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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공자)

공자묘수난기(孔子墓受難記)

by 중은우시 2013. 11. 29.

글: 유염신(劉炎迅)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는 사론을 발표하여 "수천년이래 계급착취로 조성된 인민을 해치는 일체의 구사상(舊思想), 구문화(舊文化), 구풍속(舊風俗), 구습관(舊習慣)을 파괴하여 없애자"는 구호를 내세운다. 즉, '파사구(破四舊)'이다. 이것은 문혁의 중요목표중 하나였다. 이 운동은 홍위병운동이 일어나면서 각지의 홍위병들이 사원, 고적을 부수고, 분묘를 파내고, 신불을 훼손시켰으며, 장서와 서화는 불태웠다...천년동안 이어진 문화와 생활방식은 공전의 파괴를 당하고, 중화전통문화의 보물과 민족정신의 면모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그 영향은 몇 대의 사람들에게 미친다. 지금까지도 그 심각한 파괴정도와 결과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전설에 따르면, 진시황은 일찌기 공분(孔墳)을 파내라고 명령한 바 있다고 한다. 역사상 확인가능한 공자묘파괴사건은 1966년에 발생한다. 홍위병들이 부순 것은 "공가점(孔家店)'만이 아니었다. 중화문화의 명맥이었다. 겁난을 당한 공자의 고향은 전국 파사구운동중에서 가장 손실이 참중했다.

 

묘혈을 파헤쳐지고, 공자의 76대적손, 연성공(衍聖公) 공령이(孔令貽)의 시신이 끌려나온다. 공령이는 공림에 매장된 마지막 '연성공'이다. 연성공은 공자의 적계 장자,장손의 봉호이고, 송나라때부터 세습되어 내려왔다.

 

아직 부패되지 않은 47년전의 시신의 얼굴과 몸은 이때 파괴된다. 1966년 겨울의 공기 속에서 신속히 산회되어 검게 변한다; 원래 잠복되어 있던 시취(屍臭)가 뿜어나온다. 오래된 포르말린 약물과 썩은 흑비린내가 함께 섞여서 신속히 묘혈방원 백미터이내를 채운다. 둘러싸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도망갈 곳이 없었다.

 

둘러싸고 있던 한 무리의 청년은 녹색의 군복을 입고 있었고, 홍수표(紅袖標)를 차고 있었다. 그들은 "혁명무죄, 조반유리(革命無罪, 造反有理)"를 외치는 홍위병소장들이었다. 그들의 뒤에는 더 많은 토포면의(土布棉衣)를 입고 사방팔방에서 달려와서 구경하는 농민들이 가득했다.

 

유아위(劉亞偉)는 이때 겨우 13살이었다. 50년후, 그는 <중국신문주간>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전히 자신의 감각계통이 악취에 바쪄서 어쩔 수 없었던 무력감을 여전히 분명히 기억한다. "정말 또 다른 세계에서 온 냄새"였다. 유아위는 큰 손이 자신의 위장을 힘을 주어 붙잡고, 계속 쥐어짜는 것처럼 느꼈다.

 

홍위병이 공림에 뛰어들어 묘를 파헤치기 전에, 그들은 이미 공묘와 공부를 파괴했다. 역대의 비각을 깨트리고, 공자 조상(雕像)을 불태우고, 일체의 "봉건주의죄악의 낡은 세력을 대표하는" 일체의 병병관관(甁甁罐罐)을 부숴버렸다.

 

여러해 후에 유아위는 말했다. 자신은 죄인이라고. "그 연대를 살아온 사람은 모두 죄인이다" 기실 그는 그저 구경꾼인 소년일 뿐이었다.

 

며칠의 파괴, 몇백년이 지나도 회복될 수 없다.

 

외지의 홍위병이 곧 몰려왔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광경은 이들 정력이 충만한 젊은이들이 심지어 잠을 자지도,쉬지도 않고, 태산의 자락에서부터 계속하여 산꼭대기까지 수많은 석비와 마애석각을 파괴하였다는 것이다.

