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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공자)

절강 구주(衢州): 공자후손의 남천(南遷)

by 중은우시 2012. 1. 23.

글: 왕홍군(王紅軍)

 

 

 

2011년 9월 28일은 공자탄신2562년기념일이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신묘년공제공자대전이 곡부의 공묘에서 거행되었다; 동시에 '학제(學祭)'전례가 절강성 구주의 공씨남종가묘(孔氏南宗家廟)에서 거행되었다.

 

세상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공자의 가묘는 곡부에 있다. 그런데 왜 구주에 또 공자가묘가 있게 된 것일까? 이 1800년된 강남의 중요도시에는 아직도 송나라때 만든 공씨남종가묘가 남아 있고, 6살때 '대성지성선사남종봉사관(大成至聖先師南宗奉祀官)'이 의 직을 세습한 공자의 제75세손 공상해(孔祥楷)는 역사를 이야기 했다.

 

당태종이 정관4년(630년)에 "주현(州縣)이하에 모두 공묘를 세우라"는 조서를 내린 이후, 중국역사상 천개이상의 공묘가 있었다. 그러나, 공씨가묘는 공자의 직계후손들이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전체 중국에 딱 두 곳이 있다. 하나는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이고, 다른 하나는 절강성 구주에 있다.

 

청나라때 병부상서 이지방(李之芳)의 <청강희구주중수공씨가묘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공씨의 가묘는 천하를 뒤져보아도, 오로지 곡부와 구주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공자의 후손은 왜 구주에 남종가묘를 건립했을까? 여기에서는 공자후손의 남천부터 얘기하자.

 

북송말기, 조정이 부패하고, 농민의 난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여진족은 신속히 발전하여, 북송과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의 허약함을 노려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북송정권의 내부는 싸울 것인지 화해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나뉘었고, 마침내 1127년, 정강의 치욕을 당하여, 송휘종, 송흠종이 포로로 잡히고, 황후, 비빈, 황자, 공주등 황실구성원과 주요대신, 궁녀 및 요리사등이 모조리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서 끌려간다. 송휘종의 아홉째 아들인 강왕 조구는 외지에서 하북병마대원수를 맡고 있는 바람에, 황실내에서 유일학 생존한 사람이 된다.

 

대신들의 추천으로 조구는 응천부(하남성 상구)에서 등극한다.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정하니, 조구는 남송의 첫번째 황제 송고종이 된다. 건염2년(1128년) 가을, 송고종은 금나라군대를 피하여, 행궁을 양주(揚州)로 이전한다. "동경의 소속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제사기기, 대악, 의장, 법물을 바치게 하였다" 양주의 동남쪽에 단을 쌓고, 동지교사(冬至郊祀)를 지낼 준비를 한다.

 

<구주공씨남종가묘지>에 따르면, 건염2년, 송고종 조구는 양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공자의 제48대 적장손이며 연성공인 공단우(孔端友)는 조서를 받들어 제사에 참여한다. 일찌기 송년3년(1104년), 26세된 공단우는 조봉랑, 직비각을 수여받고, 연성공을 세습하였다. 숙부 공전(孔傳)의 지지하에, 그는 동생 공단조와 일부 가족들을 고항에 남도록 하고, 자신은 공전과 함께 가족들을 이끌고 11일에 양주에 도착하여, 동지교사에 참가한다.

 

양주교사후, 공단우와 숙부 공전은 곡부로 돌아간다. 그해 12월, 금나라병사들이 동평을 침략하고, 제남으로 내려온다. 공씨가족들은 상의를 거쳐,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孔端操), 조카 공번(孔璠)을 고향에 남겨두고, 공단우는 백며명의 가족을 이끌고 나하한다. 금나라병사들이 산동연주를 함락시키기 전에 남하하여 양주로 피한다,

 

건염3년(1129년) 2월, 금나라군대는 초주를 함락시킨 후 양주로 진격한다. 송고종은 황급히 항주로 도망친다. 공단우는 공전등 백여명의 일족을 데리고 뒤를 따른다. 송고종은 남천한 문무백관, 황실거족의 사후처리를 위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조정에 들어와서 그를 알현하게 한다. 공단우는 일부 가족을 데리고 조정으로 송고종을 알현하러 간다. 그는 황제에 올리는 글에서 공자후손이 조상을 떠난 고통을 얘기한다. 송고종은 감격하여 그의 충성과 공덕을 치하하고 영을 내려 구주의 가옥을 하사한다.

