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북대와 청화

유민홍(兪敏洪): 북경대학 입학식에서의 강연

중은우시 2009. 1. 8. 13:03

강연: 유민홍(신동방교육과기집단 동사장 겸 총재)

시간: 2009년 9월 21일

 

여러분 안녕하세요(박수)

 

허교장께서 저에게 이렇게 숭고한 영예를 안겨주셔서, 제가 북대에서의 경험을 얘기할 수 있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박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북대는 나의 일생을 바꾼 곳이라고. 나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킨 곳이라고, 나를 한 농촌소년에서 세계로 향할 수 있게 한 곳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건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북대가 없었으면 나의 오늘도 없었다. 북대는 나에게 여러가지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었고,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아픈 추억도 남겨주었습니다. 바로 이 아름다움과 아픔의 중간에, 좌절, 노력과 진보의 중간에서 자신을 찾아내고, 자기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약간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생활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많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씁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우리 반의 한 남학생은 매일 여학생 기숙사동의 아래에서 바이올린을 켰습니다.(웃음소리). 여학생들의 관심을 끌려는 거였지요. 그런데 나중에 여학생이 던진 물병에 맞았습니다. 나는 또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여학생의 관심을 끌려고 매번 겨울방학과 여름방학때 그 여학생의 짐을 들어주었습니다.(웃음소리, 박수소리). 나중에 나는 그 여학생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웃음소리). 나는 녀에게 그런데도 왜 나에게 짐을 들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남자친구를 좀 쉬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웃음소리. 박수소리). 나는 또 기억합니다. 막 북대에 들어갔을 때, 나는 보통화(표준말)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전체 반의 학생들이 회의를 열어서 서로 소개하였는데, 나도 일어서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반장이 일어나더니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민홍 일본말로 안할 수 없어?" (웃음소리). 나는 나중에 꼬박 1년동안, 라디오를 가지고 북대의 나무숲에서 라디오방송국의 아나운서를 흉내내보았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보통화는 여전히 잘 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성장은 평생 계속되는 것일 것입니다. 북대는 우리 생활의 하나의 시작입니다. 끝이 아닙니다. 많은 일들이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광잠(朱光潛) 교수를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시간동안, 우리 반의 학생들은 매일 돌아가며 휠체어를 밀면서, 북대안을 교수님과 함께 산책하였습니다.(박수소리). 매번 내가 휠체어를 밀 순서가 되면, 나는 마음 속으로 주광잠 교수를 숭배하는 마음에서 신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에서 책을 볼 때 가장 많이 본 것이 미학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교수님이 <<서양미학사>>라는 책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책은 내가 대학에 들어온 이후 두번째로 본 책입니다.

 

왜 두번째 책인가? 왜냐하면 내가 읽은 첫번째 책은 이렇게 읽게 되었습니다. 내가 북대에 들어온 후에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한 학생이 이미 기숙사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침대에 누워서 책을 하나 읽고 있는데, <<제3제국의 흥망>>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대학에서도 이런 책을 또 읽어야 되느냐?" 그는 책에서 눈길을 떼어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그의 책을 계속 읽었습니다. 그 눈길은 나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북대에 들어오는 것이 단지 전공과목을 공부하는 것뿐아니라, 많고 많은 책들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을 북대 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깁니다(박수). 그래서 내가 북대에서 처음 읽게 된 책은 바로 <<제3제국의 흥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을 읽었습니다. 그후에 나는 그 학생을 찾아가서, "우리 <<제3제국의 흥망>>에 대하여 얘기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나는 이미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웃음)

 