 

1980년대, 유아위는 국부현위 보도조 구성원이었다. 현정협의 한 동료가 쓴 보고서를 보았다. 이 2만자에 이르는 보고서에는 문혁때 담후란(譚厚蘭)등의 인물들이 어떻게 비석을 부수고, 묘를 파헤친 사실을 수집하고, 일부 수치를 열거했다.

 

이것은 유아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소년시기에 보았던 그 황당했던 일막을 되돌아보았다. 1990년부터, 유아위와 국무문화관의 연구원 왕량(王良)은 사방에서 취재하고, 친히 겪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예를 들어 옛날 혁명위원회 위원이 한 사람 있는데, 그는 입을 꽉 다물고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일곱번째 시도에서 한 문화재 상점에서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배우자는 옆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매번 문혁때 반공(反孔)한 일을 언급할 때마다 그는 몸을 돌려 배우자를 보았다: 말해도 되지? 배우자가 동의하면 조금씩 얘기했다.

 

1966년으로 시간은 되돌아간다. 그 해의 8월 23일, 곡부현정부는 소식을 듣는다. 외지의 홍위병이 곧 몰려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는 내내 파괴했고, 문화재를 부수었다. 곡부일중(曲阜一中)의 학생들은 공묘의 대문에 "긴급히 행동하라. 계급적인의 일체 파괴활동을 방지하라"는 표어를 내세웠다. 원래 개방하던 공묘 동화문, 서화문과 남문은 폐쇄된다.

 

많은 농민들이 공부의 문앞으로 와서 보초를 섰다. 그들은 홍유표(紅油標)를 만들 시간이 없어서, 가슴에는 홍포조(紅布條)를 붙이고, "빈하중농(貧下中農)"이라고 썼다.

 

이때 곡부현위 서기 이수(李秀)가 공개연설을 한다. '삼공(三孔)'은 국무원이 명문으로 규정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이다.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국가재산을 파괴하는 것이다. 투쟁방향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그는 나중에 회고한다. 당시의 생각은 며칠의 파괴는 수백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곡부성은 고도경비상태에 처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곡부사범학원 일부 홍위병이 행동을 개시한다. 그들은 "타도공노이(打倒孔老二)", "철저도훼공가점(徹底搗毁孔家店)"을 외쳤다.

 

공부의 문앞에서, 문관회 업무원들이 홍위병을 막앗다.

홍위병은 한 목소리로 모주석 어록을 외웠다: "무릇 반동인 물건을 네가 치지 않으면, 네가 쓰러뜨릴 수 없다. 이것은 청소하는 것과 같다. 빗자루로 몰아내지 않으면, 먼지는 여전히 있고 스스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당시 부현장을 맡고 잇던 왕화전(王化田)이 일어섰다. 국무원이 세운 문물보호의 비를 가리키며 말한다: "너희들이 잘 보아라. 누가 이곳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국가법률에 저촉되는 것이다."

 

한 홍위병이 나와서 묻는다: "너는 뭐하는 사람이냐?"

왕화전은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왕화전이다. 부현장이다." 누가 알았으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은 소리친다: "왕화전을 타도하자", "공노이의 집지키는 개를 타도하자"

 

공분을 파헤칠 수 있다.

 

임걸(임걸)은 담후란에게 일깨워준다. "공자는 이미 죽은지 이천여년이 되었다. 현재 와서 그를 처리한다고 하여 현실적인 의믜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은 너희가 산동으로 가기 전에 먼저 분명히 해야할 문제이다."

 

"오늘 '공가점'은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 사구의 더러움을 소장하고 있는 '삼합점(三合店)'이다, 모택동사상의 절대권위를 수립하는데 큰 장애이다." 이것은 북경사범대학 모택동사상홍위병 "정강산전투단"이 1966년 11월에 쓴 <토공전보(討孔戰報)>이다.