 

정강지난후 남천한 이 공자후손들은 구주에서 살기 시작한다. 구주는 그리하여 공자후손의 두번째 고향이 되고, 역사에서 "동남궐리(東南闕里)"라 칭한다.

 

공자후손이 구주에 안착한 후, 남송정권과 대치하던 금나라황제인 금희종은 곡부의 집안을 지키던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으 아들 공번을 '연성공'에 봉하여, 곡부의 제사를 담당하게 한다. 이때부터 공자세가에는 두 개의 갈래가 생기고, 두 명의 연성공이 나타난다.

 

공씨남종(南宗)에는 공단우, 공개, 공진, 공문원, 공만춘, 공수의 6대 연성공이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통일이후, 원세조 쿠빌라이는 사상통일로 정치통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북종 연성공인 공정(孔湞)은 성을 사칭하고 작위를 빼앗았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논의를 거쳐 '구주에 사는 공자후손이 진짜 후손이다'라고 결정한다.

 

지원19년(1282년), 남종의 공자제53대손 공수가 명을 받아 입조한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그에게 연성공의 작위를 내려 곡부로 돌아가 제사를 받들게 한다. 공수는 원세조 쿠빌라이에게 두 가지 곤란한 점을 얘기한다. 그는 구주에 이미 5대의 분묘가 있는데, 만일 황상의 명을 받아 북천하면, 자신은 선조의 묘를 차마 떠날 수가 없다는 것, 만일 선조의 묘를 떠나지 않으면 황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공수는 모친을 모시고 남으로 돌아갈테니, 연성공의 작위는 동생인 공치(孔治)가 세습하게 하는게 좋겠다고 한다.

 

이것은 역사상 '공수양작(孔洙讓爵)"이라고 불리는 일이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공수를 칭찬한다. '영예를 받지 않을지언정 도리에 어긋나지는 않겠다고 하다니, 그야말로 성인의 후손이로다." 이렇게 하여 구주공씨남종의 양보로, 원성종 원정원년(1295년), 곡부의 공치가 '연성공'의 작위를 세습한다. 이로써 남북은 다시 통일된다.

 

남종은 작위를 양보했지만, 공자의 도는 시종 어기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계기로 민간으로 들어가, 평민교육에 힘쓴다. 혹은 학관이 되고, 학은 산장이 되어, '유학남점, 이학북전'에 공헌을 한다.

 

명나라 홍치말기, 구주지부 심걸연은 '남도' '예양'등의 사실을 가지고 조정에 작위를 되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명나라조정은 정덕원년(1506년), 공자의 59대손 공언승으로 하여금 '한림원오경박사'를 세습하게 하고, 연성공 둘째아들의 대우를 받도록 한다. 그후 명,청의 통치자들은 남종의 '전례'를 대대로 격을 올려주었다.

 

신해혁명후, 북양정부와 민국정부는 여전히 유교를 숭상했다. 민국24년(1935년) 남경정부는 작위를 폐지한다. 남북양종을 모두 '대성지성선사봉사관'으로 임명한다. 여전히 세습직이다. 1946년, 국민정부는 잔존한 공씨남종가묘를 수리하며, 나이 6살된 공상해는 '대성지성선사남종봉사관'이 된다.

