 겨우 백만도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장계경은 향영에게 급히 천경을 함락시키라고 재촉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돈마저 다 써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성고의 돈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장계경은 서신에서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동왕부는 1만여냥, 천왕부는 7천여냥, 북왕부는 1천여냥, 나머지 크고 작은 아문들이 보관한 은이 적지 않다. 의복도 부지기수이다."

 

"확실히, 소위 성고는 이미 태평천국 내부의 크고 작은 장수들과 관리들이 나눠가졌다." 모가기는 말한다. "이것은 일찌기 태평천국이 정도(定都)하기 전에, 성고제도는 집행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소위 성고는 태평천국 후기에 접어들면서, 형식조차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먼저 영왕 진옥성의 왕부가 되고, 상군이 천경을 함락시킨 후, 양강총독 증국번은 등롱항의 전 영왕부내에 거주한 바 있다.

 

1970년대, 수서문 등롱항의 남경의약회사 안에서 고고학자들은 성고유적지를 발견한다. 나중에 이곳의 석주기초에는 현재 당자가(堂子街)에 있는 태평천국벽화전람관으로 옮겨졌고, 두 개의 유금용봉조량(鎏金龍鳳雕梁)은 태평천국박물관내로 옮겨져서 전시되고 있다.

 

태평천국의 남은 일부 돈은 어디로 갔는가?

 

성고의 돈과 재물이 사라졌을 뿐아니라, 태평천국 후기에는 대량의 돈과 재물이 홍씨가족의 수중에 축적되어 있었다.

 

이수성은 형을 받기 전의 진술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홍수전의 큰형인 홍인발, 둘째형인 홍인달은 모두 돈을 많이 긁어모았다. "궁형준법"으로 돈과 재물을 긁었다. 천경이 청군에 포위되어 있을 때 백성들은 입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부족하여 생활할 수가 없었다. 이수성은 성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백성들이 성밖으로 나가서 살아갈 수 있게 하도록 밀명을 내린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홍씨가족의 사람들이 각 성문에 초소를 두어 백성들이 휴대한 돈과 재물을 모조리 빼앗았다.

 

이렇게 빼앗은 돈과 재물로 그들은 사치와 향락을 즐긴다.

 

홍수전 본인은 천경을 수도로 정한 후, 수만의 군민을 동원하여 민간주택을 허물고, 원래 양강총독아문이 있던 곳에 호화로운 천왕부를 개축,확장한다. 완공후의 천왕부는 '성의 수위가 십여리에 이르고 성의 높이가 수장에 이르며, 내외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바깥은 태양성이고 안은 금룡성이다", "조각이 정교하고, 금벽휘황했다." "오색찬란하고 아름답고 사치스럽기가 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다른 여러 왕들도 천경성내에 대거 왕부를 짓는다. 서로 비교하면서 향락을 만끽한다.

 

이와 동시에, 태평천국은 위로는 천왕 홍수전으로부터 아래로는 각 수령에 이르기까지, 속속 축수활동을 벌인다. 예를 들어, 천경정도후, 동왕 양수청은 특별히 조정내 및 군대내의 각급 관리에게 명하여, 천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기진이보"를 많이 준비하여 천왕의 축수를 빌도록 하였다. 그리고 예를 들어 갑인4년 구월, 홍수전이 넷째아들이 탄생한다. 동왕 양수청은 전선의 장수들에게 명을 내려, "....기진이보를 많이 준비하고, 적절한 인원을 준비해서 천경으로 운송해라. 그리하여 십월 이십사일 넷째전하의 만월(滿月)때, 천왕이 등조사천(登朝謝天)하는데 쓸 수 있도록 하라."

 

장철보는 말한다. "이런 간단한 사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태평천국의 왕후장령들의 생활이 얼마나 호화사치스러웠는지."

 

그러나, 쾌락은 오래가지 않았다. 천경이 함락된 후, 태평천국의 장령들은 대부분 전사한다. 그중, 홍인발은 난군들의 사이에서 죽고, 홍인달은 청군에 포로로 잡힌 후 사형이 집행된다. 그들이 죽은 후, 원래 가지고 있던 재물은 하나같이 사라진다.

 

유천왕(幼天王)은 보물을 호주(湖州)로 가져가지 못했다.

 

"당연히, 생각할 수 있다. 태평천국후기의 실질적인 권력자로서, 기본적으로 단정할 수 있다. 홍수전이 모은 재물이 가장 거대할 것이다." 장철보의 분석이다. "후인들이 태평천국의 보물을 얘기할 때 대부분은 홍수전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금은보화는 홍수전에게 향락을 주면서 동시에 거대한 재난도 되었다.

 

1864년, 청나라병사들이 천경을 포위공격하면서 성이 곧 함락될 것으로 보이자, 홍수전의 정신은 철저히 붕괴된다. 이때는 내외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성내에는 기본적으로 무기도 없고, 양식도 떨어졌다. 홍수전은 그저 신령에게 계속하여 빌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먹을 것을 내려달라고. 그래사 자신의 장병들이 배곯지 않게 해달라고. 그러나, 모든 것은 효과가 없었다. 공포와 절망의 이중고통하에, 홍수전의 몸은 갈수록 엉망이 되고, 6월 1일 천왕부에서 병사한다. 7월 19일, 상군이 금릉성을 함락시켰을 때, 증국전은 홍수전이 묻힌 곳을 파내도록 명한다. 시신을 우화대 대영으로 옮겨서 신분확인을 한 후 불태워 없앤다.