 

곡부에서 많은 공부의 후예들은 <중국신문주간> 기자의 취재에 응하면서 한 이름을 그들은 계속하여 언급했다. 담후란. 그는 당시 '토공(討孔)'의 간장(干將)이었다. '정강산전투단'의 책임자였다.

 

담후란은 북경사범대학의 '조간생(調干生)"이다. 일찌기 <홍기>잡지에 뽑혀가서 일을 한 바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임걸(林杰)을 알게 된다. 임걸은 당시 <홍기> 잡지의 주요작자이다. 문혁초기의 풍운인물이다.

 

유아위는 담후란이 조사받을 때 쓴 자술서를 열람했다. 거기에는 이런 기술이 있다. 임절이 이렇게 담후란에게 말한 다 있다: "내가 너에게 한 곳을 소개시켜 주겠다. 대경이외의 또 하나의 좋은 곳이다. 산동 곡부. 공노이의 고향으로 가서 공노이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임걸은 이어서 말한다: "너희는 가장 앞장서서 문화대혁명에서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 담후란의 당시 대답은  "...우리가 가겠다. 우리는 반드시 가겠다."였다.

 

문혁관련 자료에 따르면, <토공전보> 및 여러 당사자의 회고에 따르면, 1966년 11월 11일, 당시 중앙문혁소조 조장을 맡고 있던 진백달은 북경에서 전보를 친다. "공묘, 공부, 공림을 부수지 말라." 단 "공분(孔墳)은 파내도 된다."

 

같은 날, 당시 중앙문혁소조 구성원 척본우(戚本禹)가 전화를 건다: "한비(漢碑)는 보류해야 한다. 명나라이전의 비석도 보류해야 하다. 청나라비석은 깨도 좋다. 공묘에 대하여는 개조할 수 있다. '수조원(收租院)'과 같이. 공분은 파낼 수 있다. 문물을 아는 사람을 찾아서 보여줘도 된다."

 

담후란은 행동계획을 제정한다. <화소공가점(火燒孔家店) -- 토공격문(討孔檄文)>, <고전국인민서(告全國人民書)>를 초안한다. 동시에 두 팀의 '선봉대'를 보낸다. 각각 산동성위, 국부현위로 보내어 '화력정찰'을 실시한다.

 

홍위병이 '삼공'을 파괴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곡부 사람들은 큰 나무상자로 공부의 문앞에 있는 석사자를 모조리 둘러싼다. 바깥에는 다시 모주석상을 붙였다. 그리고 표어를 쓴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고, 더더구나 부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노력도 반공의 풍조에서는 완전히 무력했다.

 

11월 12일 오후, "전국홍위병철저잡란공가점수립모택동사상절대권위혁명조반연락참"이 성립된다. 이는 북경사범대학 홍위병과 곡부 현지 홍위병조직이 연합전선을 형성한 것을 의미했다.

 

11월 13일, 공부의 대문이 강제로 열리고, 노동자, 간부, 학생, 수십리 밖에서 당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온 시골아줌마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온다.

 

11월 15일, 공부대문의 앞에서 "철저도훼공가점서사대회"를 거행하고, 국무원이 1962년 공부의 문앞에 세운, '중국중점문물보호단위'라는 석비를 깨트려 버린다.

 

대회가 끝난 후, 홍위병들은 나뉘어서 각각 공묘, 공림, 주공묘로 몰려가서 비석을 부수고, 편액을 끌어내리고, 소상(塑像)을 파괴한다.

 

어떤 사람은 공자상에서 일부 지장고서(紙裝古書)를 끄집어 낸다. 이것은 장정이 잘 되었고, 고색창연한 명나라 판의 <예기(禮記)>였다. 이어서 사람들은 공자, 그리고 안회를 포함한 '십이철(十二哲)'의 공자제자의 소상에서 <주역>, <상서>. <시경>, <춘추>, <대학>, <중용>, <논어>, <맹자>등을 끄집어낸다. 몰려든 홍위병들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성현들의 두상을 축구공처럼 발로 이리저리 걷어찼다.

