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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증국번)

비전형적인 청백리 증국번: 청백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큰 일을 하기 위해서

by 중은우시 2013. 9. 25.

글: 요망동방주간 

 

증국번이 사망한 후, 증씨집안은 가장 중요한 수입원을 잃었고,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증국번이 죽은 후 5년째 되는 해, 아들 증기택은 가족의 병이 위중했으나, 치료할 돈이 부족하여, 부득이하게 좌종당에게 부탁하여 멀리 신강에 있던 유금당(劉錦棠)에게 돈을 빌린다. 죄종당은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아주 감동하여 그에게 300만냥은자를 보내준다. 얼마후 자신의 아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중흥원로의 아들로 배고픔과 곤경을 벗어나지 못하다니, 이를 보면 문정공(증국번)의 청절(淸節)은 가히 후세의 귀감이 되기에 족하다". 결국 아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면 부친인 증국번은 청백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증씨집안이 만일 돈을 벌고자 했다면, 기회는 너무나 많았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증국번이 친히 창립한 양회염표(兩淮鹽票)로 큰 돈을 벌었다. 이들 염표는 처음에 아주 싸게 발행되었으나, 이자는 아주 높았다. 오늘날의 발기주보다 훨씬 더 돈을 번 것이다. 증씨의 후손들은 이렇게말한다:

 

염표 1장의 가격은 200냥이었다. 나중에는 2만냥에 팔았다. 매년의 이자는 3,4천냥에 이르렀다; 당시의 사회에 집안에 이런 염표 1장만 있으면 부유한 편에 속했다.

 

강남의 저명한 부호인 주부구(周扶九)는 원래 일개 빈빈이었다. 장사의 포장(布莊)에서 점원으로 있었다. 한번은 그가 주인을 대신하여 양주로 돈을 받으러 갔다. 돈을 빚진 사람은 수중에 돈이 없자, 염표로 대신 갚았다. 그러나 점주는 염표가 뭔지를 몰라서, 대물상환에 동의하지 않았다. 주부구는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려 자신이 돈을 빌리고 염표를 받는다. 몇 장의 염표를 가지고 그는 금방 부자가 된다. 나중에 재산이 4500만냥에 이르게 된다.

 

다만, 증국번이 당초 집안사람들에게 염표를 판매하지 못하게 막았다. 증국번의 당시 권세라면 자신 혹은 집안사람들이 점포명의를 빌려 1,2백장의 염표를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운 일이다. 1장에 2만위안을 버니, 1,2백장이면 2,4백만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증국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증국번의 청렴은 비록 그가 생전에 떠들고 다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더라도, 사후에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었다.

 

설복성(薛福成)이 쓴 <대이백상의진독신충훈사실소>에는 이런 말이 있다: 증국번은 평생을 청렴하고 검박하게 살았다. 스스로를 한소지인(寒素之人)과 같다고 자부했다. 그가 받은 양렴전은 모조리 공무에 썼고, 자신은 집을 짓거나 땅을 사지 않았다. 의식은 모두 근검절약했고, 매끼 식사는 4가지요리를 넘어서지 않았다; 자녀의 결혼에서 비용은 200냥은자를 넘지 않았다. 이를 가훈으로 삼는다. 다만 우군에게 군수물자를 보낼 수 없게 되거나, 이재민이 먹을 것이 없거나, 지방에서 해야할 공무에 써야할 돈이 필요한 경우, 그는 자신이 봉급을 아껴서 놓은 돈으로 공금의 부족분에 충당하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런 서술은 실사구시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증국번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의 관료로서의 풍격은 아주 독특했다. 한편으로, 그는 확실히 청렴한 관리였다. 그의 '청렴'은 진짜였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었다. 현존하는 사료중에서, 증국번이 공금으로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웠다는 여하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평생 검박하게 생활했고, 야반불훈(夜飯不葷)했다. 만년이 지위도 높고 명망도 있었지만, 그의 신발과 양말은 여전히 부인이나 며느리, 딸이 만들었다. 청말에 확실히 상당히 청렴한 관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증국번의 에피소드중에는 "가난해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貧不能殮)"는 얘기나, 관청에 채소를 심어서 먹었다는 식의 비정하고 극단적인 모습은 없다. 중국인의 눈에 진정한 청백리는 반드시 "맑아서 밑바닥이 보일 정도(淸可見底)"여야 하고, 한 점의 티끌이 묻어서도 안되며, 해서(海瑞)처럼 거의 새디스트 혹은 마조키스트가 되어야 사람들이 탄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증국번은 그런 정도에는 전혀 미치지 않았다.

 

만일 청백리를 분류한다면, 증국번은 '비전형적 청백리'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뼛속은 청렴각고(淸廉刻苦)하지만, 표면적으로는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것이다. 이것은 증국번의 지향(志向)때문이다. 즉, 그는 청백리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큰 일을 하고자 한 것이다.

 

해서를 대표로 하는 전통적인 청백리의 특징은 꺽이면 꺽이지 구부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글자로 된 규장제도만 인정할 뿐, 사실상 존재하는 잠규칙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해서는 회색수입을 거절하고, 급여로는 쓸 돈이 충분하지 못하여, 부득이 관청내에 스스로 채소밭을 만들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가끔 몇 근의 고기를 사는 것도 엄청난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청렴한 청백리는 관료사회에서는 공적이 된다. 다른 사람의 협력을 얻을 수가 없다. 해서는 맑은 물처럼 청렴했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서는 평생동안 관료사회에서 배척당한다. 가능한 역량을 동원할 수가 없었고, 진정 국가와 민족을 위한 큰 일을 해낼 수가 없었다.

 

증국번은 해서식의 청백리가 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각고자면하면서 온 힘을 다하여 성인이 되고자 했고, 외왕지업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는 일처리에서 효과를 중시했지, 허명은 중시하지 않았다.

 

증국번은 자신의 경험에서 결론을 얻는다.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반드시 여러 사람의 배척을 받는다. 그러므로 관료사회에서 일처리가 지나치게 강경한 경우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강한 사람인 것같지만, 실제로는 약한 사람이다. 이 땅 위에서 진정한 강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유약하고 양보하는 것같고, 함혼포융(含渾包融)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증국번은 해서의 청렴한 실질은 취하였지만, 일청여수(一淸如水)의 명성은 극력 회피한 것이다. 그의 선택은 청백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침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