나는 또한 나의 지도교수이신 이부녕(李賦寧) 교수를 기억합니다. 원래 북대 영어학과의 학과장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신개념영어>> 제4권을 가르쳐줄 때, 매번 칠판에 아주 깨끗하게 글을 썼습니다. 아주 멋있었습니다. 항상 칠판의 왼쪽상단에서부터 쓰기 시작하여,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릴 때면 마침 오른쪽 하단에서 쓰기를 마쳤습니다.(박수) 나는 또한 나의 영국문학사의 스승이신 나경국(羅經國) 교수를 기억합니다. 내가 북대에서 보낸 마지막 1년동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시험에 낙제를 한 것입니다. 나는 나교수님을 찾아가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과목에서 낙제하면 저는 졸업을 못합니다." 그러자 나교수님은 "너에게 낙제하지 않을 점수를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기억해라. 너는 반드시 나중에 내가 이 점수를 줄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박수) 그래서 북대의 스승들의 관용, 학식, 분방,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북대의 학생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진정으로 북대의 정신을 얻도록 해주었습니다. 나는 허지홍 총장이 학생들에게 <<은형의 날개>>라는 노래를 불러주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새로운 시야를 얻었고,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북대의 총장은 당연히 이러해야 합니다(박수).

 

나는 나 자신이 북대에 있을 때 얼마나 고민했는지도 기억합니다. 첫째는 보통화를 잘하지 못해서이고, 둘째는 영어수준이 엉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학입시때에 3년간 노력하여 북대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두번을 낙방하고, 마지막에 북대에 아주 예상치도 못하게 합격했습니다. 나는 이전에 북대를 내가 다닐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북대는 내 마음 속의 하나의 성지였습니다. 영원히 붙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세번째 대학입시때 나의 입시성적은 북대커트라인선보다 7점이 높았습니다. 나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이를 악물고 지원서에 "북경대학"이라는 네 글자를 써넣었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내 점수보다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합격하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북대의 입학사정선생님들이 아주 안목이 있으셨나 봅니다. 30년후의 오늘날 제가 있을 줄 알고 있었던 것같습니다.(박수) 다만 실제로 나의 영어수준은 형편없었습니다. 농촌에서는 들을 수도 없었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문법과 단어를 죽어라 외우는 것뿐입니다. 우리 반을 나눌 때, 50명의 반학생을 3개반으로 나누었습니다. 나의 영어시험성적은 괜찮았기 때문에, A반으로 배정받았습니다. 다만 1개월후, 나는 C반으로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C반은 "발음, 어조 및 청력 장애반"이라고 불렀습니다.(웃음)

 

나는 또 기억합니다. 스스로 북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홍루몽>>조차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친구들이 한권 한권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나도 죽어라 따라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대학에서 거의 800여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5년의 시간을 들여서(박수). 다만, 여전히 나의 그 동창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 기억이 우리 반의 반장인 왕강은 서벽(書癖)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도 신동방에 있습니다. 신동방의 교육연구원 원장입니다. 그가 책을 사러갈 때마다 나는 그를 따라갔습니다. 당시 북대는 우리에게 매월 20여위안의 생활비를 주었습니다. 왕강은 독특하게 생활비를 둘로 가릅니다. 절반은 책을 사는데 쓰고, 절반은 식권을 사는데 씁니다. 책을 사는 돈으로 절대 식권을 사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식권이 없게 되면, 여러 곳에 빌리러 다닙니다. 빌리지 못하면 훔칩니다(웃음). 나중에 나는 그의 이런 습관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생활비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절반은 책을 사는데 쓰고, 절반은 식권을 샀습니다. 식권이 다 떨어지면 나는 그의 것을 훔쳤습니다(웃음. 박수).

 

전혀 과장하는게 아니라, 우리반의 동창들은 당시 북대에서 정말로 독서를 가장 많이하는 반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반은 당시에 아주 활발했습니다. 시인만도 여러명이 나왔습니다. 나중에 아주 유명한 시인이 된 서천(西川)의 진짜 이름은 유군입니다. 바로 우리 반이었습니다.(박수) 나는 또한 우리 반이 당시 분위기를 이끌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북대는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있었는데, 하루 저녁에는 모두 놀다가 너무 흥에 겨워서, 첩면무(貼面舞, cheek-to-cheek dance, 얼굴을 마주대고 추는 춤)를 추었습니다. 다음주에 교육부에서 비판통보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춤을 추려면 반드시 단정하게 추어야 했습니다. 남녀학생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풍기문란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현재 우리때보다 훨씬 행복합니다. 춤을 마음대로 출 수 있을 뿐아니라, 손을 붙잡고 캠퍼스를 거닐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때 만일 남녀학생이 손을 잡고 캠퍼서를 거닐었으면, 바로 미명호에 집어던져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12시이후에 캠퍼스를 함께 돌아다녔습니다. (웃음. 박수)