 

뇌관과 폭약을 사용하다.

 

손에 삽과 곡괭이를 든 홍위병과 일부 농민들은 삽과 곡괭이를 이용하여, 공자, 공리, 공급 조상3대의 묘에서 동시에 작업을 시작한다. 일시에 먼지가 휘날린다.

 

1966년 11월 29일, 날씨는 차가웠다.

 

유아위는 기억한다. 그날 아침밥을 먹은 후, 담후란이 북경에서 온 홍위병을 데리고 공자묘를 판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와 아이들은 공림으로 가서 구경을 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공자묘의 주위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다.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나무 위와 담장 위에 올라갔다. 질서유지를 책임지고 있던 홍위병은 손에 손을 잡고 사람으로 담장을 만든다. 지닝(濟寧) 지구와 곡부현의 몇몇 지도자들은 담후란의 뒤에 있었고, 그 뒤에는 모자를 씌운 "우귀사신(牛鬼蛇神)"이 있었다.

 

묘의 앞에 있는 큰 묘비는 구호로 가득 채워진다. 홍위병들은 굵은 밧줄을 묘비의 상단에 걸고 사람을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씩 한 쪽의 밧줄을 끌어당이고, 호령을 기다렸다.

 

고음의 나팔이 울리기 시작했다: "파분파토(扒墳破土) 의식을 지금 시작합니다!"

 

거대하고 중후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비석이 쓰러진다. 비석앞에 돌로 된 공탁(供桌) 위에 둘로 갈라진다.

 

북경에서 온 중앙신문영화제작창의 촬영기사들이 앞뒤로 뛰어다니며 이 파사구의 장거를 다큐멘터리로 남겼다.

 

혁명소장은 더욱 빨리 묘를 파내기 위하여, 뇌관과 폭약을 사용한다. 유아위는 친히 공자의 묘가 폭파되는 것을 보았다. 묘의 황토가 도처로 날아갔다. 유아위가 그 곳에 서 있다가, 그의 몸은 "가늘기가 금가루같은" 니토(泥土)를 온통 뒤집어 쓴다. 눈앞에 홍위병들은 나무에 줄을 묶었다. 그 후에 시신을 끌어올린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묘안에서는 모두 5구의 시신을 끄집어 낸다: 공상가(孔祥珂)와 그 부인, 공열이와 그의 처첩. 시체가 막 출토되었을 때는 그래도 보존이 완전했다. 그러나 금방 홍위병들과 농민이 갈고리로 파괴하고, "시신은 금방 바람빠진 풍선처럼 신속히 쪼그라든다."

 

지금, 유아위의 손에는 이들 사진으로 만든 환등편(幻燈片)을 가지고 있다. 모두 당시 홍위병이 선전때 쓰던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중국신문주간>기자에게 보여준다. "한번도 외부인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이것은 증거이다."

 

더욱 완전하고 개끗한 사진은 공홍연(孔紅宴)의 손에 한 세트가 있다. 그는 곡부현 자료관에서 내내 일했다. 다만 그는 <중국신문주간>기자에게 말한다. 이들 사진은 너무 자극적이다. 예를 들어, 시신을 파괴하는 장면은 너무 민감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곤란하다고 한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유아위는 당시의 목격자를 찾았다. "파낸 몇 구의 시체를 그 곳에 5,6일동안 놓아두엇다. 매일 구경하기 위하여 둘러싼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나중에, 하루 저녁에 공림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는 흙구덩이에서 불태워 버린다. 주로 매일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보고, 시체는 남녀가 모두 있어 맨몸이라 그냥 놔두기 곤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룻 밤에 트랙터를 파내다"

 

곡부현 문물관리위원회의 1973년 2월 24일자 <'토공연락참'파괴문물상황에 관한 보고> <토공전보> 및 당사자들의 회고에 따르면,면적이 약 3000여무이고, 2쳔여년간 연속된 공씨가족묘지의 지하부장품은 모조리 약탈되었다.