 

공상해의 설명에 따르면, 공자후손의 남천후, 공단우와 그 가족은 전가지보인 공자 (孔子)및 기관부인(亓官夫人)의 해목상(楷木像)을 가져왔다고 한다. 공씨자손들의 마음 속에, 공자해목상은 공자의 화신이다. 그리하여 아주 높은 권위와 신력이 있다. 1960년, 공자해복상은 곡부의 공자가묘로 도라간다. 현재 구주 공씨가묘의 사로각에 있는 해목상은 북종이 보내온 복제품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공자의 생전에 제자가 3천명이었다. 공자가 사망한 후, 제자들은 비통하기 그지없어, 공자의 묘 앞에서 3년간 수묘했다. 3년후, 자공만이 차마 떠나지 못하고, 공자의 묘 앞에 띠집을 짓고 계속 3년을 더 지냈다. 그 기간동안, 그는 자주 스승의 생전언행과 용모를 추억하며, 해목을 잘라, 마음 속의 생각대로 그려서, 마침내 공자와 기관부인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해복상의 높이는 2척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공자는 장포대수(長袍大袖)에 손에는 조홀(朝笏)을 들고 있다. 기관부인은 긴치마가 땅바닥까지 끌리고, 모습이 아주 생동감있다. 공자가 사망한 다음 해, 노애공은 전거실을 묘당으로 하였다. 당초 띠집 3칸이 있던 곳이었는데, 공자부부의 해복상은 조각이 완성된 후 이곳에 모셔진다. 당시의 시설은 아주 간단했다.

 

민간전설에 따르면, 연성공 공단우는 등에 이 두 해목상을 지고 가족을 이끌고 남하했다고 한다. 진강의 부두에 도착했을 때, 모두 배고크고 힘들어서 강언덕에 올라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 금나라병사들이 돌연 급습했다. 이때, 금나라병사들이 습격을 했고, 해목상을 빼앗길 상황에 처했는데, 돌연 광풍이 불어 선박이 뒤집어진다. 금나라병사들은 이를 보고 배가 뒤집어져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여 발길을 돌렸다. 공단우는 급히 가족들에게 해목상을 건지도록 명령했다. 이때 강위에 세 명의 신인이 구름을 타고 해목상을 두 손으로 바치고는 강변으로 다가왔다. 공단우와 가족들은 해목상을 조심스럽게 강언덕위로 모셔온다. 그리고 강언덕에서 향을 사르고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 이때 향불에서 '노부산신(魯阜山神)'이라는 네 글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원래, 공자의 고향산신이 해목성상을 보호해준 것이다. 나중에 고향의 산신들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공단우와 가족들은 구주에 '가양수묘(柯陽首廟)' 즉, 삼신묘(三神廟)를 건립한다.

 

송이종3년, 조정은 구주공자가묘의 건립을 명한다. 공자 및 기관부인의 해목상은 이 곳에서 27대 860여년을 보낸다. 그 동안 여러번의 겁난을 겪는다. 남조가묘에 있어서, 왕조가 바뀌거나, 전쟁이 일어나거나 하여 건물을 옮겨지은 것이 3번이다. 매번 파괴될 위험에 처했지만, 해목상은 완전하게 보호해온다.

 

항일전쟁이 시작된 후, 일본군은 두 번이나 구주를 함락시킨다. 구주에 침입한 일본군은 구주의 공씨가묘에 공자 및 기관부인 해목상을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 희세진보를 빼앗으려 한다. 당시 국민정부는 절강성정부에 전보를 보내어 남종봉사관에게 해목성상을 가지고 용천, 경원산간지역으로 옮기도록 명한다.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공자후손은 뛰어난 장인을 불러 복제품을 만들게 한다. 봉사관 공번호(孔繁豪)는 진품을 가지고 용천, 경원으로 떠난다. 그리고 진짜 해목상은 구주의 깊은 산 속에 숨겨둔다. 구주를 침입한 일보군은 공자해복상을 얻지 못하자, 화가나서, 가묘안의 400여건의 물품을 약탈한다. 그리고 공묘의 장서루를 불태운다. 항전승리후, 공자해복상 진품은 다시 구주의 공자가묘에 모셔진다. 동시에 복제품을 불태워버린다. 나중에 진위를 가리기 힘들어질까 우려한 것이다.

 

800여년의 비바람과 전화에도 구주의 공자가묘는 여전히 옛 법도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사로각(思魯閣)을 보존하여,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