 

나는 또한 우리 반에 50명의 학생이 있는데, 마침 스물다섯명은 남학생이고 스물다섯명은 여학생이었습니다. 나는 이 비율을 들은 후에 아주 흥분했습니다(웃음). 내 생각에 모두 1:1로 짝을 맞출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학생들은 외모가 영준하고 멋있으며 풍류적인 남학생만 좋아했습니다. 나처럼 외모는 별로이지만 내심은 풍부한 감정을 지니고, 미래에 거대한 잠재력이 있는 사람은 여학생들이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웃음. 박수)

 

나는 또 기억합니다. 2년간 힘들게 노력하면 성적이 다른 동창들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금방 여식(呂植) 교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비록 고등학교, 대학입시때는 성적이 아주 좋았겠지만, 1등을 했겠지만, 북대는 엘리트가 너무 많습니다. 앞뒤좌우는 모두 IQ가 아주 높은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각 성에서 1등이나 2등을 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대학2학년이 끝날 때에도 나의 성적은 여전히 끝에서 몇번째에서 맴돌았습니다. 아주 열심히 하였지만, 역시 아주 우울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로해주는 여학생도 없었습니다(웃음). 이것은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나는 대학3학년때 큰 병을 앓게 됩니다. 병명은 전염성침윤폐결핵입니다. 당시 나는 아찔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마침 <<홍루몽>>을 읽고 있었는데, 바로 임대옥이 폐결핵으로 토혈하고 죽는 그 부분이었으니까요.(웃음) 나는 나의 생명이 여기서 끝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나중에 북대병원의 의사가 나보고 현재 이런 병은 다 고칠 수 있다. 다만 병원에 1년간 입원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병원에 1년간 입원했습니다. 1년간 우울해하면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600여수의 시도 썼습니다. 아쉽게도 시는 하나도 출판하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시를 쓰는 것과 인연을 맺습니다. 다만, 나는 풍부한 감성은 지니고 있지만, 뛰어난 글재주는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나는 아주 다행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진정으로 시인이 된 사람은 나중에 다 일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당시에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시인인 해자(海子)와 함께 시를 썼는데, 낮ㅇ에 그가 기찻길에 누워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루종일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붓을 놓았고, 다시는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박수)

 

내가 북대에 있을 때, 대학 4학년졸업할 때, 나의 성적은 여전히 전체반에서 마지막 몇등이었습니다. 다만, 당시에 나는 이미 양호한 심리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총명함에서는 동창들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나는 또 다른 한가지 능력이 있다. 바로 나는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반의 졸업행사때 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어떤 동창들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나는 우리 반의 뒤떨어진 학생이다. 다만 여러분들은 걱정할 것없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5년간 해서 이루는 일을 나는 10년간 할 것이다. 여러분이 10년간 해서 이루는 일을 나는 20년간 해서 이룰 것이다. 여러분이 20년간 해서 이룰 일을 나는 40년간 해서라도 이룰 것이다."(박수) 나는 그들에게 또 말했습니다. "만일 그대로 안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유쾌한 심정으로, 건강한 신체로, 팔십이 넘은 후에 여러분들을 다 먼저 보내고 나서 갈 것이다" (박수. 웃음)

 