 

2010년 2월 9일, 음력 설날 전 5일이 되는 날, 곡부는 겨울이래 가장 추운 하루를 맞이했다. 관광객은 아주 적었고, 공림에 있는 분묘는 높이가 서로 달랐다. 한눈에 보기에 끝도 없이 이어지고, 오래된 나무로 가득 차 있었다. 떨어진 낙엽도 두텁게 한 층이 쌓였다.

 

공자, 공리, 공급 조손 3대의 묘는 같이 붙어 있다. 높이 솟은 묘비에는 옆으로 잘린 흔적이 있다. 굵고 큰 강근(鋼筋)으로 연결시겨 고정했다. 두터운 나뭇잎들 사이로 그다지 이름이 없는 공자자손들의 묘가 있고, 그 앞에는 명청시기의 일부 묘비가 철저히 부숴진채로 쓰러져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공령이의 묘는 전체 공림의 가에 있다. 관광객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다. 당시 너무나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孔德成)은 공령이의 아들이다. 당시 장개석이 그를 국보급인물로 보았고, 공덕성과 고궁의 문화재를 함께 대만으로 옮겨갔다. 공덕성은 일찌기 대만 고시원 원장을 지내고, 2008년 10월 세상을 떠난다. 향년 88세이다. 비록 여러번 요청했지만, 그는 고향땅을 밟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는 마음이 아팠을 것이라고. 조상의 묘가 파헤쳐졌다. 이것은 중국전통에서 크나큰 모욕이다.

 

일부 당시 "토공"을 주도했던 핵심인물들은 이미 대부분 죽었다. 한때 이름을 날렸던 담후란은 1978년 북경시공안국에 반혁명죄로 체포되고, 1982년 면소된다. 담후란은 자궁경부암을 앓아 4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다.

 

"당시는 아직 어렸고, 그저 단순한 방관자였다. 나중에 나는 책을 쓰기로 결정하면서, 반성하기 시작했다." 유아위가 말한다. 네가 나쁜 짓을 한 사람이건 아니건, 네가 당시에 소요파였다고 하더라도, 이 죄를 피하기 어렵다. 이것은 시대의 죄이다.

 

비록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지금 공림 부근이 촌민들은 여전히 이 지난 일을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다. 유아위는 말한다. 당시 홍위병이 묘를 파낸 후, 이곳의 촌민들은

미친 듯이 부장품을 약탈했다. 공림에 가까운 임전촌(林前村)에는 당시에 "하룻밤동안 트랙터를 파냈다"는 말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공자자손묘를 파내서 떼돈을 벌었다.

 

가장 심한 것은 일찌기 공림을 보호하기 위하여 파견된 적이 있는 촌간부였다. 나중에 앞장서서 사람들읃 이끌고 묘를 파냈다.

 

홍위병들은 이때 묘를 파는 것이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통제할 수가 없었다.촌민들의 눈에는 금은보화만 보였다. 누구든디 말라다가는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크고 작은 공자자손의 묘에서 파낸 금은주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은행에서 금은을 매입했는데, 1냥에 96위안이었다. 전후로 30여만위안어치를 매입했다. 같이 파낸 옥석은 수매해주지 않으므로 촌민들이 쓰레기로 여겼다.이이들이 가져가서 줄에 매어 길거리에서 갖고 놀았다.

 

1979년, 국가에서 공자묘를 수복한다. 곡부문관회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공자묘비를 찾는다. 그리고 흩어진 비석조각을 는데, 부근의 사원집에서 백개이상의 비석조각을 찾는다. 현재 공자묘의 앞에 있는 비석은 바로 이 돌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겁난 와중에, 어떤 사람은 국보를 보호하려 노력했다. 곡부시 문문국 부국장 항춘생(項春生)은 이렇게 말한다. 문혁후, 현지에서는 공묘의 깨진 비석을 수복하기 위하여 준비한다. 운이 좋았던 것은 초기의 비문탁본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삼공'고적을 수복시키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