 

홍수전이 죽은 후, 유천왕 홍천귀복이 총총 등극한다. 막 '용상'에 앉았는데, 청군이 천경을 함락시킨 것이다. 천경이 함락되는 그날 밤, 충왕 이수성은 밤의 장막이 내린 틈을 타서, 유천왕일행을 성밖으로 도망치게 호송한다. 청군의 추격에 유천왕 일행은 도왕 황문금이 지키는 호주로 도망친다.

 

호주의 외곽포위망이 약간 느슨해 졌을 때 소왕 황문영은 유천왕 일행을 성밖으로 데려가서 안휘 광덕으로 간다. 호주성이 함락된 후, 황문금은 포위망을 뚫고 광덕으로 가서 유천왕과 회합한다. 그리고 밤을 세워 영국까지 호송한다. 그 결과 중도에 황문금은 부상이 심해 사망하고, 홀로 떨어지게 된 유천왕 홍천귀복일행은 금방 청군에 포로로 잡힌다.

 

이 사실로 인하여, 일찌기 이렇게 의심한 사람이 있다. 태평천국이 남긴 거대한 재물중 상당한 일부분은 유천왕이 호주로 가져갔을 것이라고. 보도에 따르면, 1954년, 어떤 사람이 황문금의 엣집 소재지에서 성인의 손바닥보다 큰 동전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위에는 "태평통보"라는 몇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이곳이 바로 전설 속의 태평천국 '성고'의 진고전(鎭庫錢)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 결론은 태평천국이 호주에 보물을 숨겼다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이 견해에 대하여 장철보는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다지 가능성이 없다."

 

당초 천경성이 함락될 때, 이수성이 유천왕 일행을 호송하면서 청군으로 분장하여 비로소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유천왕은 황급히 목숨을 구하려고 도망치면서, 자신의 두 친동생조차도 데려가지 못했다. 대량의 재물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유천왕이 청군에 포로로 잡힌 후, 친필 진술서를 썼는데, 진술서를 보면 이 유천왕은 철저한 겁쟁이이고 아무런 기개도 없다. 장철보는 웃으며 말한다. 살기 위하여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태평천국의 모든 상황을 진술했을 뿐아니라, 청나라조정에 아부까지 한다. 그러나 진술서에서 그가 유일하게 언급한 돈과 관련있는 사항은 그가 도망하던 길에 잃어버린 권리를 상징하는 옥새였다. 옥새를 잃어서 임시로 목새를 파서 대체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황문금의 옛집 부근에서 발견된 그 동전은 어떻게 된 것일까? 장철보는 이렇게 해석한다. "분명 태평천국과 관련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태평천국의 돈은 '태평통보'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보'라고 불렀다." 장철보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석달개와 관련한 대도하 보물에 대한 소문은 더더욱 근거가 없다."

 

천경사변후, 석달개는 어쩔 수 없이 천경을 떠난다. 가는 길에 병마를 모았다. 안휘, 강서, 절강, 호남, 복건 등지를 지나고, 최종적으로 사천으로 들어간다. 사천에 들어간 후, 석달개의 부대는 거의 전투력을 상실한다. 대도하앞에서 그들은 현지 토사와 청군의 협공을 받는다. 도망갈 길이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할 수 없이, 석달개는 삼군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아들을 데리고 청군에 투항한다. 결국 능지처참된다. 석달개의 잔여부대 이천여명은 그의 십여명의 왕비를 포함하여 모조리 도륙된다.

 

"생각해보라. 이런 상황하에서, 목숨조차 보전하기 어려운데, 보물에 신경을 쓸 수 있겠는가?" 장철보는 웃으며 말한다. "소위 보물에 관한 소문은 대부분 사람들이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상상한 것이다."

 

남경성의 어느 곳이 보물을 숨기기에 적합한가.

 

태평천국이 남긴 금전은 유천왕에 의하여 호주로 가져가지 않았다. 대도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일찌기 반벽강산을 차지했던 정권이 축적한 거대한 보물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남경성이 서쪽에 살고 있는 왕병의는 문사연구 전문가이다. 여러해동안 그는 이 문제를 주목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왕병의는 이렇게 말한다. 장삼(蔣三)은 일찌기 이수성의 라마총관(騾馬總管)을 지냈다. 태평천국이 실패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돌연 부자가 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그가 청량산에서 일찌기 태평군을 도와수 묻었던 24상자의 금은보화를 캐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남경변영, 태평항, 삼산가, 승주로 일대는 모두 그의 저택과 점포였다. 예를 들어 태평항 50호의 장가고택은 규모가 거대하다. 항전초 남경이 함락되자 이곳은 일본헌병대구류소로 바뀌었다. 담장이 높은데,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항일지사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모른다. 해방수, 이곳은 백하구 양고(糧庫)가 된다. 1958년에는 강남기계창이 들어선다. 1980년대에는 원래의 부지에 태평상하(太平商廈)가 들어선다.

 

그외에, 남경민간에는 석두성내 마안산에 "장모장금굴(長毛藏金窟)"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성의 서북 노룡산에도 '장모장금굴'과 같은 류의 소문이 있다. 이들 소문 속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천왕부 보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홍수전의 천왕부 유적지는 현재의 장강로 292호 '총통부'내에 있다. 당시 이곳은 홍수전이 거주하고 정무를 관리하던 핵심장소이다. 민간에서는 시기심이 많은 홍수전이 분명 자신의 집안에 '개인금고'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욱 구체적인 장소에 관하여는 민간에서 그의 '금룡전' 아래일 것으로 본다...

 

시시비비는 있다. 사실, 진상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