한가지 이야기가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동물이라고 한다. 하나는 웅응(雄鷹, 수컷매)이다. 자신의 천부적인 자질과 날개로 날아서 올라간다. 우리 여기에도 많은 웅응같은 인물이 있다. 많은 학생들은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높은 점수를 얻는다. 많은 학생들은 나중에 아마도 손쉽게 북대를 졸업한 후에 하버드, 예일, 옥스포드, 캠브리지와 같은 명문대학에 가서 계속 학업을 닦을 것이다. 많은 학생들은 천부적인 재능이 충만해서, 공부하지 않고도 이런 재능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금방 언급한 우리반의 반장인 왕강은 모방능력이 아주 뛰어나다. 어느 곳에 가든지, 한마디 말을 들으면, 바로 모방해내는데 완전히 똑같다. 그래서 그는 북경대학 방송반에서 아나운서를 4년간이나 꼬박 했었다. 나는 매일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 속으로 입을 악다물고 이빨을 갈면서 그를 미워했었다.(웃음) 그래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웅응과도 같다. 다만, 여러분도 모두 알고 있겠지만, 또 하나의 동물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것은 달팽이(蝸牛)이다. 달핑이는 그저 기어서 올라간다. 바닥부터 기어서 위까지 올라가는데 1개월이 걸릴 수도 있고, 2개월, 심지어 1년, 2년이 걸릴 수도 있다. 피라마드의 꼭대기에서 사람들은 확실히 달팽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달팽이가 아주 순조롭게 기어올라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떨어졌다 다시 기어올라가고, 떨어졌다 다시 기어올라가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다만,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달팽이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면 그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그가 얻은 성취는 웅응과 똑같다는 것이다.(박수). 그래서, 아마도 여기에 앉은 여러분들 중에는 웅응도 있고 달팽이도 있다. 내가 북대에 있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계속 내가 한마리의 달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계속 기어올라간다. 아마도 아직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어서 올라가기만 하면, 충분히 스스로에게 생명이 감동을 남길 수 있다.(박수)

 

나는 자주 학생들에게 말한다. 만일 우리의 생명에 스스로를 위하여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는 날이 없다면, 너의 생명은 헛살았다. 여기의 많은 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북대에 들어왔다. 다만 북대는 여러분들이 배우는 종점이 아니다. 오히려 여러분들 생명의 출발점이다. 1살부터 18살까지의 기간동안 여러분은 스승의 말을 듣고, 부모의 말을 들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독립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를 위하여 자기가 감동하는 나날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여러분이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 부유한 가정에서 온 학생도 있고, 가난한 가정에서 온 학생도 있다. 우리 생명의 시작점은 네 스스로 부자가정이나 빈곤가정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만일 빈곤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부친에게 나는 여기 살기 싫으니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생명의 종점은 네가 선택할 수 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과거에 모두 아주 잘해왔다. 이미 18세의 같은 나이에서는 다른 중국학생들보다 앞서서 온 것이다. 왜냐하면 북대는 중국의 자랑이고, 세계의 자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북대에 왔다고 너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더더구나 너의 미래도 잘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후반의 50년, 60년 심지어 100면을 네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본인을 놓고 말하자면, 두가지를 마음 속에 품고 있다. 그 두가지를 성취해야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이상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하나의 느낌이 있었다. 지평선을 넘어 먼 곳을 가고 싶었다. 나는 이것을 '지평선을 넘고자 하는 갈망'이라고 표현한다. 바로 나의 이런 강렬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가지고 대학입시를 여러번 칠 수 있었다. 당연히 나의 생명에도 모델은 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이웃이 하나 있는데, 매우 유명하다. 그는 나의 평생의 모델이다. 그의 이름은 서하객(徐霞客)이라고 한다. 당연히 오백년전의 이웃이다. 다만 그는 확실히 나의 이웃이다. 강소 강음사람이다. 나도 강소 강음사람이다. 서하객을 숭배하기 때문에, 나는 대학입시때 지리과목에서 97점을 받았다(박수). 그리고 서하객이 지평선을 넘고 싶다는 이런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을 한 것이다. 서하객이 중국을 다 돌아다녔다면, 나는 세계를 다 돌아다니겠다. 그리고 나는 현재 자신의 이런 꿈을 실현해가는 중이다. 그래서, 마음 속에 이상을 가지고 있다면, 지향을 지니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마침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그 과정에서 힘들게 노력하고, 좌절과 실패를 참고 견디는 능력이고, 계속 자신의 흉금을 넓혀야 비로소 일을 더욱 잘 할 수 있다.

