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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공자)

공자의 궤변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호각조(胡覺照)


<논어>는 그저 한 권의 어록이다. 잡란무장(雜亂無章)한 외에 또 하나의 현저한 특징은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주관적인 논단은 일단 논리적인 추리를 만나게 되면 그 황당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래에서 공자가 학생 자로와 자공의 질문에 대답한 것을 보면 그것을 엿볼 수 있다.


하루는 자로가 공자에게 묻는다: "제환공이 공자규를 죽이고, 소홀은 자살로 공자규를 따라갔는데, 관중은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관중을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공자가 말한다: "제환공은 여러번 제후의 맹회를 소집했는데, 무력을 쓰지 않았고 관중의 보좌를 받았다. 이렇게 그는 어질다 .이렇게 그는 어질다."


자로가 이런 의문을 제출한 것은 공자가 계속하여, "사군이충(事君以忠)"을 강조했고, 사람들이 느끼기에 거의 아첨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러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춘추시대에 관중은 옛날의 주군인 공자규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 반대로 공자규가 제환공의 압력하에 노나라에 피살되고, 소홀은 자살로 그 주군을 따랐는데, 관중은 죽음으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공자규의 정적인 제환공에 붙어서 재상까지 맡은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불충불의한 일이다.


자로는 공자의 말에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학생이다. 공자에게 이것을 물은 것은 그의 창으로 그의 방패를 공격한 느낌이 있다. 공자는 이미 이율배반에 빠졌다: 임금에 충성하려면 살신성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관중은 이후의 휘황함도 없어지고, 공자가 긍정하고 찬양할 바탕도 없어지는 것이다. 관중의 이후 휘황을 긍정하려면 반드시 충군을 포기한데 대하여 온갖 말로 미화하여야 하는 것이다.


자로가 추궁하여 묻자, 공자는 더 이상 자원기설(自圓其說)할 수 없게 된다. 할 수 없이 "사군이충"을 우회하여 또 다른 인덕표준을 내세운다: 즉 관중이 제환공의 존왕양이(尊王攘夷), 구합제후(九合諸侯)를 도운 공적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이론의 전후모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해주지 않았고, 제환공을 좌우에서 도왔다는 말만 했다. 자공은 이러한 대답에 대하여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자로가 물었던 의문으로 다시 공자에게 묻는다. "관중은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환공은 그의 주군인 공자규를 죽였는데, 그는 스스로 죽지 않고 오히려 제환공의 재상이 되어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관중이 제환공의 재상이 되고, 칭패제후하고, 천하가 천자를 따르도록 바로잡고, 인민들은 지금도 그의 은혜를 입고 있다. 관중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서 야만인에 동화되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소절소신(小節小信)을 기준으로 얘기할 수 있겠는가. 구덩이에 몸을 던져 죽더라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공자는 아마도 화가 난 것같다. 다시 3가지 기준을 내세워 자신을 변호한다: 첫째는 관중이 제환공을 도와서 광정천하(匡正天下)하는 것을 돕고, 민중이 그 혜택을 입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관중이 없었으면, 우리는 모두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충군은 필부필부의 행위준칙이고 소실소절이다. 죽어도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사이비(似而非)의 궤변이다.


첫째, 민중이 혜택을 입는다는 것은 '애민(愛民)'이다. 애민은 충군과 자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극소수의 경우에만 잠시 양자가 통합될 수 있다. 공자의 이 기준은 사실상 이미 '사군이충'의 도덕표준에서 벗어난 것이다.


둘째, 관중이 없었더라면, 중원민중은 모두 오랑캐화되어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너무 과장된 말이다. 맹자가 말한 "하늘이 중니(공자)를 낳지 않았더라면, 기나긴 밤과 같았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유심사관의 산물이다. 역사는 항상 발전의 필요에 따라 각양각색의 영웅.위인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 이런 인물을 필요로 하면, 반드시 그런 인물이 나타난다. 인물의 단층도 없었고, 전체사회가 군룡무수의 야만시기인적도 없었다.


셋째, 공자가 말한 바와 같이 '충군'은 필부필부의 것이고, '소절소신이라는 것은 이미 '사군이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만일 소신소절이라면 인덕표준의 단계로 끌어올려질 수 없다. '군군신신부부자자'의 강령적인 행위준칙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유가제자들이 귀납한 삼강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필부필부라는 말도 아주 황당하다. 역대이래로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없고, 인류의 번성과정에,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유전규칙은 적용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관에 들어가기 전에 운명을 바꿀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만일 눈앞의 불충 혹은 반란이 장래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치기 위한 것이라면 그런 불충과 반란은 질책을 받아서는 안된다. 충군의 도덕적 표준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후 공을 세울 수 있을지 없을지 이름을 날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장래의 일이다. 여러가지 조건의 제약을 받는 것이다. 성패로 영웅을 논할 수는 없다.


확실히, 공자는 두 학생에 의하여 벼랑끝까지 몰려간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몸을 돌리면서도 충군표준의 황당함을 인정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궤변을 내뱉어버리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