 

둘째는 양심이다. 무엇이 양심인가? 바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면목이 서고 다른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나눠가지려는 태도이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정신이다. 양심이 있는 사람은 구체적인 생활에서 하는 일로 표현된다. 그리고 하는 일이 반드시 너의 미래의 생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얘기하고 나의 강연을 마치고자 한다.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잡아먹었으니까.

 

이야기의 하나는 한 기업가가 나에게 그가 대학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그의 반에 친구가 있는데, 가정이 비교적 부유했다고 한다. 매주 그는 6개의 사과를 학교로 가지고 왔다. 기숙사에 있는 친구들은 1인당 1개씩 주려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는 하루에 1개씩 먹었다. 사과가 그의 것이므로, 그가 주지 않으면 빼앗아 먹을 수는 없지만, 이 일로 그는 친구들에게 한가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너무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이 기업가는 성공을 했는데, 그 사과를 먹던 친구는 아직 성공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기업가의 팀에 합류하고 싶어했다. 다만 나중에 사람들이 함께 상의한 결과, 그를 가입시키지 말자고 결론이 났다. 원인은 간단했다. 왜냐하면 대학에 있을 때 그는 한번도 나눠먹는 정신을 발휘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대학시대의 가장 중요한 점은 친구들과 네가 가진 물건, 사상, 재산등을 나누라는 것이다. 설사 사과 1개라 하더라도 6조각으로 나누어 모두 함께 억자는 것이다(박수).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나중에 얻는 것이 더욱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내놓은 것은 절대로 공짜로 내놓은 것이 아니다.

 

다시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다. 북대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 나는 친구들을 위하여 서비스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성적은 계속 별로였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노동을 좋아했다. 나는 근면한 노동을 통하여 교수와 친구들의 주목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소학교 1학년때부터 계속 교실청소를 했다. 북대에 들어온 후에 나는 하나의 좋은 습관을 길렀다. 매일 기숙사의 청소를 하는 것이다. 한번 시작하다보니 4년간 계속 했다. 그래서 우리 기숙사는 한번도 청소당번표를 만든 적이 없다. 이외에, 나는 매일 기숙사의 물병을 가지고가서 친구들을 위해 물을 떠다 놓았다. 친구들이 "유민홍. 왜 아직 물을 안가지고 왔어"라고 하곤 했다(웃음). 다만 나는 물을 가져오는 것이 뭐 손해보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 친구들이고,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하니까. 여러분들은 내가 이 일을 괜히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시 10년이 흘렀다. 95년 연말에 신동방이 일정한 규모가 되었다. 나는 협력할 사람을 찾았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카나다에 가서 나의 옛날 동창들을 찾게 되었다. 그들은 대학에 있을 때 나의 생명의 모범들이었다. 내가 금방 얘기했던 왕강도 포함되어 잇다. 나는 그들이 돌아오도록 유혹하기 위하여 달러를 가득 들고 갔다. 매일 미국에서 펑펑 돈을 썼다. 그들에게 중국에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하면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들이 돌아오기는 왔다. 그런데, 나에게 아주 의외의 이유를 얘기했다. 그들은 "유민홍, 우리가 돌이가는 것은 네가 과거에 우리에게 4년간 물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박수)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너는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너는 밥을 먹으면서 우리에게 죽을 먹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우리는 함께 중국으로 돌아왔다. 함께 신동방을 만들어보자." 그리하여 오늘날의 신동방이 만들어진 것이다.(박수)

 

사람의 일생은 분투의 일생이다. 다만 어떤 사람의 일생은 너무나 위대하고, 어떤 사람의 일생은 너무나 형편없다. 만일 우리가 위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고, 선량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많은 형편없는 일들은 쌓아서, 하나의 위대한 생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다만, 만일 네가 매일 허송세월하고, 이상도 없다면 거기서 진보는 멈추는 것이다. 그러면 평생 쌓아가는 것이 모조리 형편없는 나날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 모두가 자신의 매일의 평범한 나날을 쌓아서 위대한 인생으로 만들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나는 전체 동창생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앉아있는 3천의 신입생들에게 마음의 뜻을 나타내고 싶다. 나는 전체 동창생과 신동방을 대표하여 200만인민폐를 허교장에게 기증하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의 공부, 활동과 성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박수)